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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3일 부활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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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08-12-26 00:00 조회2,8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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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부활성야 미사에서 우리는 제1독서를 통해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애초에 설계하시고 그대로 만들어내신 세상 만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세상 만물이 본래 가졌던 아름다움.
이것은 인간의 가슴 속에 지울 수 없는 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이 아무리 거기에서 멀어져 있어도 그 꿈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매일 체험하는 삶이 힘들고 세상의 모습이 일그러져 있으면 그럴수록 그 꿈은 더욱 분명한 모습으로 다가와, 때로는 열병처럼 인간을 앓게 만들곤 합니다. 동물은 먹고 마실 것만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하며 문제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꿈 때문에, 당장 먹고 살아가는 데에 큰 지장이 없어도 때로는 삶이 시들해지고 심하면 죽기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꿈이 필요없는 동물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직업은 그래서 무겁고 힘이 들지만 이 짐을 내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함께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반 세기를 살아오면서 국민적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희생을 치렀습니다.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는 그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이 어디에 가 닿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오래고도 혹독했던 가난은 한 때 보릿 고개라는 말 속에도 잘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지난 해 농사에서 거둔 양식은 떨어지고 올 해 농사는 아직 알곡을 내지 못하는 몇 달 동안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렸고 심지어 그 때문에 죽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는 먹을 것이 거의 절대적인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었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했고, 그 결과 세상이 놀랄 만큼 빠른 시간 안에 극도의 가난에서 벗어나 뚜렷한 경제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을 때, 우리에게 못지않게 중요한 꿈으로 등장한 것은 민주주의였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같은 꿈을 가지고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사람들의 부르짖음은 우리 가슴 속에서도 못지않게 절실한 요청으로 울려왔습니다. 그리고 이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습니다. 사회생활에 제약을 당하고, 직장을 잃고, 고문을 받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이 모든 희생은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이렇게 큰 희생을 치르고 이루어낸 세상, 그런 나라에서 지금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 희생을 기억하며, 우리는 이 나라, 이 사회를 좀 더 아름답고, 꿈이 한 발짝 더 가까이 실현된 모습, 서로 남을 생각하고 함께 잘 사는 공동체로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돈, 물질이 신처럼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어지고, 그 제단 앞에서는 어떤 것도 희생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일부 힘 있는 사람들의 행태에서 보자면, 자연은 당장의 이익을 위해 처참하게 파괴되고, 물질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투쟁은 숲속 야수의 그것보다 더 치열하며, 그 방법은 부끄러움을 잃은 것처럼 보입니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은 경쟁력이라는 말로 바뀌어 유치원 어린이들에서부터 대학생에 이르는 다음 세대의 정신에까지 깊이 침투해 들어가고 있으니, 기성세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남을 하나라도 더 딛고 일어서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이런 분위기는 최근 들어 그 기세가 점점 더해 가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우리나라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나라의 정책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책임이 가장 큽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 하나도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나라 살림을 떠맡아  이런 방향으로 이끈 이들은 바로 우리가 뽑아 세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정신적 가치를 가장 깊이 깨닫고 그것을 통해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종교 인구가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에서도 그만큼 많은 이들이 종교를 믿고 있는데, 그 믿음이 그들의 현실적 판단과 행동 방식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가 이 세상에서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그런 종교는 이미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도 착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은 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그러므로 교황님께서는 가톨릭 정치인과 국회의원 등 정책을 입안하고 수행하는 이들의 큰  책임을 일깨우십니다. “가톨릭 정치인과 국회의원은 그들의 막중한 사회적 책임감을 자각하여, 올바르게 형성된 양심으로, 인간의 본질적 가치들을 바탕으로 하는 법률을 도입하고 지지하여야 할 특별한 의무를 인식하여야 합니다.”(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사랑의 성사, 2007년, 83항) 따라서, 특히 이런 책무를 지닌 신자들은 “양심을 올바르게 형성하기 위해서” 교회의 “사회교리”를 세심하게 연구하고 숙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질을 신처럼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고, 경쟁력을 앞세워 모든 사람을 그 쪽으로 몰아가는 분위기 속에서는, 거기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을 포함하여, 아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름다운 세상, 참다운 행복은 그 쪽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생활에 꼭 요구되는 정도의 물질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필요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절대적 필요가 충족되고 나서부터는, 그런 기준에서 멀어질수록 물질에 대한 욕망은 정당성이 약해지다가, 어느 지점에 가서는 완전히 뜻을 잃고 맙니다. 사도 요한은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1요한 3,17).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도록”(사도 20,35) 당부하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
이것은 신앙인들에게뿐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 예외 없이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 그 참다운 행복의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행복은 자신만을 위해서 한 없이 소유하는 데에 있지 않고 남과 기꺼이 나누는 데에 있습니다. 남을 희생시키기보다 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데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루가 17,33), 사랑이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그런데  사랑은 하느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요한은 계속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6)
하느님은 인간이 가야 할 최종 목적지입니다. 거기에 도달한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이란 거기에 도달한 사람이 느끼는 정신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거기 밖에서는 행복으로 보이는 것들이 모두 신기루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이미 그 목표 지점에 도달해 있는 것이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죽어야 산다는 것은 인간이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 반대 방향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상식의 세계에서 헤어날 수 없는 절망 속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1고린 2,9)이 실제로 이루어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은 간단하지만 이후 인류의 의식을 바꾸었고, 인간역사 전체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서 성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침 일찍 무덤에 갔다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천사들의 전갈을 듣고) “여자들은 무서우면서도 기쁨에 넘쳐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무덤을 떠나 급히 달려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께서 그 여자들을 향하여 걸어 오셔서 ‘평안하냐?’하고 말씀하셨다”(마태 28,8-9).
그리고 그 엄청난 사건은 몇몇 여자들이나 사도들만 체험한 것이 아니고, 그 이후 2천 년의 역사를 거쳐 오는 동안 수십 억의 사람들이 같은 체험을 했으며, 오늘날 그분을 진정으로 믿는 이들이 하는 체험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 믿는 이들에게 바로 그 점을 일깨워 줍니다. “형제 여러분,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로마 6,3-4).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본래 설계하시고 실제로 만들어 주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이 세상을 거기에 좀 더 가까운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을 더욱 적극적으로, 더 큰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꿋꿋이 펼쳐나갈 수 있습니다. 바르지 못한 세력이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조금만 긴 눈으로 보면 그렇게 되지는 않음을 우리는 믿고 또 알고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요한 1, 5)때문입니다.
죽음을 뚫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 진리를 증명해 주셨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셨으며, 그렇게 해서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바탕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