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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년 전 참형 흔적 그대로 피의 순교 증거 찾았다[가톨릭평화신문 202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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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1-09-10 조회 70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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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년 전 참형 흔적 그대로… ‘피의 순교’ 증거 찾았다

전주교구, 복자 윤지충·지헌 형제와 권상연 유해 발견

 

2021.09.12 발행 [16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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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남이성지 바우배기 순교자 묘지 위치. 전주교구 홍보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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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남이성지 바우배기에서 김성봉 신부와 관계자들이 유해 발굴을 하고 있다. 전주교구 홍보국 제공



순교자들이 죽음으로 증거한 신앙은 한국 교회 237년 역사의 씨앗이 됐다. 신앙 선조들은 200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모습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그리고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유해가 발견됐다. 신앙 선조들은 ‘참된 신앙’을 다시 한 번 전하고 순교 신심을 일깨우기 위해 200여 년 만에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천주를 큰 부모로 삼다

윤지충은 1759년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군과 논산군 지역)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촌 정약용(요한 세례자)을 통해 신앙에 대해 알게 됐고, 1787년 인척인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윤지충은 이후 사촌인 권상연(야고보)과 동생인 윤지헌에게도 교리를 전해 신앙을 받아들이게 했다.

권상연은 1751년 진산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권상연은 학문에 정진했으나 사촌인 윤지충에게 교리를 배운 뒤 학문을 버리고 1787년 유항검에게 세례를 받았다. 권상연은 교리를 실천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과 함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폐제분주(廢祭焚主)’는 유교가 지배하던 당시 사회체제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불사르고 전통 예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소문은 널리 퍼져 조정에까지 전해졌다. 결국 ‘그들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고, 피신해 있던 그들은 1791년 10월 관아에 자수했다. 진산 군수는 신앙을 버릴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한 그들은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12월 8일 전주 남문 밖(현 전동성당 터)에서 순교했다.

윤지헌은 1764년 태어났다. 형인 윤지충을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됐고 1787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윤지헌은 1791년 윤지충이 순교하자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었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진산을 떠나 전라도 고산의 운동(현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윤지헌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체포돼 1801년 9월 17일 전주 남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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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지충 바오로의 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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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상연 야고보의 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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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유해. 전주교구 홍보국 제공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마을은 ‘호남의 사도’ 복자 유항검의 생가터가 자리한 곳이다. 동정부부 순교자 복자 유중철(요한)과 이순이(루갈다)가 4년 동안 동정부부의 삶을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유항검이 복음을 전하던 교리당과 순교 후 파가저택(破家澤, 조선 시대 죄인의 집을 헐어버리고 그 집터에 웅덩이를 파 연못을 만들던 형벌)한 역사적 흔적이 있다. 초남이에서 북쪽으로 1㎞가 채 안 되는 바우배기는 유항검 일가가 1914년 전주 치명자산성지로 옮겨지기 전까지 묻혀 있었던 곳이다.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의 유해는 초남이성지 바우배기(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169-17) 성역화 작업 중 발견됐다. 올해 3월 11일의 일이었다. 연고가 없는 무덤 8기를 개장하는 과정에서 순교자로 추정되는 유해와 유물이 발견됐다. 5호 무덤과 3호 무덤에서 발견된 백자 사발 지석의 명문을 판독하면서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한 기록을 확인했다.

전주교구는 정밀조사에 들어갔다. 먼저 방사성탄소연대측정에서 무덤의 조성연대가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1791년에 부합했다. 백자 사발 지석도 윤지충과 권상연의 인적사항과 일치했다. 성별검사, 치아와 골화도를 통한 연령검사 및 해부학적 조사, Y염색체 부계 확인검사(Y-STR)에서도 결과는 같았다.

8호 무덤에서 발견된 유해는 윤지충과 유전정보가 일치했다. 역사 사료의 내용, 무덤의 조성연대, 출토물의 연대측정, 해부학적인 검사 결과, 유전정보 등을 종합한 결과, 윤지헌의 유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는 “하느님께서 놀라운 선물을 베푸셨다”며 “하느님의 섭리로 우리 교구는 그간 행방이 묘연했던 세 분의 순교 복자 유해를 찾았다”고 크게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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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지충 바오로의 백자 사발 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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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상연 야고보의 백사 사발 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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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백자 제기 접시. 전주교구 홍보국 제공



신앙의 소명을 일깨우다

김대건 신부는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에 윤지충을 ‘조선의 첫 번째 순교자’라고 명시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순교역사에서 단순히 순서만이 아니라 신앙의 모범과 공경의 첫 번째 대상이었다. 이번 발견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한국 교회 순교역사의 첫 자리를 장식했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한국 교회 역사 사료의 부족하고 모호한 부분을 밝혀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기도 하다. 윤지충과 권상연 묘에 대한 내용은 「사학징의」의 유관검 공초에 간략하게 묘사돼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을 통해서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무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 뿐,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이번 발견으로 「사학징의」의 내용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묘가 발견된 터는 유항검 소유의 땅으로 추정된다. 묘가 조성된 1792년 11월에는 유항검이 여전히 지역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신앙의 동료로서나 혈육으로도 마땅히 유항검이 이 자리에 첫 순교자들의 묘를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윤지충과 권상연, 윤지헌의 묘와 유해를 통해 유항검의 역할과 초남이 신앙공동체의 위상이 더 확연하게 드러났다.

문화사적 성과와 가치 측면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묘는 일반적인 묘와 다른 모습으로 확인됐다. 문화사적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묘의 형태가 존재하는데 이번 발견은 문화사적인 의미를 연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발견이다. 또한, 순교자들의 묘에서 나온 묘지석은 문화사적으로 묘지석의 형태, 묘지석에 기록하는 방식, 묘지석의 의미 등 묘지석에 대한 다양성을 제시하는 중요한 성과이자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의 흔적

윤지충과 권상연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두 순교자를 수습한 이장업체의 증언에 의하면, 두 순교자 모두 머리가 왼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장업체 관계자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어 따로 묻혔을 경우 가능할 수 있는 형태”라고 증언했다.

윤지충 유해 다섯째 목뼈의 왼쪽 부분에서 예기 손상(날카로운 칼과 같은 도구에 의해 오른 위쪽에서 왼 아래쪽으로 비스듬하게 절단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상소견)이 관찰됐다. 참수형의 분명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윤지헌은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다. 능지처참은 참수해 목을 벤 후 사지(양팔, 양다리)를 찢거나 잘라서 각지로 보내는 형벌이다. 이번에 발견된 윤지헌의 유해에서 예기 손상이 둘째 목뼈와 양쪽 위팔뼈, 왼쪽 넙다리뼈(대퇴골)에서 관찰됐다. 능지처참형의 증거다.

이는 또한 순교신앙에 대해 체험할 수 있는 의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형벌의 실제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도재진 기자 djj1213@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