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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도 교구장 사목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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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5-12-22 14:18 조회3,5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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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목교서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5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부터 2016년 11월 20일 그리스도왕 대축일까지를 ‘자비의 특별 성년’으로 선포하고, 그에 따른 칙서 ‘자비의 얼굴’을 반포하셨습니다.

따라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우리 신앙인들은 이 한 해를 특별 성년으로 지내면서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주님의 당부대로, 우리 자신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와 자비를 받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다른 이들을 같은 너그러움과 자비의 눈길로 바라보고 대함으로써 그들을 하느님의 자비에로 인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먼저 자기가 받은 무한한 자비를 깨닫고, 다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그 자비를 전할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자비의 얼굴’의 순서와 구조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순서와 정신을 깨닫기 위해서 제일 의미 있는 성서 대목 중의 하나는 마태오 복음 18장입니다. 이 대목을 깊이 묵상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이신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대목 중에서도 특히 23-35절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교황님의 칙서 ‘자비의 얼굴’의 구조와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아주 적절한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왕의 종들 가운데 하나가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는데 갚을 길이 없자 왕 앞에 엎드려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드리겠습니다” 하며 애걸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왕은 그를 ‘가엽게 여겨’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보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여기까지가 ‘자비의 얼굴’ 전반부에서 보여주는 내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칩니다.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주게” 하고 애원했지만,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둡니다. 다른 동료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치자, 왕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말합니다.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왕은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깁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오늘날의 하루 노동 임금을 10만 원으로 계산할 때, 백 데나리온은 1,000만 원에 해당합니다. 한 달란트가 약 5천 데나리온에 해당한다고 하니, 일만 달란트는 약 5조원이 되는 셈입니다. 한 개인이 갚기에는 전혀 불가능한 액수이지요. 이 비유에서 문제는 왕으로 상징되는 하느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라는 말로 표현되는 무한한 양의 빚, 곧 죄를 용서받은 종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과연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로마 8,12).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니, 그분께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다 받은 것인데 왜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것인 양 자랑합니까?(1고린 4,7).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하는 말도, 그리스어 원문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들의 빚을 탕감해주오니,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소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런 맥락에서 보면, 대단히 강한 의미를 띠고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 교서는 내가 받은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묵상하고(제1부),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가 이제 세상에 나가 그 자비를 증언하고 전달할 사명을 일깨우며(제2부), 끝으로 정의와 자비의 관계를 설명한 다음(제3부), 자비의 성모님께 우리 교회와 세상을 위해 전구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으로 끝마칩니다.

 

제1부 : 하느님의 자비와 나(1-9항)

 

 

제1부의 시작이자 이 문헌 전체의 서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 스도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성서 특히 신약 성서의 주요 대목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자비라는 용광로가 어떤 것인지를 감동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1부야말로, 우리 하나하나를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핵심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나이 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준비한 뒤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모세처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순간마다 홀로 산에 올라가 밤을 새우시며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셨던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목소리를 직접 대하는 마음으로, 이 부분을 한마디 한마디 읽으며 그 자비의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말라기의 예언이 지금 여기 내 안에서 이루어짐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으리라. 그는 자리를 잡고 앉아, 풀무질하여 은에서 쇠똥을 걸러내듯, 레위 후손을 깨끗하게 만들리라. 그리하면 레위 후손은 순금이나 순은처럼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게 되리라”(말라 3,2-3).

그렇게 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깨달으면, 소화 데레사와 함께 자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인류 역사상 가장 패역한 사람들이 저지른 죄를 혼자 다 지었다고 해도, 하느님을 만나면 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분께 달려가 그 품에 안길 것입니다. 제가 지었다는 죄를 다 합해도,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라는 용광로에 비하면, 그것은 작은 빗방울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는 잘 알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이와 똑같은 믿음과 신뢰를 가질 수 있 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으로부터 자비를 실 제로 체험한 복음서의 인물 가운데 어떤 사람의 자리에 자신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리고의 길가에 앉 아 있던 앞 못 보는 거지 바르티매오의 처지가 되어 예수 님께 간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 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르 10,48). 아니면, 그분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말조차 못하고, 온 존재가 간절한 기도로 바뀌었던 한 여인(요한 8,3-11)이 서있는 자리에 내가 서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이제는 입장을 바꾸어, 그 여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처지에 내가 서고, 그 여인이 서있는 자리에는 평소에 내 삶의 테두리 속으로 받아들이기가 불가능하거나 관심의 범위에서 완전히 젖혀두고 살아온 이들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이나 일가친척, 이웃, 직장 동료, 정치·사회적 노선에서 나와는 반대 입장에 있는 사람, 조직 폭력배 등 윤리적으로 모든 이들의 지탄을 받고 있는 사람을 거기 세우는 것입니다.

보편 교회로서는,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가정을 주제로 진행 중인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 가장 다루기 어렵고 사람들의 의견이 심하게 대립되어 있는 주제 중의 하나가, 이혼 후 재혼한 이들에게 영성체를 허용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작하여,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 않고 동거하는 이들, 거기에서 태어나는 어린이들, 또 동성애자들의 문제 등, 오늘날 우리나라에서까지 사회적 현실로 떠올라 있는 이런 일들을 두고, 교회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과거에는 이런 일들이 거의 없었거나, 있어도 쉬쉬하고 넘어가던 이런 일들이 수적으로 늘어나고 관련된 이들이 이제는 밖으로 나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도 없었고, 어떤 면에서는 도저 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세상의 풍조를 감안하면서, ‘자비의 얼굴’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론의 대가로서 현대 독일의 가장 저명한 신학자 가운데 한 분이며, 오랫동안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촉진 평의회’ 장관이었던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최근의 저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자애와 사랑의 혁명’에서 현 교황을 “계속 놀라게 하는 교황”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과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그 자리에 선출되던 첫 순간부터 파격적인 언행으로 사람들을 계속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황으로 선출된지 불과 4개월밖에 안되었을 때 그분은 오늘의 교회가 가장 난처하게 생각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인 동성애자들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2013년 7월 23일 브라질에서 있었던 세계 청년대회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이 동성애자들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을 때였습니다. “어떤 동성애자가 좋은 뜻을 가지고 하느님을 찾고 있다면, ...음... 내가 누구이기에 그를 판단하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대단한 뉴스거리가 되어 전 세계 언론 매체를 달구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6월 24일에는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인 이혼한 사람, 이혼 후 재혼한 사람들에 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베드로 대성당 광장에서 드린 주례 미사의 강론에서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 관해 언급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비정상적이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돕고,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지를 물어봐야 하고, 이를 통해 어린이가 부모 중 어느 한쪽의 인질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교황님은 이번의 시노드를 마감하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의 시노드는 교회가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교회이며, 용서를 간청하는 죄인들의 교회이지, 의인이나 성인들만의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자신이 얼마나 불쌍하고 죄 많은 처지인지를 느끼는 의인과 성인들의 교회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을 넓고 크게 열어, 죄인을 처단하기 위한 음모나 마음의 문을 닫아거는 태도를 극복하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를 지켜주고 확산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교의 새로움이 얼마나 놀라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지를 모든 이들에게 선포하고 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새롭고 놀라운 아름다움이 때로는 구태의연하거나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언어 속에 같혀 녹이 슬고 마는 일이 더러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한껏 또 두려움 없이 껴안으려 노력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인간적 계산도 뛰어넘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게 되는 것”(1티도 2,4)만을 바라십니다. 우리는 이 시노드를 하느님 자비의 특별 희년의 맥락에 배치시킴으로써 교회가 이 신비를 잘 실천하게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우리의 뜻은 참 하느님의 위대성을 한껏 드높이자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공로나, 심지어 우리가 이루어낸 일에 따라 우리를 대접하시지 않고, 당신 자비의 무한한 크기에 따라서만 우리를 대하시는(로마 3,21-30; 시편 130; 루카 11,47-54 참조)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는 말은 큰 아들이 당하는 계속되는 유혹(루카 15,25-31 참조)을 뛰어넘자는 것이고, 먼저 와서 일한 일꾼의 시기심(마태 20,1-16 참조)을 극복하자는 것입니다. 법이나 계명들이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법이나 계명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마르 2,27 참조)을 기억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참된 회개, 업적, 인간의 노력 등이 본래의 깊은 뜻을 지니게 됩니다. 그것들은 구원을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가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낼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내시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총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도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어 당신의 깨끗한 피로 구해주신(로마 5,6 참조) 그분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는 선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제 시노드를 끝낸다는 것은, 실제로, “함께 걸어가기”를 위해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이며, 각 교구, 각 공동체, 각 상황 속에 복음의 빛을 가져가고, 교회의 포옹과 하느님 자비의 지원을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자비의 얼굴’은 그 특유의 긴장과 혁명적 특성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제 2부 : 우리-교회는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10-23항)

 

 

우리 하나하나가 개인적으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용서를 받아 새사람으 로 변했다면, 이제 우리가 교회로서 하느님의 가장 대표적 특성인 이 자비를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들도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할 것인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제2부에서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2부를 시작하는 10항에서 교황님은 먼저, 자비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때, 지금까지 교회가 많이 부족하고 본질을 망각한 면이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오랫동안 자비의 길을 가리키고 그 길을 따라 실제로 살아가는 것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그동안 정의나 추상적 진리 혹은 원칙만을 앞세우고 거기에 머무르는 일이 많았던 점을 반성합니다. 정의는 물론 대단히 필요하지만, 그것은 자비로 건너가기 위한 출발점으로서만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와 용서를 틀림없이 받을 수 있다는 확신과 보증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의미도 보람도 없게 되어 마치 황량한 사막을 걷는 형국이 되고 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문헌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와 그 이후 역대 교황님들의 가르침을 돌아보며, 거기에서 자비가 한결같이 강조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공의회를 소집하신 요한 23세 교황님이 개막 연설에서 하신 말씀은 제1부에서 이미 횃불처럼 제시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아내(교회)는 엄격함이 아니라 자비라는 약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뒤를 이어 공의회를 완성으로 이끄신 바오로 6세의 말씀도 소개되었습니다. “우리 공의회의 신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옛 이야기가 우리 공의회의 정신을 이끌어 준 모범이자 규범이었습니다. 공의회는 현대인들에게 열정과 감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질병을 깨닫고 위로가 가득한 구원의 약을 가져다주었으며 불길한 징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신뢰의 메시지를 현대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인간, 온갖 나약함을 지닌 인간, 갖가지 요구를 지닌 인간에게 봉사하려는 것입니다(4항).

 

그리고 이제 제2부에서 소개되는 공의회 이후 교황들 가운데에서, 먼저 [자비로우신 하느님]이라는 회칙을 반포하신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 특히 현대가 자비를 잊어버린 시대라는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교회는 자비를 다시 일깨우고 사람들에게 선포하라는 소명을 자각해야 한다는 그분의 말씀을 되새깁니다(11항).

 

 

자비는 “복음의 뛰는 심장”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그것이 멈추면 교회는 이미 죽은 것이라는 점을 넌지시 표현하는 12항은 새로운 복음화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3항에서는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번 특별 성년의 좌우명을 밝힙니다. 이어서 순례(14항), 우리 주변에서 가장 그늘진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관심(15항), 메시아로서 세상에 공식적으로 등장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선언하신 대목(루카 4,18-19)을 들어,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상기시키면서, 그분을 따르는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일깨웁니다(16항).

그리고 이어서 희년의 사순시기를 합당하게 지낼 구체적 방법을 제시합니다. 특히 사순 제4주일을 앞둔 금요일과 토요일에 거행될 <주님께 드리는 24시간>과 그 기회에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체험할 것을 제안합니다(17항). 또 이 시기에 교황님께서 ‘자비의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하느님 자비에 관해 설명하고, 또 일부 사제들에게는 평소에 교황에게 유보되었던 죄를 사해 줄 권한을 위임하시겠다는 약속도 하십니다(18항).

제 3 부 : 정의와 자비의 관계 (20-21항)

 

 

‘자비’와 거기에 관해서 지금까지 묵상한 것들이 진지성을 유지하고 참된 구원의 메시지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정의와 자비의 관계를 정확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관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자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자칫 본래의 의도를 깡그리 망쳐놓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마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고,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몸을 내맡기는 태도를 정당화시켜 주는 것으로 착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독일의 양심적 신학자이며 나치에 저항하다가 순교한 본회퍼의 말대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총은 ‘하느님 아들의 피’라는 더할 수 없이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것은 공짜니 제멋대로 살라는 식의 싸구려 은총을 선전하는 이들의 속임수에 휘둘리게 됩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의 말씀대로, “가장 좋은 것이 썩으면 가장 고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Corruptio optimi pessima'(19항).

이런 오해는, 주로, ‘죄’와 ‘죄인’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죄는 미워하고 척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죄인은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 자비의 얼굴이신 주님에게서 우리가 배우고 또 받은 사명입니다. 그 과정에서 악은 어디까지나 악이며 죄는 어디까지나 죄일 뿐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죄나 악이 선으로 바뀔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죄악에 빠진 인간을 그 구렁텅이에서 건져내는 것이지, 죄악 자체를 선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6,19).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어떤 사람을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권한, 곧 교회의 문을 열고 닫을 권한을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같은 마태오 복음 18장에 보면, 주님께서 똑같은 권한을 공동체에도 주셨습니다.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 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리하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정하라’는 말씀대로, 모든 사실을 밝혀라.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8,15-18).

네 복음서 전체에 걸쳐서 ‘교회’라는 말이 나오는 곳은 마태오 복음 16장과 18장의 이 두 대목뿐입니다. 신앙인들의 모임도 하나의 공동체-교회로서 거기에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문제를 해결할 대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교회 공동체 생활의 대헌장이라 할 만한 지침을 발견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처음에는 단 둘이 만나서 충고하고, 그것이 통하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고, 그들의 말도 효과가 없으면 교회에 알리고, 그마저 듣지 않으면, 이제 그는 더 이상 교회의 ‘문’ 밖에 있는 처지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니, 교회가 그 사실을 선언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는 원칙도, 객관적 진리도, 기준도 없이 덮어놓고 ‘좋다’ 하고, 무슨 짓을 해도 ‘오냐, 오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와 오류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또 보태거나 빼지 말고, 그대로 선포해야 합니다. 정의는 확실히 해 두어야 합니다. 문제는 정의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고, 그것은 자비로 가기 위한 출발점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자비는 정의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말대로, ‘자비 없는 정의는 잔인하고, 정의 없는 자비는 모든 것을 망치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정의와 자비는 언제나 함께 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정의에만 머무르신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고, 단지 율법 준수만 요구하는 인간과 다름이 없는 존재가 되실 것입니다”(21항).

하지만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누구든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며 돌아올 때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 곧 무한히 용서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자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잘못한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시고, 이어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2-34)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정의와 자비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며,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써 정의를 완성하시고, 그분의 정의는 자비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그려주는 비유 가운데 하나를 우리는 마태오복음(20,1-16)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집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구하기 위해서 이른 아침에 나가서 만난 사람에게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농장으로 보냈습니다. 그는 아침 6시부터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뒤,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에도 계속 나가 사람들을 일터로 보낸 다음, 날이 저물어 품삯을 받을 때, 맨 나중에 온 사람도 처음 온 사람과 똑 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되자 주인에게 투덜거립니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대단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온 뒤에도, 마음속에서는 종의 정신에 매어 “종이나 다름없이 일하며”(루카 15,29)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큰 아들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것을 느낍니다.

이 큰 아들과 아침 6시부터 일했던 일꾼에게 하느님은 그저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으면 끝나는 상거래의 대상이거나, 주어진 일을 하고 품삯을 받으면 더 이상 남는 것이 없는 상대일 뿐이었습니다. 율법주의에 갇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런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이나, 늦게 와서도 일찍 일한 사람과 똑같이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 하느님이 한없는 자비 그 자체였습니다.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으로서 율법으로 말하면 누구보다 열정적인 바리사이파 사람”(필립 3,5 참조)이었던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부터,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깨닫고, 가치관이 완전히 뒤집어져서, 그때까지 유익했던 모든 것을 다 장해물로 생각했습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것입니다”(필립 3,8-9).

이제 하루 종일 일한 일꾼의 이야기로 돌아가, 주인의 말을 들어봅시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정의는 ‘상대방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의 것을 그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은 일꾼과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일을 시키고 난 뒤에 한 데나리온을 정확히 주었으니, 정의를 완전히 실천한 것입니다. 제일 늦게 온 사람은 1시간을 일했고, 가장 먼저 온 사람은 12시간을 일했으니,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오래 고생한 사람이 더 많은 품삯을 기대할 만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이 일반 사회나 국가생활에서는 상식에 속하는 일이고 정의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기업체의 사장이 아니라,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아니라, 한 가정의 아버지입니다.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버지의 집인 가정에서는 일어납니다. 일을 조금도 못했고, 오히려 앓아 누워있는 자식에게도 아버지나 어머니라면 건강해서 일을 잘하는 자식과 똑같거나 오히려 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일은 흔합니다. 일한 만큼이 아니라 그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을 주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의 심정이 자비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이십니다. 누구에게나 먹고살 만큼 주고 싶어하시는 분입니다. 그 아버지에 비하면, 이 세상의 아버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마태 23,9).

 

 

자비의 성년은 베드로 대성전을 비롯해서 로마 시내에 있는 여러 교황 대성전들의 성문을 연다는 상징적 동작으로 시작되어 그것을 닫는 것으로 마감될 것입니다. 이번 성년의 특징 중의 하나는 지금까지의 관례와는 달리 로마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교구들도 주교좌와 공동 주교좌 성당 및 교구장이 정하는 순례지의 성당 성문도 함께 열고 함께 닫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하여, 로마에까지 가지 않고도 모든 신앙인들이 자기 교구 안에서 로마의 성전 문을 통과하는 것과 똑 같은 대사와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회에 성문을 열고 거기를 통과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대표적인 성문은 예루살렘 도시를 둘러싸고 있던 성벽에 설치된 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순례는 먼길을 걸어 그 문을 향해 와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걸음걸이였습니다. 몇 날 며칠을 걸어간 끝에 마침내 저 멀리에 예루살렘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느낀 기쁨이 어떠했을지는 비슷한 체험을 한 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편 121편은 그 기쁨을 잘표현합니다. 그들은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도착한 듯한 기쁨과 설레이는 마음을 이렇게 나타냅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은 이미 서 있노라”(시편 121,1-2).

예루살렘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살고 있는 모든 마을과 도시는, 당시의 관례에 따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따라서 성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문 앞 광장은 주민들이 함께 모여 상거래, 정치적 모의, 재판, 외적을 물리치러 나가는 군대의 출정식 등 공동체의 모든 일들을 논의하고 실행하기도 하는 다목적 광장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루살렘의 성문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관심사가 논의되는 역할을 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후기 예언자들은 백성들이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하고 점점 그분에게서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그 도성을 버리실 날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전이 파괴되고 났을 때, 이제 사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몸소 “하늘을 쪼개고 내려오시어”(이사 63,19), 양떼를 이끌고 그 성문을 통과해 그들을 인도해 주시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언자들의 이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세례를 받으셨을 때 과연 하늘이 쪼개지고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하늘로 오르기 위한 사다리요 하늘의 문입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서 “여시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시면 열 자가 없는 분”(묵시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