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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국전주교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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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보국 운영자 작성일09-02-10 00:00 조회8,3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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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사목관할지역은 전라북도 전역이다. 교구주보는 정문호 발도로메오? 조화서 베드로?조윤호 요셉? 손선지베드로? 한제권 요셉? 이명서 베드로?정원지 베드로 성인이며, 축일은 9월 20일이다. 1931년 5월 10일 대구대목구 소속으로 전라남?북도를 아우르는 전라도 감목대리구(全羅道監牧代理區)로 설정되고, 동시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모두 전라북도에서 떠났다. 1934년 3월 8일 전라도 감목대리구를 전라남? 북도 감목대리구로 분리되었다. 1937년 4월 13일 전주지목구로 설정되면서 한국인 성직자들이 교구 사목?운영을 관장하는 한국 최초의 자치교구가 되었다. 1957년 1월 29일 전주대목구로 승격되고, 1962년 3월 10일 한국 교회에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됨에 따라 전구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광주 관구(管區) 관하에 속하게 되었다. 주교좌 본당은 중앙본당이다. 감목대리구때부터 교구장은 전동본당 사제관을 사용해 오다가 제 3대교구장 김현배 주교는 1957년 5월 21일 주교 서품식을 거행한 중앙본당을 주교좌 본당으로 정하였다.〔역대교구장〕1대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신부(1937.4.13~1941.11.21), 2대 주재용(朱在用,바오로)신부(1942.1.5~1946.1.15), 3대 김현배(金賢培, 발도로메오)주교(1947.7.7~1960.4. 30), 4대 한공렬(韓珙烈 ,베드로)주교(1961. 1.3~1971.7.13), 5대 김재덕(金在德, 아우구스티노)주교(1973.2.10~1981.4.10), 6대 주교 박정일(朴正一,미카엘)주교(1982.6.24~1988.12.27),7대이병호(李炳浩,빈첸시오)주교(1990.2.20~현재).〔교세〕1883년 4,363명. 1900년 8,204명.1910년 11,720명. 1937년 19,300명. 1957년 30,499명. 1962년 40,883명.1972년 51,808명. 1990년 113,016명. 2002년 161,194명.

 

1. 천주교 수용과 박해

 

〔천주교 수용과 신앙공동체 형성〕전라도지방에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784년 겨울, 한국천주교회 창설 직후였다. 호남에서 최초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부락)에 살던 유항검(柳恒儉,,아우구스티노)과 그의 이종사촌으로 진산 장구동(현 충남 논산군 벌곡면 도산리 장고티) 출신인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이었다. 유항검은 진주 유씨 양반으로 호남의 대지주인데다가 덕망이 높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는 벼슬의 꿈을 접고 당시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지식인들처럼 서양의 신학문에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윤지충은 해남윤씨이며 윤선도의 6대 후손으로 정약전 형제들과는 고종사촌 사이여서 한국천주교 창설의 주역인 이승훈? 이벽과는 인척 사이었다. 윤지충은 1783년 봄, 정약전? 정약용 형제들과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780년을 전후하여 경기도 양근의 감호(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 사는 권철신과 그 제자들이 신학문인 천주교를 연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유항검은 권철신을 찾아가 그곳에서 천주교 서적과 성상(聖像)을 접하였다. 1784년 9월(음), 권일신은 서울 수표교 인근의 이벽 집에서 이벽과 함께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었다. 유항검은 권일신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므로 호남지방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었다. 유항검은 고향으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여 초남리는 호남지방 신앙공동체의 요람이 되었다. 그는 가족과 친척? 친지와 자기 집의 많은 노비들, 그리고 여러 지방에 산재해 있는 광활한 토지를 관리하는 마름, 작인(作人)들과 주민들을 입교시켰고, 전주?김제? 금구?영광 등에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윤지충의 입교는 고종사촌인 정약전의 영향이 컸다. 그는 1784년 겨울, 상경하여 갓 영세한 정약전에게서《천주실의》,《칠극》등의 책을 구해다가 3년을 깊이 공부하고 1787년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귀가하여 고종사촌 권상연(權尙然야고버, 1751~1791))에게 자신이 독서한 두 권의 책을 공부하게 하여 세례를 주었다. 윤지충은 어머니와 형제, 그리고 그의 명성을 듣고 고산, 무장, 무안, 홍주(現在 홍성) 등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1786년 가을 한국교회의 지도급 신도들은 교우들의 신앙 지도와 효율적인 선교활동을 위해 중국교회의 교계제도를 본떠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설정하였다. 이때 유항검은 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서적을 열심히 탐구하다가 가성직자들의 성사 집전이 독성죄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1787년 이승훈에게 성사 집전을 중단토록 촉구하였다. 그 후에도 가성직단은 얼마동안 지속되다가 해체되었다. 한국교회는 1789년 10월 처음으로 북경교회에 윤유일을 밀사로 파견하였다. 그는 다시 1790년 7월에 파견되어 10월에 귀국하면서 구베아 주교가 한국교회에 보내는 사목교서를 가져왔다. 그 교서에는 유교식 조상제사 금지령이 명시되어 있었다. 윤유일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유항검 ? 윤지충? 권상연은 신주를 폐기하였다. 당시 지식인 신도들은 한국교회 창설기부터 책을 통하여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교회의 교도권자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보유론적(補儒論的)입장에서 천주교교리를 인식하고 믿던 양반층 신도들은 교회를 떠나고, 유교문화의 가치관과 윤리관에서 탈피한 신도들만 남았다.

 

〔박해와 순교〕윤지충은 1791년 5월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8월에 장례를 치루며, 교회의 명령과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유교의 성직자인 양반들에게 신앙화 된 제사의례를 거부하였다. 조정은 윤지충과 그의 결정에 동조한 권상연의 행위를 조상제사가 상징하는 양반중심의 문화를 부정하고, 조선사회가 으뜸 가치로 존중하며 강조하던 효(孝)를 반대한 폐륜행위로 단정하여 극악무도한 윤리사범으로 처형하였다. 그들은 1791년 12월 8일(음 11월 13일) 오후 3시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터)에서 참수형을 받아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두 순교자들의 목은 사형판결문에 따라 장대 끝에 메달아 놓고 지나는 행인들이 볼 수 있도록 9일 동안 전시하였다.

1794년 북경주교는 조선 신도들의 요청에 따라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여 1795년 1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4월 5일 부활축일에 미사를 봉헌하였다. 조선 천주교 창설이래 처음 거행된 미사였다. 주 신부는 4월(음), 전라도를 방문하여 고산 저구리(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 이존창의 집과 전주 유항검의 집을 방문하여 각각 몇 일 동안 머물며 성사를 집전하였다. 1795년 5월 12일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체포되어 주 신부의 잠입을 주도하고, 숨겨준 죄목으로 처형된 을묘박해(乙卯迫害)가 일어났다. 주 신부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새로운 선교방법을 모색 하였다. 그는 중국의 경우처럼 서양 선교사가 서양의 힘을 상징하는 서양 큰 배를 타고 조선에 들어와 신앙의 자유를 성취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이 일을 북경주교가 서양에 요청하여 추진되도록 청원하고자 하였다. 1795년 8월 주 신부는 이른바 ‘서양 큰 배 청래운동’(大舶請來運動)의 추진을 유항검이 맡도록 당부하였다. 전라도 신앙공동체는 1796년 겨울 황심(黃沁, 토마스)을 천거하여 북경에 파견하고, 유항검 등이 은전 400냥을 경비로 내놓았다. ‘서양 큰 배 청래운동’은 1801년 신유박해 이전까지 꾸준히 계속되었고, 황심? 김유산? 옥천희 등이 밀사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북경주교의 거부로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1801년 1월 10일 김대왕대비는 박해령을 내리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하여 온 나라가 천주교도 색출검거에 나섰다. 1월부터 2월까지 서울? 경기? 충청지방의 유수한 신도들이 처형되고, 3월 12일(음) 주문모 신부의 자수하자 박해는 절정에 이르렀다. 3월부터 박해의 손길이 전라도에까지 미쳐 전주? 고산, 금구, 김제? 무장(고창)? 흥덕, 함평, 무안, 영광 등에서 200여명의 신도들이 체포되어 전주감영으로 끌려왔다. 이 박해로 전라도 신앙공동체는 초토화되었다.

맨 먼저 전라도의 사도 유항검이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3월 28일부터 유관검을 시작으로 문초가 시작되어 이우집(李宇集)을 심문하던 과정에서 유항검, 유관검(柳觀儉,),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 김유산(金有山) 등이 ‘서양 큰배 청래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한 사실이 밝혀져 서울로 압송되었다. 또한 이 사건과 무관한 한정흠(韓正欽,스다니슬라오),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 최여겸(崔汝謙, 마티아)도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형조와 의금부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각자의 고향으로 이송하여 처형하도록 하였다. 그 까닭은 이들의 죽음을 목격한 고향사람들이 천주교를 믿지 못하도록 경각심을 주기 위해 전시효과를 노린 것이다. 7월13일(양력 8.21) 의금부는 한정흠? 김천애? 최여겸에게 사형 판결문을 내려 각자의 고향으로 이송하여 처형토록 하였다. 그래서 한정흠)은 7월 18일 김제에서, 최여겸은 7월 19일 무장 개갑장터(현재 고창군 공음면 갑촌)에서, 김천애는 7월 20일(혹 19일) 전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801년 9월12일(양력 10.19) 의금부는 ‘서양 큰배 청래운동’을 ‘무력개교(武力開敎)의 음모로 판정하고 역적죄로 몰아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김유산 등을 전주로 이송하여 처형토록 하였다. 9월 17일(양력 10. 24) 전주 풍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터)에서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은 대역부도죄로 육시형(戮屍刑)으로, 이우집? 김유산은 불고지죄(不告知罪)로 참수형을 받았다. 그리고 유항검의 머리는 풍남문 누각에 메달아 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전시하였다. 9월 15일(양력 10. 22) 의금부의 명령에 따라 유항검의 나머지 가족이 연좌형으로 모두 전주 감옥에 갇혔고, 집은 헐어 없애고 연못을 파는 파가저택(破家?宅) 형이 내렸다. 10월 9일(양력 11.14) 3월부터 전주 옥에 갇혀있던 유항검의 큰 아들 유중철(柳重喆,혹 重哲, 요한, 1779~1801)과 둘째아들 유문석(柳文碩, 요한,1784~1801)은 전주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1801년 12월 28일(양력 1802. 1.31) 유항검의 처 신희(申喜), 유관검의 처 이육희(李六喜), 유관검의 아들 유중성(柳重誠,마태오),이순이(李順伊,루갈다)는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유중철과 이순이는 5년동안 부부동정생활을 하다가 순교하였는데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자들의 보석이라고 극찬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도들은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귀향을 갔다. 신유박해 때 전라도에서는 20명이 순교하고, 42명이 귀향을 갔으며, 그 중 유항검의 어린 자녀 3남매와 윤지헌의 처와 6남매는 연좌형(緣坐刑)으로 귀향갔다. 유항검을 비롯한 그의 가족 7인 순교자들은 현재 전주 치명자 산에 묻혀있다.

신유박해 후 전라도는 전국의 피난지가 되어 깊은 산곡마다 신도들이 숨어살았다. 1827년 정해박해의 불길은 곡성에서 시작되어 2월~4월 사이에 장성? 임실? 순창? 용담? 금산? 고산? 전주에서 240여명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이들 중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과거와 달리 끝까지 신앙을 지킨 신도들을 처형하지 배교하거나 병들어 죽을 때 까지 무한정 옥에 방치해 두었다. 부부동정 순교자 이순이의 동생 이경언(李景彦, 바오로)은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6월 27일(양) 옥중 병사하였다. 그리고 1832~35년 사이에 옥고를 치루던 4명이 병으로 옥사하였다.

1839(기해)년 조정에서는 4월부터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 색출에 나섰다. 전라도는 4월부터 8월까지 진산, 금산, 용담, 고산, 광주에서 1백여명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1839년 3차에 걸쳐 사형이 집행되었다. 1차로는 1827년부터서 13년간 옥살이를 하던 김대권(金大權, 베드로), 이태권(李太權, 혹 성화,베드로), 이일언(李日彦,冠名太文,욥),신태보(申太甫,베드로), 정태봉(鄭太奉, 冠名 만보, 바오로) 등 5명이 5월 29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제2차로는 10월 12일 신요한? 신 이냐시오 형제와 임베드로? 박춘화? 이독심이 매를 맞고 장사(杖死)하고, 송인원은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제 3차로는 6월 14일 광주에서 체포된 홍재영(洪梓榮,쁘로다시오), 이조이(막달레나), 최조이(바르바라), 오종례(吳宗禮, 야고버) 등은 11월 30일(양력 1840.1.4) 참수 치명하였다. 홍재영의 며느리 심조이(바르바라)는 두 살 된 아들과 함께 10월 6일(양력 11.11) 옥중 병사하고, 김조이(아나스타시아)와 13세 된 딸 이봉금(아나스타시아)은 10월 혹은 11월경 옥중 교살되었다. 이들 외에 이춘화(베드로)가 11월 나주(羅州) 옥에서 순교하고, 고산에서는 박 바르바라와 어린 세 자녀는 옥에서 화재가 일어나 불타 죽었다. 1866년 병인양요의 여파로 전라도에 천주교도 검거선풍이 일어나 전주와 여산, 나주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정문호(바르톨로메오),손선지(베드로),한재권(요셉),이명서(베드로, ),조화서(베드로), 정원지(베드로), 조윤호(요셉)등 일곱 성인(聖人)은 12월 5일 체포되어 그중 여섯 성인은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그리고 조윤호 성인은 12월 18일 전주 서천교 밑에서 장사(杖死) 순교하였다. 이들 일곱 성인 중 정문호? 손선지? 한재권? 이명서 등 네 분 성인은 현재 천호성지(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천호동)에 묻혀있다. 1867년 전주에서는 김사집(필립보) 등 10명이 순교하였는데 이때 남종삼 성인의 15세된 아들 남명희(南明熙)와 홍봉주의 아들(성명미상)은 전주 초록바위에서 전주천(川)으로 밀어 넣어 수장시켰다. 그리고 여산에서도 2명이 순교하였다.

1868년(무진년) 5월(양력) 독일 상인이며 국제도굴범인 오페르트(Oppert)가 충남 덕산군 가야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의 소행으로 대원군은 어느 때보다 더 혹심하게 박해하여 고산? 용담? 금산에서 체포된 신도들이 여산 진영으로 끌려와 갇혔다. 이들 중 23명이 10~11월경(음) 처형되었다. 그중 15명은 고산 넓은 바위(현재 전북 완주군 동상면 은천리) 공소 신도들인데, 6명은 김성첨(토마스, 62세)의 일가족이다. 순교자들은 대개 참수?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지만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몇 겹 발라 질식시켜 죽이는 ‘백지사형(白紙死刑)’도 집행되었다. 또한 1871년 신미양요 후 1872년 나주에서도 3명이 순교하였는데 정읍의 강영원(바오로)과 무장 암틔점(옹기점, 현재 전북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 교우촌의 유치성(안드레아), 장성의 유문보는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나주로 끌려가 옥에 갇혔다. 유문보는 옥사하고 유치성과 강영원은 백지사형으로 순교하였다.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9명의「실명 순교자」들은 병인년 순교성인 4명과 함께 천호성지에 묻혀있다.

 

2. 신앙의 자유 획득과 본당설정

〔전라도 신앙동체와 공소〕성직자가 없이 창설된 한국 천주교는 공소(公所)로 출발하였다. 공소는 한국교회의 모태이다. 1791년 12월 8일 진산의 윤지충이 처형된 후 그의 동생 윤지헌은 가문이 폐족되자 금정산맥의 대둔산을 넘어 궁벽한 산골인 고산 저구리(현재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로 이사하였다. 그 후 충청도 내포지방 사도인 이존창이 저구리로 이사해 오자 내포지방 신도들이 그를 따라와 교우촌을 이루었다. 또한 충청도 신도들이 저구리와 인접한 금산 개직이, 용담 등으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1795년 4월(음) 주문모 신부가 저구리 이존창 집을 방문하여 몇일 동안 머물며 성사를 집전할 때 참석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박해가 꺼끔해진 틈을 타서 전국에서 신도들이 전라도를 피난처로 삼아 모여들었다. 이들이 맨 먼저 찾아 온 곳은 고산(高山)지방이다. 이곳은 다른 도에서 전라도로 들어오는 통문인데 험난한 산악지대여서 숨어 살만 하여 신유박해 이후부터 교우촌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전라도에 교우촌이 가장 많이 형성된 시기는 1860년 전후였다. 특히 병인박해 후에는 충청도가 텅 비다 싶게 그곳 신도들이 전라도로 피신해 왔다. 교우촌들은 하나같이 두메산골이었다. 교우촌은 해가 거듭할 수 록 그 수를 더하였다. 신도들은 살곳을 찾아 떠도는 유민(流民)이어서 공소의 부침(浮沈)이 심하였다. 박해 때부터 1910년까지 전라도에는 500여개의 교우촌이 있었다. 이들 공소는 전라북도 전 지역에 산재되었는데 고부지방 6개, 고산지방 56개, 고창지방 6개, 금구? 구이? 봉남지방 23개, 용지? 백산지방 3개, 장수지방 45개, 부안지방 13개, 무장지방 1개, 순창지방 36개, 여산? 함열지방 9개, 용담지방 9개, 용안지방 12개, 익산지방 14개, 임실지방 12개, 임피지방 15개, 완주의 소양? 상관? 삼례? 구이 등 40개, 이리지방 3개, 정읍지방 26개, 진산?금산지방 16개, 진안지방 40개, 함열지방 11개, 흥덕지방 4개 등이었다. 신도들은 화전을 일구어 담배농사를 주업으로 삼았고, 옹기점도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다. 옹기점은 공생공존하던 신앙공동체에 가장 알맞은 생활수단이었으며, 여기에 종사하는 신도들은 거의가 무전(無田) 교우들이었다. 전라도 신앙공동체에는 1800년경부터 1900년대까지 30여개의 옹기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박해시기에 전라도를 담당했던 사제들은 주문모, 샤스탕, 다블리, 최양업, 리델 신부였으며, 병인박해를 끝으로 선교사들의 전라도 공소방문이 끊겼다. 그러다가 1877년 11월경 블랑(Blanc,白圭三) 신부가 전라도 지방 담당 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는 천호산(天壺山) 산에 있는 어름골(전북 완주군 비봉면 대치리) 공소에 정착하며 인접한 다리실(현재 천호성지가 있는 천호동의 옛 지명) 공소를 오가며 거주하였다. 당시 한국에는 1876년 5월10일 블랑 신부와 함께 입국한 드게트(Deguette, 崔東鎭) 신부와 1877년 9월 20일 리델(Redel. 李福明) 주교와 함께 입국한 두세(Doucet, 丁加彌)? 로베르(Robert, 金保祿)등 5명의 선교사가 있었다. 리델주교는 입국한지 4개월만에 체포되어 6월 4일 중국으로 추방되면서 블랑신부를 부주교로 임명하였다. 1879년 5월 15일 드게트 신부가 공주에서 체포되었다. 이 무렵 충청, 경기 지방 신도들이 수십명이 서울로 압송되어 포도청에 갇혔다가 순교하였다. 드게트 신부는 1879년 9월 7일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1879년 4월부터 두세 신부는 고산 빼재(秀峙)에 머물었다. 드게트 신부를 체포한 후 포도청에서는 블랑신부를 체포하도록 포교들을 전라도로 내려 보내어 고산지방을 수색하자 블랑신부와 두세 신부는 장수 큰골 뒷산 상여덤에 있는 굴속에 한동안 숨어 지냈다. 1882년 블랑 신부는 교구장 직무를 대행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1886년 6월 4일「조?불조약(朝?佛條約)」을 맺은 후 프랑스 선교사는 위상이 높아져 치외법권적인 보호를 받게 되고,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었다.

〔교세의 발전과 시련〕 전라도 교회는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컸지만 1885년부터 전라도 전담 선교사는 1명 뿐 이었다. 그래서 경상도 지방에서 선교하던 로베르 신부와 보두네 신부가 공소 판공을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1889년 봄 전주본당이 설립되어 보두네 신부가 임시 거처인 소양 대성동(현재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에 부임하고, 금구 배재본당(현재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이 설립되어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신부가 부임하였다. 1891년 보두네 신부는 전주로 진출하여 6월 23일 현재의 전동 성당 터에 정착하였다. 배재본당은 수류본당의 전신이다. 라크루(Lacrouts, 具瑪瑟)신부는 1895년 5월 6일 배재에 부임하였다가 1895년 10울 초 현재의 수류본당 터를 매입하여 이사하였다.

1891년에는 고산지역 본당이 설립되어 우도(Oudot,吳保祿) 신부가 차독배기(白石) 공소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893년 4월 22일 우도 신부의 후임으로 비에모(Villemot,禹一模) 신부가 부임하여 성당을 신축하고자 성당 터를 물색하다가 되재에 성당 신축 부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894년 1월부터 되재에 성당 신축공사를 시작하고, 되재(升峙)본당으로 명명하였다. 1897년에는 나바위(羅巖) 본당이 설립되었다. 나바위는 김대건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고 1845년 10월 12일 입국하며 첫 발을 디딘 곳이다. 또한 1900년에는 진안 어은동 본당이 설립되어 전북 부안 출신인 김양홍(金洋洪)신부가 부임하였다. 1903년에는 정읍 신성리 본당이 설립되어 김원영(金元永) 신부가, 1910년 함열 안대동 본당이 설립되어 서병익(徐丙翼) 신부가 부임하였다. 성당 건축은 맨 먼저 되재본당이 시작하였는데 1894년 1월 시작하여 거의 완공단계에 이르렀을 때 본당 신부가 동학농민전쟁으로 피신하므로 끝을 맺지 못하고, 피난에서 돌아와 1895년 여름에서야 완공되었다. 나바위 성당은 1906년에, 수류성당은 1907년에, 진안 어은동 성당은 1904년에, 정읍 신성리 성당은 1909년에 건축되고, 전주성당은 1908년에 신축공사를 시작하여 1914년에 완공을 보았다. 전주성당을 재외한 시골성당의 특징은 한국인의 정서와 환경친화적인 입장에서 주변 생활문화와 이질감을 주지 않기 위해 한국 가옥의 전통양식인 기와지붕의 한옥 집이었다. 그리고 성당 내부 중앙에는 한국풍습을 지켜 남녀석을 구분하는 칸막이가 있었다.

개항이후 전라도교회는 무수한 시련을 딛고 성장하였다. 동학농민전쟁의 진원지와 인접한 금구 배재에 거주하고 있던 죠조(Joze, 趙得夏)신부는 전라도교회가 처한 위급한 상황을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다가 일본군과 싸우다 패하여 도망치던 청군에게 잡혀 7월 29일 공주 장깃대 나루터에서 살해되었다. 전주본당의 보두네 신부와 고산 되재 본당의 비에모(Villemot, 禹一模) 신부는 7월 중순부터 되재 성불공소(현재 전북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 큰 바위 굴속에서 6주(週)를 숨어 지내다가 구사일생으로 전라도를 탈출하여 9월 6일 서울 주교관에 도착하였다. 동학농민전쟁으로 3개 공소가 완전 불타고, 많은 공소에서 신도들의 재산이 약탈당하거나 구타당하여 죽은 사람이 여럿이었다.

1886년 「조? 불조약」이후 천주교 교세가 확대되면서 1888년부터 1905년 사이에 천주교 측과 천주교에 적대감을 가진 지방관, 지방 관리, 지방 지배세력, 지방 주민들 간의 충돌로 20건의 ‘교안’(敎案)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1896년부터 1900년사이에는 선교사와 신도 세력이 월권을 행사하여 관(官)과 민인(民人)들에게 폐해를 끼친 ‘교폐(敎幣)’사건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진방군(軍)까지 진압에 나선「나바위 베르모렐(Vermorel) 신부의 강경포(江鏡浦) 사건」이다. 개신교와의 알력도 만만치 않았다. 전라도는 1893년부터 개신교의 선교활동이 왕성하였다. 1905년 수류본당 구역에서 네 차례나 천주교도와 개신교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수류본당 페네(Peynet, 裵嘉祿)신부가 발포(發砲)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1908년에는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자위단(自衛團)에 대해 비판적이던 전주본당 보두네 신부가 진안 주둔 일본군에게 폭행을 당하고, 진안 어은동 김양홍 신부가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교회는 한국사회의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괘념하지 않고 사회발전에 한 몫을 다 하였다. 전라도교회는 1889년부터 기초적인 국민교육을 위해 본당과 공소에 서당식 학교를 오지마을에까지 세워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1890년부터 전주본당 보두네 신부는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1891년 개교하기로 하고, 이 학교에서 가르칠 한문, 양문(洋文), 산법(算法), 격치(格致), 화학(畵學) 등 교고과목까지 정하였다. 그러나 학교설립기금과 운영비를 남에게 맡겼다가 횡령당하여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우리나라는 1905년부터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국민기본교육기관인 소학교를 세우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는데 전라도 교회는 본당마다 학교를 세우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1906년 되재본당은 「신성학교」(晨星學校)를 세웠고, 이 학교를 1908년에는 「태극계명」(太極啓明)학교로 개명하였다. 또한 1908년에는「태극계명 측량강습소」를 설립하였다. 나바위본당은 1908년「계명학교」를, 수류본당은 1909년「인명(仁明)학교」를, 진안 어은동 본당은「영신학교」를, 1932년에는 부안 등룡리 간이학교를, 1935년에는 등룡리본당을 부안읍으로 옮겨 부안본당을 설립하고 부안학교를 설립하였다. 1936년 한들본당은 해성학교를 세웠다. 이들 소학교는 수업 연한이 4년제였다. 교회는 교육사업 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기초로 한 사회복지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1884년경부터 1915년경까지 적게는 4명에서 많게는 43명의 고아들을 고아원 또는 신자 가정에 위탁하여 양육하였다. 교회는 무엇보다 구원사업에 열중하여 성의회, 매괴회,성모신심회, 전교회, 성가회, 예수성심회 영령회, 성체회 등 신심활동을 강조하였다.

1910년 전북지방에는 프랑스 신부 5명, 한국인 신부 2명등 7명의 본당신부가 사목하였다. 그리고 1882년 45개로 출발한 공소가 1910년에는 188개로 증가하고,1884년 4,363명이던 교우 수도 14,794명으로 증가하였다.

 

3. 일제 탄압과 교회조직의 발전

〔자치교구설정과 교회조직의 발전〕1911년 한국교회 조직에 큰 변화가 있었다. 1911년 6월 11일 교황 비오 11세는 조선대목구를 분활하여 남쪽에 대구대목구를 설정하고, 드망즈(Florianus Demange, 安世華) 대구대목구장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전라도 신앙공동체는 대구교구 소속이 되었다. 당시 전라북도 교세는 전주? 수류? 되재? 나바위? 정읍 신성리? 안대동? 진안 어은동 등 7개 본당과 169개 공소와, 교우 13,583명이었다.

일제치하 전라도 신앙공동체의 발전은 부진하였다. 가난한 신도들은 생활고에 시달려 생계를 찾아 떠도는 신도들이 많이 발생하였다. 신도들이 비신자 촌에 섞여 살며 수계생활이 어려웠고, 신앙생활이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것으로 흘렀다. 또한 제1차 세대전이 발발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이 본국으로부터 징집영장을 받고 귀국하는 사례가 빈번하여 사제의 수가 모자라 본당이 폐쇄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1914년 안대동 성당이 신부의 공석으로 폐쇄되어 나바위 본당에 합병되었다가 사제수급이 되고서 1938년에서야 복원되었다. 깊은 산골에 사는 신도들은 사제와 멀리 떨어져 성사를 자주 볼 수 없었다. 일제는 1915년 ‘포교규칙’을 공포하고 선교활동의 규제가 심하였다. 1921년 나바위 본당에서 충남 논산본당이 분리되고, 대전교구 논산본당이 1922년 서울교구로 편입되면서 전북 신도 1,115명(나바위 공소 836명. 되재공소 467명)이 감소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첫째 목적은 전교지방에 완전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부임한 후 신학교 교육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 한국인 사제를 양성하여 한국인 사제단이 주관하는 자립? 자치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드망즈 주교는 1914년 10월 대구에 성 유스티노신학교를 세웠다. 1919년 23일 제 2회 졸업생인 되재 성불공소 출신인 이약슬(이약슬,요셉)신부가 서품을 받았다. 1922년에는 되재출신 이종필(마티아) 신부, 1926년 석종관(바오로)? 김후상(바오로) 등 2명. 1929년 송남호(다두)? 김창현(바오로)? 허일록(다테오)? 김영구(베드로) 등 4명이 서품되고, 1930년에는 민정호(마르코)가 서품되었다. 1911년~ 1930년까지 전라북도에서는 8명의 사제가 서품되었는데 사제 수의 증가는 교세발전과 직결되었다. 어은동본당은 1921년 진안으로 본당을 이전 하고 다시 1922년에는 한들로 이전하였다. 1926년 장수 수분리, 부안 등룡리 등 2개 본당이 설립되고, 1927년에는 진안 한들본당, 1929년에는 태인 능교리본당, 진산 지방리 본당 등 2개 본당이 설립되었으나 지방리 본당은 1931년 5월 폐쇄되어 되재본당으로 환원되었고, 1931년 1월에는 군산 둔율동 본당이 설립되었다. 1935년 등룡리본당은 부안읍으로 옮기면서 폐쇄되고 부안본당이 설립되었다.

1931년 5월 10일 드망즈 주교는 전라도 감목대리구를 설정하고 김양홍 신부를 임명하여, 한국인 자치(자립)교구를 준비하기 위한 수련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전라도 신도 수는 18008명(전북, 16,210명. 전남, 1373명, 제주 425명) 본당 전북 11개(전주, 나바위, 되재, 장수 수분리, 진안, 수류, 태인 능다리, 정읍 신성리, 부안 등룡리, 군산, 진산 지방리), 전남 2개(목포, 나주) 제주 2개(제주읍, 흥노) 등 15개이며(2003. 11. 15, 이종흥 역, 《안세화주교 공문집》참조) 성당 또는 경당 36개, 공소 199개였다. 그러나 전라도 교회는 교구 운영의 재정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신부가 부족한데다가 전라남도는 섬과 오지가 많아 전교활동비가 엄청나게 필요하였다. 드망즈 주교는 전라남북도를 나누어 포교성성 소속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전라남도를 맡기기로 하였다.

1932년 김현배(발도로메오), 이기순(도미니코), 김선배(요한) 신부 등 3명이 서품되었다. 1935년에는 임인교(바오로), 정재석(요셉), 서정수(아릭스), 박문규(미카엘), 최민순(요한) 등 5명이 서품을 받았다. 그래서 1935년 금산, 이리, 남원, 김제 등 4개 본당이 설립되었다. 금산본당은 1963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금산군이 충청남도로 편입되어, 1980년 8월 대전교구로 이관되었다.

전라도 신앙공동체는 한국교회가 그렇듯이 공소에 의해 살아왔다. 1911년 대구교구에는 본당수가 18개였지만 공소는 392개였다. 드망즈 주교는 취임후 가장 강조한 역점 사업중 하나가 공소회장의 자질 향상이었다. 공소회장은 공소의 대표자, 책임자, 신도와 성직자 간의 중개자, 신품을 받지 않고 신부의 직분을 수행하는 자로서 신도들의 일상생활을 지도할 만큼 공소회장의 역할은 사제 못지않았다. 드망즈 주교는 회장의 직분을 강화하며, 그 임무에 관한 회칙으로서 회장직무를 활성화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해설해준 《회장직분》을 1913년 10월 14일 각 본당에 발송하였다. 또한 선교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남?녀전교회장 제도가 교회 조직 안에 정착되도록 유급전교회장 시행하였다. 그리고 공소 강당 신축을 장려하였다. 공소를 신축할 경우 방 두개가 딸린 강당이어야 한다고 공소강당 규모를 정해주었다. 장차 사제 수급이 원활해지면 신부가 정주(定住)하는 본당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1931년 9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으며 한국 주교들은 첫「전조선공의회」를 열고,「조선교회 공동지도서」를 간행하였다. 이 회에서는 평신도들이 교계제도의 사도직에 참여하도록 가톨릭 운동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 신도들의 조직 활동으로는 청년회, 평의회, 회장단, 천주교 협회, 회장피정회, 자모회(부인회), 소년회, 소녀회, 미사회, 경신회, 경애회(혹 仁愛會), 구역장회 등을 들 수 있다. 전주본당에서는 이미 1920년부터 청년회가 조직되었고, 1929년부터는 모든 본당에 조직되어 본당의 중추적인 기관으로 교회운영을 사실상 이끌어 왔다. 또한 평의회가 조직되어 본당 유지?운영에 관한 모든 중요사항을 결정하였다. 회장단은 본당회장단과 구역?공소회장들로 구성되어 본당 운영을 일선에서 맡아 왔다. 또한 각 공소회장과 각 단체 대표들의 연합체인「천주교협회」가 이미 1911년 수류본당에서 시작되어 1931년부터는 모든 본당으로 확대되었다.

전라북도 신앙공동체는 교구 설정을 앞두고 자신들의 힘으로 교회운영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이 높아졌다. 전라북도 신도들은 순교자의 가족? 후손 그리고 박해를 겪은 신도가족 또는 후손들이 대부분이며, 이들은 오래 동안 유민생활을 해왔다. 그래서 선교사들에게 전라북도 신앙공동체는 가난의 대명사였다. 1931년 감목대리구가 설정되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모두 떠나자 신도들은 가난한 본당과 교구살림을 책임져야 하였다. 그래서 신도들은 자신들의 매 끼니 양식에서 하느님 몫으로 쌀 한 주먹을 덜어 모았다가 본당에 바쳤다. 이른바 “줌도리 쌀” 모으기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1934년부터 「전조선 성교회법」에 따라 대구교구는 9월 9일 공문에 의해 교무금제도가 시작되었다. 교무금 제도가 생기기전에는 흔히 공소 판공 때 경비로 거출하는 ‘명하전’(名下錢)이라 부르는 공소전(公所錢)으로 유지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전라북도 사제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였다. “신도들에게 독립할 교구에 대한 중대한 책임을 이해시켜, 재정적 협력을 더 많이 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교무금의 5/10는 본당 운영비로, 2/10는 선교사들 수당으로, 3/10은 교구운영 분담금으로 사용하였다. 1934~1935년 전라북도 교무금은 10본당 17,726명이 5,780,26엔이었다.

1937년 4월 13일 드망즈 주교는 전주 감목대리구를 지목구로 설정하고 김양홍 신부를 지목구장에 임명하였다. 전주교구는 드망즈 주교의 계획대로 한국교구 중 최초의 자치교구로 출발하였다. 또한 같은 날 전남 감목대리구를 광주 지목구로 설정하고 맥폴린 신부를 지목구장에 임명하였다. 당시 전주교구의 교세는 한국인 사제 15명, 본당 14개, 교우 수 18737명, 공소 190개, 성당 36개, 경당, 44개, 전교회장 35명, 상주(常住)회장 201명, 신학생 5명, 전주 무료 진료소 1개 등이었다. 전주교구는 1938년 6월 22일「전주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감목대리구 시절부터 계획하여 오던 수녀원이 설립되었다. 1938년 설립된 해성학교에서 근무할 수녀와 본당 전교수녀를 청하여 1938년 10월 부임함으로써 샬트르 성 바오로회 분원이 설립되었다. 전주교구는 교회에 필요한 모든 조직을 갖추었다.

〔일제하 시련과 교구장의 사표〕일제하 한국교회의 제도권은 정교분리원칙, 정치불간섭주의, 선교우선주의를 선교방침으로 내세워 민족 독립의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단정하고 신도들의 민족운동을 단죄하였다. 교회를 지킨다는 이유로 일제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천황숭배신앙의 표현인 신사참배를 정책적으로 강요하였다. 뮈텔주교는 1922년 9월 21일《서울교구지도서》를 통하여 신사참배는 미신행위이므로 참배할 수 없다고 공포하였다. 1924년 10월 11일 강경공립보통학교 학생들중 나바위본당과 논산본당 천주교신도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거나, 아예 결석하였다. 그래서 교장은 20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 학생들을 퇴학 처분하였다. 총독부는 나바위 본당 카닥스(Cadars, 姜達淳 )신부와 논산본당 공베르(J.Gombert, 孔安世)의 항의를 받고 신사참배는 종교적인 의미가 없는 시민적인 의식이라고 변명하였다. 천주교는 1925년 6월《천주교 요리, 일명 대문답》을 간행하며 2권 45쪽에서 신사참배는 미신행위이므로 금한다고 규정하였다. 1925년 10월 15일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1926년 나바위 본당 계명학교는 폐교하고 말았다. 동양 선교에서 공자숭배, 조상숭배, 황제숭배의 제사의식인 신사참배등이 걸림돌이었다. 주일교황대사 마렐라 대주교는 1935년 이 문제를 교황청에 질문한 결과 포교성성장관 비온디 추기경의 이름으로 답장을 보냈다. 1935년 교황 비오 11세는 이들 제사의식은 종교의식이 아닌 국민의례와 관습으로 인식하고 허락하였고, 주일 교황대사 마렐라 대주교는 8월 10일 지기 관할 주교들에게 통보하고, 드망즈 주교는 9월 27일 공문 제112호로 모든 신부들에게 통보하며, 천주교 신자는 충실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안세화 주교 공문집》,452~455쪽 참조 참조). 한국교회는 1936년 4월《경향잡지》를 통하여, 그리고 포교성성은 1936년 5월 26일「조국에 대한 신자의 본분」이라는 지침을 통하여 신사참배를 허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주교구 신앙공동체의 민족의식은 달랐다. 1934년 드망즈 주교는 한국인 신부들이 갖고 있는 민족주의 사상을 염려하였던 대로였다. 전주본당에서는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에 저항하여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한글보급운동에 앞장섰고, 1935년 서정수 신부는 조선어학회에서 간행한《한글》잡지 보급에 힘썼다. 1941년 초여름 나바위 본당 김영호(金永浩, 멜키올)신부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교회에는 성체 감실을 철거하고 가미다나(神朋)를 설치하도록 강요하였으나 거부하고, 강론시간에 일제의 패망을 공공연하게 말하였다. 김영호 신부와 나바위 본당 청년들이 연행되어 몇 달 동안 옥고를 치루고, 김영호 신부는 해방이 되고서야 석방되었다. 1941년 초겨울에는 전주교구장 김양홍 신부와 부주교 등 6명의 신부와 주교 복사가 연행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1940년에는 교구장 이하 모든 신부들이 창씨개명을 할 수밖에 없는 치욕을 겪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학교를 황국신민 양성소로 만들고자 단말마적인 발악을 본당에서 경영하던 학교들은 폐쇄되거나 징발되었다.그 중 대표적인 예가 전주본당의 해성국민학교(海星國民學校)이다. 이 학교는 1938년 5 월 ‘조선교육령’에 따라 해성심상소학교(海星尋常小學校)로 인가되었는었다가 1941년 해성국민학교로 바뀌었다. 그러나 1945년 5월 22일 ‘전시교육령’이 반포되면서 강제 폐교되고 ‘저금관리소’로 징발되었다.

가난한 교우들과 한국인 사제들로 구성된 전주교구는 드망즈 주교가 우려했던대로 재정난에 부딫혔다. 게다가 일제의 교회에 대한 사찰이 심하여 고해소까지 들어와서 감시하는 등 갈수록 탄압이 심하였다. 전주교구장 김양홍 신부는 70의 고령인데다가 교구의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에 자신의 행정능력으로는 교구를 유지할수 없다고 판단하여 1941년 11월 21일 교구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리하여 1942년 1월 5일 제 2대 교구장에 주재용(朱在用) 신부가 임명되었다.

 

4. 전주교구와 현대사회

〔대목구 설정과 교회재건〕전주교구는 해방을 맞아 역사적 과제인 한국역사교육과 한글보급운동에 나섰다. 역사가인 전주교구장 주재용 신부는 역사 강의를 요청하는 본당을 다니며 신도, 일반인, 교사(敎師), 면(面) 건국위원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자 청중들이 몰려왔다. 전동본당 청년회에서는 본당 소유인 전주 해성초등학교 강당에서 초? 중등학교, 도청 학무과 직원을 대상으로 한국역사와 한글 강습회를 열어 대성황을 이루었다.《뜻글과 쓰임》이라는 한글 교재를 만들어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고, 1945년 11월 조선어학회에서《한글 첫걸음》을 펴내자 청년회에서 직접 서울에서 날라다가 공급하였다. 1946년 1월 7일 대구교구장 일본인 하야사카 주교가 사망하고 그 후임에 전주교구장 주재용 신부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1월 22일 전주교구 출신인 김현배 신부가 서리에 임명되고, 1947년 7월 7일 제 3대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교구의 재정난으로 1939년부터 중단되었던 신학생양성이 1945년부터 재개되었다. 1947년 전주에 비석거리 본당(중앙본당 전신)이 신설되고, 전주본당은 전동본당으로 명칭을 바꿨다. 전동본당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해성국민학교를 폐교하고, 여중학교 설립 기금을 모아 교구에 전달하였다. 교구당국은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1946년 8월 1일 성심여학원을 설립하고 이를 발전시켜, 1948년 7월29일 성심여자중학교 설립 인가받고9월 26일 개교하였다. 1952년 4월 13일 성심여자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4월 30일 개교하였다. 1948년 3월에는 전주본당에 성심유치원이 설립되었다.1949년 5월 1일「전주성모병원」을 개원하였다. 그리고 1951년 나바위본당에 진료소를 설립하였다가 1971년 폐쇄되었다.

한국천주교회의 대표적 신심인 순교자현양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신유박해 때 유항검과 그의 가족이 순교한 후 폐족되어 노복들과 친지들이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 고향에서 1km 가량 떨어진 김제군 용지면 제남리 바우백이에 가매장하였다. 1914년 그 땅 소유주의 요청으로 유항검 가족 묘를 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전주본당 보두네 신부와 회장단은 사순절 때 파묘하여 4월 19일 오늘의 치명자 산 정상에 안장하였다. 1949년 7월 17일 전동성당 자모회가 주축이 되어 14척 높이의 십자가를 세웠다. 그 보다 앞서 되재본당은 1939년 기해박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천호성지에 묻혀있는 순교자들의 무덤 앞에 대리석 십자가 비를 세우고 축복식을 가졌다. 1949년 9월에는 평신도의 신앙 재무장과 평신도사도직의 조직적 활동을 활성화하기 하기 위해 18개 본당의 대의원들이 모여「가톨릭연맹」을 조직하고 평신도 역할과 사명을 다짐하였다. 군산본당에서는 가톨릭연맹, 청년회, 성모성심회 등이 신자배가운동을 벌려 영세예비자 180명을 인도하였다.《경향잡지》1950년 2월호「사설」에서 한국교회사상초유의 일이라고 극찬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8월 4일 교구장 김현배, 이약슬, 김영구, 김재덕, 김종택 신부와 이대권 부제등 6명이 전주 교도소에 갇혔고, 성직자들은 신부들을 보호해 줄 믿을 만한 산골 교우촌으로 피신하였다. 교도소에 갇혀있던 교구장등 6명은 9월 27일 사지(死地)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9월 20일 전주에 도착하여 머물고 있던 광주교구 신학생 전기수(全基洙, 그레고리오, 나주본당)와 고광규(高光奎 ,베드로, 목포 산정동본당)는 26일 정치보위부에 끌려가서 무참히 살해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전주교구에서는 1950년 7월~1952년 4월 사이에 70명이 희생되었는데 이들은 현대순교자 215명 명단에 들었다. 성당과 공소가 전화(戰火)되거나 파괴되었다. 수류성당은 인민군에 의해, 고산 석장리 공소는 빨치산에 의해 전소되고, 되재성당과 고산 차독백이 공소와 순창 오룡촌 공소는 아군에 의해 전소되었다. 또한 전동성당은 전라북도 인민위원회? 차량정비소? 보급창고로 사용하여 성당 외벽만 남고 내부는 거의 파괴되었다.. 전주교구는 1954~59년까지전쟁으로 소실되거나 파괴된 성당을 재건하였다.

1957년 1월 21일 전주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고, 1월 26일 김현배 신부를 주교로 임명하였다. 김현배 주교는 1957년 5월 21일 중앙성당에서 서품식을 갖고 그 성당을「주교좌 본당」으로 정하였다. 김 주교의 첫째 사목 목표는 1군(郡) 1본당 설립이었다. 1954년 전주교구의 본당은 전동? 남원? 나바위? 삼례? 김제? 안대동(함열)?이리? 금산? 군산? 부안? 진안? 태인? 전주 대동 등 13개였다. 1889년부터 시작한 수류본당은 성당 소실로 김제본당 관할 공소가 되고, 장수 수분리본당 역시 신부의 공석으로 남원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55년 장계본당이 신설되고, 정읍본당이 복원되고, 1956년 임실본당과 대야본당 등 2개가 신설되어 17개 본당이 되었다. 1957년에는 무주본당 신설, 1958년 고산본당 복원, 1959년 여산본당 신설 등으로 20개가 되었다. 1960년 3월에는 황등, 순창, 고창에 본당을 신설하여 ‘1군 1본당’ 계획을 성취하여 24개 본당을 갖게되었다. 1950~1960년대는 신축 붐이 일어났다. 각 본당으로 구호물자가 나오자 신도들은 어차피 자신들 힘으로 성당을 지을 것이므로 구호물자 일부를 매각하여 성당 건립에 사용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1955년 삼례, 이리, 김제, 군산 둔율동 등 4개, 1956년 진안, 1957년 중앙, 금산, 정읍, 무주 등 4개, 1958년 고산, 남원, 여산, 장계 등 4개, 1959년 임실, 함열, 수류, 신태인 등 4개, 1960년 황등, 부안, 순창 등 3개 도합 20개의 성당들이 건축되었다. 그리고 전주교구청이 1960년 6월 21일 신축되었다. 그러나 한공렬 주교가 1966년 2월 25일 서울교구 소속 인보성체수도회를 전주교구가 인수하면서 주교관 건물을 수녀원에 넘겨주고, 1970년 3월 1일 가톨릭 센타를 증축하여 10월 30일 완공해서 입주하였다. 1975년 11월 1일에는 가톨릭 센타와 연계하여 교구청을 신축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외국 선교회? 수도회? 사도직 단체, 각종 신심단체들의 한국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55년 5월 5일「레지오 마리에」가 도입되고, 1960년 1월 19일 재속프란치스코회가 도입되고, 1969년 1월 꾸르실료운동이 도입되었다. 1962년 6월 10일「가톨릭노동청년회」가 설립되고, 1964년 10월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설립되었다. 1961년에는「국제농촌지역사회개발협조처. CIRD」가 진출하여 전주성모병원과 고창, 함열, 김제, 삼례 등에 있는 나환우촌을 순회하며 진료 활동을 하였다. 1959년 12월에는「전교협조회.S?A?M」가 진출하여 전주교구 소속신부가 되어 교구의 힘이 미치지 못했던 분야의 사목을 도왔다. 1950? 60년대 한국교회의 특성은 교회운영과 모든 사업이 외국의 원조에 철저히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전주교구는 외국의 원조를 받아 병원을 설립하였으니 운영난으로 폐쇄되었는데 진안 성모의원이 1959년 3월 20일 개원하였다가 1977년 폐쇄되고, 장계 성모병원은 1959년 12월 15일 개원하였다가 1990년 말 폐쇄되었고, 전주성모병원은 1981년 7월 31일 폐쇄되었다. 그리고 가톨릭여학생관이 1965년 3월 설립되었다가 1983년 2월 28일 폐관하였다. 1960년 2월 19일 숲정이 순교 터에 성심여자 중?고등학교와 남매격인 해성중학교가 설립되고, 해성고등학교는 1962년 12월 31일 인가를 받아 1963년 3월 9일 개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교구의 쇄신과 발전〕1960년 4월 30일 김현배 주교가 서거하고, 1961년 2월 13일 제 4대교구장에 한공렬(韓珙烈, 베드로)주교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1962년 3월 10일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설립되어 전주교구도 정식 주교구가 되었다. 1962년 10월부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려 교회개혁을 시작하였다. 1964년 7월 15일 한국교회는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 라틴어로 바쳐오던 미사와 전례를 한국말로 바칠 뿐 아니라 교회의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교회운영의 민주화가 시작되어 평신도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교구와 본당 사목과 재정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교구는 사목기구가 성직자 중심의 조직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참여를 강력하게 권장하였다. 1966년 8월 전국에서 최초로 “본당운영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10월 6일 「사도회」로 개칭하였다. 1986년 1월 12일 사도회를 1983년 반포된 새로운 교회법에 따라「사목협의회」로 체제를 개편하였다. 1971년 7월 14일 한공렬 주교는 대주교로 승격됨과 동시에 제 6대 광주 대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73년 2월 10일 김재덕 신부를 주교로 임명함과 동시에 제 5대교구장으로 발령하였다. 이때 교세는 31개 본당, 교우수 51,808명으로 교구설정 당시보다 3배로 성장하여 있었다.

전주교구의 1970년대는 평신도 활동이 가장 활성화된 시기였다.《교회에 관한 교의헌장》과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을 바탕으로 하여 평신도 사도직을 강조하여 평신도들이 교회 운영과 사목에 관여하였다. 또한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투쟁의 시대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의 1차적인 근거가 된 교리는《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이었다. 전주교구는 교구장을 구심점으로 모든 사제단이 일치하여 교회의 예언자직 사명에 모든 힘을 기울여 반독재? 민주화? 사회정의 구현운동에 앞장섰다. 1976년 문정현 신부가 3?1절 명동기도회 사건으로 8월 1일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1978년 12월 31일 삭방되었다가 1979년 7월 26일 재수감되었다. 1978년 7월 6일에는 경찰이 박종상 신부를 구타하고 유기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1979년 9월 11일 박정희 정권은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를 구속하기로 결정하는 사태에 까지 갔다가 철회하였다. 1980년 5. 18 광주민중항쟁이 발생하자 5월 23일 교구 정평위원회는 긴급 회의를 소집하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광주시미의 학살만행을 알리는 유인물을 보내고, 모든 도민에게 광주학살만행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폭로하였다. 전주교구는 1970년대 상관, 숲정이, 용안, 장수, 원평, 효자동, 오룡동, 금마 등 7개 본당이 신설하여 39개 본당에 이르렀다.

〔교구의 성장과 변모〕1980년 4월 1일 김재덕 주교가 사임하고, 1982년 6월 24일 박정일 주교가 제 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교회는 200주년을 맞으며 1984년 5월 6일 103위 시성식을 갖게 되었는데 전주교구는 7위 성인의 시성식을 앞두고 1983년 5월 천호성지에서 12분 순교자 유해발굴 작업을 가졌다. 이 때 유해의 행방을 모르던 정문호(바르톨르메오)? 한재권(요셉) 두 순교성인의 유해를 찾았다. 박정일 주교는 교황청 견진성사성의 허락을 받아 1984년 5월에 시성된 일곱 분 복자들 즉,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이명서? 조화서? 조윤호? 정원지등 일곱 분을 교구 수호자로, 9월 26일을 수호자축일로 정하고 1983년 9월 7일 선포하였다. 박정일 주교는 200주년을 맞으며 한국최초의 자치교구인 전주교구가 한국교회의 맏형답게 세계교회에 이바지하는 교회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1957년 비오 12세 교황이 발표한「피데이 도눔」(Fidei donum)의 정신을 계승한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에 따라 사제가 부족한 나라에 선교사를 파견키로 하고, 1984년 11월 3명의 사제를 페루에 파견하였다. 이에 앞서 1980년 1월 5일 이수현 신부가 독인 마인츠 한인교회에 교포사목을 떠났다. 교구설정 이래 처음있는 일이다. 이어서 1983년 8월 24일 필립핀 한인천주교회에 교포사목을 파견하였다.

1980년대는 순교자 현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84년 한국교회 창설 200주년 행사에 이어 1987년은 자치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으며 순교자 교구답게 순교정신현양사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87년 8월 30일 교구설정 50주년을 맞아 순교정신의 생활화를 위한 교육장으로 천호성지에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다. 또한 전주교구 순교신앙의 꽃인 부부동정 순교자 유 요한? 이 루갈다와 그 가족이 묻힌 치명자산 개발을 7월부터 준비하고, 1988년 3월 5일 기공식을 가졌다. 전주교구 설정 50주년을 마무리하며 교구의 숙원인 한국초대교회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1987년 12월 4일 시복 준비위원회를 결성, 1988년 1월 9일 모임에서 시복추진 대상자를 1차적으로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권상연, 호남의 사도 유항검, 부부동정순교자 유 요한과 이 루갈다 등 5명을 선발하였다. 시복 시성위원회는「5인 순교자 시복시성청원서」를 작성하고, 1989년 2월 13일 박정일 주교는 마산교구장으로 전임되기 전인 2월 10일 청원서를 교황청에 발송, 1989년 4월 2일 교항청 시성장관으로부터 시복 시성 청원을 해도 좋다는「5인순교자 시복시성 청원에 대한 교황청 회신」이 왔다. 1980년대 전주교구는 전주? 익산? 군산? 남원? 김제? 정읍 등 5개 시(市)를 중심으로 본당 신설을 중점 사업으로 하여 18개 본당이 설정되었다. 전주교구는 재단 부동산을 정리하여 신설본당 부지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80년대는 교회의 신앙유산들이 사적(史蹟)?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전동성당은 사적 제288호(1981.9.28), 나바위 성당 사적 318호(1987.7.25), 숲정이 천주교 순교성지 지방기념물 제71호(1984. 9.20), 치명자산 천주교 고묘(古墓) 지방기념물 제69호(1984.9.20) 등이다. 정의구현 활동은 중단이 없었다. 의식화운동의 장(場)인 전동성당이 1988년 10월 10일에, 오룡동성당은 1989년 1월 5일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였다. 문규현신부는 1989년 7월 25일 방북하여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하여 귀환하다가 체포되어8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정의구현과 자선활동은 사회복지를 향한 두 발(足)이다. 전주교구의 사회복지 기관중 구라사업 기관으로 함열 상지원이 1950년 3월 25일에, 고창 동혜원이 1952년에, 김제 신암 농원이 1961년 12월 31일에, 익산 농장이 1974년 4월 4일에 설립되었다. 나환우를 돕는 의료기관으로는 익산 성모병원이 1972년 6월 1일에 설립되었다. 장애인 복지시설로는 1984년 7월 20일 무지개 가족이, 1985년 4월 16일 작은 자매의 집이 설립되었다. 노인복지시설로는 1979년 7월 26일 성언 복지원이, 1988년 9울 15일에는 영보 은혜의 집이, 1991년에는 인보 노인종합복지곤이, 1996년에는 성모 노인 돌봄 집이, 1996년 11월 2일에는 야고바의 집이, 1997년 9월 1일에는 성 요셉 동산 양노원이 설립되었다. 노동 복지관으로는 1983년 1월 1일 성요셉 익산 노동자의 집이, 1986년 4월에는 성 요셉 군산 노동자의 집이 설립되었다. 사회복지후원회로는 1986년 6월 사라의 다리가 설립되었다.

1988년 12월 28일 박정일 주교는 마산교구장으로 전보 발령되어 1989년 2월 13일 교구를 떠났다 그리고 1990년 2월 20일 이병호 신부가 제 7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하였다. 전주교구는 1990년대부터 교구의 내실을 기하는데 힘썼다. 전주교구 사제단은 1990년 7월 사제총회에서 교구 운영 전반에 걸쳐 평신들의 전문적이고 폭넓은 자문을 수렴하고, 교구 제반 행정을 공개하여 민주적으로 교구 행정을 운영키로 결의하였다. 1994년에는 교구내 각 본당 사무 전산화 통일 방안을 마련키 위해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1995년에는 교구행정체제를 정비하여 직제를 개편하였다. 1995년 7월에는 직원 인사법규를 제정공포 하였다. 또한 신설 본당 보조규정을 정하고, 1996년부터 실시하여 각 본당에서 ‘본당 설립 기금’을 분담하였다. 1997년 교구설정 60주년을 마무리하며 교리교육과 성서교육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교육하여 교구민의 자질 향상시키고, 선교활동의 전위대로 일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997년 12월 1일 「전주 가톨릭 신학원」을 설립하였다. 전주교구는 1964년《천주교 호남발전사》을 간행하였으나 이 책을 보충할 새로운 역사서가 필요하였는데 교구설정 60주년을 맞아 1998년 7월 30일《전주교구사》Ⅰ권(1,318쪽),《전주교구사》Ⅱ권(1,757쪽)의 방대한 교구사를 간행하였다. 이병호 주교는 선교는 교회의 본질이라는 의식에서 1997년 8월 18일 교구 내에 일종의 개척교회인「선교본당」제도를 도입하여 익산 팔봉, 오수,만경, 줄포 등에 선교본당을 신설하였다. 한국교회는 2000년 대희년에 이어 2001년은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아 행사가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