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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필적과 대부분 일치 정말 배교했다면 지석 썼을까[가톨릭신문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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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1-10-18 조회 4,4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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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윤지충·권상연 묘에서 나온 사발 글씨는 다산의 필적

정약용 필적과 대부분 일치… 정말 배교했다면 지석 썼을까?

정약용 글씨와 유사한지 조사
두 필체 선명한 일치도 확인
윤지충과 다산 형제는 사촌
형제가 윤지충에 천주교 전파 

복자가 사학죄인으로 사형되자 다산은 사발에 정성껏 글 적어 슬픔 달래고 작별 고했을 것 

발행일2021-10-17 [제3265호, 7면]

 

백자사발 지석 글씨 47자와 다산 친필 필적 대조표다산 친필로 제시한 글씨는 「여유당시집」, 「산재냉화」(山齋冷話) 등 여러 친필첩에서 가려 뽑았다. 제시한 글씨 외에도 거의 유사한 형태의 예시가 여러 개씩 반복적으로 확인됐다.정민 교수 제공

지난 3월 11일 전북 완주 초남이성지 바우배기에서 발견된 복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의 백자사발 지석의 글이 다산 정약용(요한)의 필체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함께 발견된 윤지헌(프란치스코)의 백자제기도 정약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내용은 ‘다산 전문가’로 정평이 난 한양대학교 국문과 정민(베르나르도) 교수의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정 교수의 기고를 통해 복자들의 지석에 관한 조사, 그 조사를 통해 밝힐 수 있는 교회사적 의미들을 들어본다.



지난 9월 1일, 전주교구의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 세 분 순교자의 유해 발굴 소식에 깜짝 놀랐다. 9월 24일 공개된 보고서를 통해 무덤에서 나온 백자사발 지석의 글씨를 처음 봤다. 한눈에도 필체가 대단히 낯익었다. 다산 연구자인 필자는 그간 다산의 친필 글씨를 수없이 보아왔다. 이것은 다산의 글씨가 아닌가?

고해상도의 사진을 구해보니 느낌이 더 분명했다. 한 글자씩 잘라 표로 만들었다. 그 아래칸에 다산의 각종 친필에서 같은 글자를 찾아 채우기 시작했다. 채집 글자의 모집단이 많아질수록 낱낱의 글자가 보여주는 다산의 특징적 필체와의 일치도가 점점 선명해졌다. 붓질의 습관과 구성의 특징도 대부분 일치했다. 마침내 빈칸을 거의 채우고 나자, 애초의 의구심은 점차 확신 쪽으로 바뀌었다.

예컨대 ‘본’(本)자의 경우 2개의 예시 모두 다산만의 독특한 습관을 보여주는데, 두 글자 모두 거의 똑같은 용례가 여럿 나왔다. ‘휘’(諱)나 ‘권’(權)에서 부수자인 ‘언’(言)과 ‘목’(木)을 작게 쓰는 습관, ‘연’(然)이나 ‘생’(生)자의 기울기 등 다산만의 특징이 반복됐다. 물론 47자의 예시만으로 다산의 친필로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글씨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배열할 때 이 정도의 유사도를 보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사학죄인으로 사형 당한 죄인의 지석 사발을, 당시 배교를 공언한 다산이 쓸 수 있나? 다산은 광중본 「자찬묘지명」에서 자기 입으로 “정미년(1787) 이후 4·5년간 서학에 자못 마음을 기울였다(丁未以後四五年, 頗傾心焉)”고 썼다. 1791년 진산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전심으로 천주교 활동에 힘을 쏟았다는 뜻이다. 그런 그가 윤지충의 죽음 이후 천주교를 버렸다. 그 이유는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진실일까? 1787년에 다산은 성균관의 시험에서 제사에 관한 문제가 출제되자 이승훈과 함께 백지를 제출했다. 그때 두 사람은 제사를 지내는 것은 물론 제사에 대해 글을 쓰는 것조차 천주교에서는 금하기에 백지를 낸다고 말했다. 「송담유록」에 이기경과 강이원의 증언이 남아있다. 그러니 1791년에 새삼 조상 제사를 이유로 배교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다산은 이때도 신앙생활을 놓지 않았고, 드러나지 않게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 지석의 글씨가 거꾸로 이를 증명한다.

그뿐인가? 윤지충의 고모가 다산의 어머니였다. 둘은 사촌 간이었다. 윤지충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파한 것은 다산 형제였다. 윤지충은 서울 생활 당시 명례방에 살았고, 다산은 그 이웃에 살았다. 1787년 윤지충은 정약전을 대부로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사발에 적힌 대로 바오로였다. 이토록 살갑게 지내던 그가 천주교 신앙 문제로 목이 잘려 사형 당했을 때 다산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윤지충은 어머니의 오빠가 낳은 다산 외가 쪽의 적장자였다. 그가 아들도 없이 목이 잘려 죽어 집안의 대가 끊겼으니 다산의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사발에는 1792년 10월 12일이란 날짜가 적혀있다. 11개월 전인 1791년 11월 12일에 그는 처형됐다. 시신은 가매장됐다가, 육탈된 뒤에 1주기를 맞아 바우배기에 이장됐다. 이때 다산은 인근 광주 분원에서 구운 그릇에다 정성껏 글씨를 써서 다시 그 위에 유약을 발라 구워 전주 유항검에게 내려보낸 듯하다. 성명(聖名) 즉 세례명까지 써넣은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복자 윤지충의 묘에서 발견된 백자사발. 사발에 적힌 지석의 필체가 다산의 필체와 흡사하다.

이 같은 추정이 사실일 경우 이는 당시 윤지충, 권상연의 이장이 교계 차원의 공식성을 띤 행사로 진행됐음을 뜻한다. 윤지충의 이종사촌 유항검이 자기 소유의 땅에 이들을 묻고 묘소를 꾸몄다. 1795년 4월 주문모 신부가 호남 사목방문을 내려왔을 때, 유관검은 그 묘소를 가리키며 흠숭의 뜻을 밝혔다. 당시 윤지충과 권상연은 그들의 고결한 죽음을 통해 신앙의 모범으로 우뚝 서서 주교(主敎)로 떠받들어지고 있었고, 이들 묘소는 특별 관리 대상이었다.

사정이 이럴 때 다산이 이들의 지석 사발에 글씨를 쓴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윤지충 사후 다산은 큰 부채감을 지녔을 것이다. 다산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정성껏 글씨를 써서 그와 영결코자 했던 듯하다. 두 사발에는 서로 다른 무덤의 위치를 알려주는 문장이 포함됐다. 어느 한 무덤이 발굴됐을 때, 이 글씨를 보고 다른 무덤을 찾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곳은 애초부터 순교자 묘역으로 조성됐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윤지헌의 묘소에서 나온 제기 사발 2개 중 하나에는 청화로 중앙에 원을 그리고 가운데에 ‘제’(祭)자를 써놓았다. 이와 똑같은 형태의 제기가 1776년에 진도에 귀양 갔다가 1797년에 영암에서 죽은 실학자 이덕리의 묘소에서도 똑같이 출토됐다. 이 제기는 다산의 집 근처에 있는 광주 분원(分院)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이상 글씨체의 대조와 다산과 윤지충과의 개인적 인연 등 제반 정황으로 보아, 필자는 개인적으로 사발의 글씨가 다산의 친필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생각한다.

한편 윤지충과 윤지헌의 삼촌 윤징(尹憕·1730~1797)이 1797년 정사박해 때 순교한 사실이 「남보」(南譜)에 나온다. 1791년 윤지충 사후 윤지헌이 고산 저구리로 들어가 이존창과 합력해 세운 신앙공동체와, 이후 주문모 신부와의 관계에서 윤지헌의 활약에 대한 보고도 향후 더 면밀하게 검토돼야 한다. 초기 교회에서 윤지헌의 역할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시성시복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계시처럼 발굴된 세 사람의 무덤과 지석 사발은 그 시절의 생생한 기억 속으로 우리를 소환하고 있다.
 

정민(베르나르도)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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