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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58호(가을)-신앙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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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7-09-12 11:38 조회2,0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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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위대한 자아는
 나를 통해 살기를 원한다.”

 

 

오래 전에 타계했지만 아직도 우리 가운데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들은 오래 전에 이미 사라졌지만 아직도 빛을 비추어 주는 별과 같다.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가 오페라 테너 가수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1873-1921)이다.
엔리코 카루소는 나폴리의 어느 가난한 가정에서 스물한 명의 자녀 가운데 열여덟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기계공이었고, 어머니는 세탁부였다. 카루소는 일생 동안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고, 글을 제대로 쓸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64개의 오페라 악보를 암기했고, 6개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의 목소리는 깨끗했고,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놀랍게도 매끄럽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가장 좋아하는 배역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끊임없는 노력의 결실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지독히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그가 음악계에서 크나큰 성공을 거둘 때까지 걸어야 했던 여정은 길고도 힘겨운 여정이었다. 그것은 ‘작은 자아’에서 ‘위대한 자아’에 이르는 여정이었으며, 그 여정에는 아무것도 거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전혀 자기 방식대로 노래하지 않고 악보에 충실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카루소는 고향 나폴리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후에는 밀라노와 런던, 1904년에는 미국에까지 건너가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의 나이 34세가 되었을 때에 그는 유럽과 미국의 거의 모든 유명한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빈, 뮌헨, 베를린, 파리, 런던, 뉴욕, 멕시코 등에서도 그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그는 음악회 때마다 출연료로 약 일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러한 부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겸손했다. 또한 공연이 끝나고 휴식을 취할 때면 귀족적인 분위기의 호화로운 살롱이 아니라 친구들과 싸구려 스파게티 식당에 가서 여가를 즐겼다.
1920년 12월 11일, 그는 47세의 나이에 뉴욕의 무대에서 각혈로 쓰러졌다. 그럼에도 그는 노래를 계속 불렀다. 조금 나아진 후에 그는 자기 부인과 딸과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와 치료를 받았다. 얼마 후 그는 48세의 나이로 나폴리에서 죽었고, 전 세계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테너 가수는 바로 공연 직전에 격렬한 불안과 두려움에 거의 시달렸다. 한 번은 아주 심각한 상태였다. 그는 불안이 자신의 목구멍을 조른다고 믿었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목욕을 할 정도였다. 조금 후에 분장실에서 무대로 입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무서워 떨게 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노래할 수 없다. 나는 사람들의 놀림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나의 ‘작은 자아’는 ‘위대한 자아’를 질식시키고 있다.” 이어서 그는 그 ‘작은 자아’를 향하여 단호하게 분수를 지키라고 요구했다. “ ‘작은 자아’야, 내게서 물러가라. 나의 ‘위대한 자아’는 노래하고 싶어 한다.” 이윽고 그의 이름이 호명되자 용기 있게 무대에 나갔고, 평소대로 그의 목소리는 청중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작은 자아’와 ‘위대한 자아’! 우리는 많은 경험을 통해서 이를 잘 알고 있다. 페트뤼스 세일런Petrus Ceelen의 시에는 이런 글이 있다.
나에게 항상 떠오르는 것은
나에게는 두 자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지.
선을 원하는 자아와
악을 행하는 자아.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려는 자아와
나만을 생각하는 자아.
나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자아와
나에게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자아.
하느님을 믿으려는 자아와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자아.

이 두 자아를 우리 각자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미 경험했을 것이다. ‘작은 자아’가 어떻게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우리의 주목을 끌게 하는지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 각자는 평온을 누리기 위해 ‘작은 자아’를 다루는 법을 찾아야 한다.
세일런의 시는 두 자아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작은 자아’는 인간을 늘 작게 만드는 근원이다. ‘작은 자아’는 우리의 ‘위대한 자아’를 불안하게 하기 위해 우리 영혼의 주전자에서 모든 것을 끓어오르게 한다. 말하자면 불필요한 걱정에 마음을 쓰게 하고, 외모와 인정, 세력과 돈 등에 대해 과도한 노력을 기울이게 한다. 물론 ‘작은 자아’의 특징은 시기, 질투, 과민, 불성실, 음모, 자기모욕, 낙담, 실망 등이다. 셀 수 없을 정도로 크거나 작은 거짓도 이에 속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그를 돕고, 그와 함께 마음 아파하는 것은 ‘작은 자아’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작은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작은 자아’는 눈뜬장님이다. 그는 남에게 무언가 주기를 원하지 않고, 특히 자기 자신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무언가 받기를 바라고 소유하기를 원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카루소는 오페라 테너 가수로서 자신의 역할을 단순히 감내하고 이행한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역할을 마지막 한계에 이를 때까지 다하였다. 그는 자신의 일에 온전히 몰두하였다. 그는 대단하게 성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허하였다. 자신의 성공에서도 그렇게 계속 겸허한 사람만이 새로운 것에 대해 열려 있을 수 있고, 또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작은 자아’가 일생 동안 늘 카루소를 괴롭혔기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이 그의 목구멍을 졸랐다. ‘작은 자아’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노래할 수 없다. 그대는 사람들의 놀림감이 될 것이다.” 그가 ‘작은 자아’와 맞서 겨루었던 싸움은, 우리 각자에게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언급한 내용은 우리의 일상 영역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신문에서도 늘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감옥에 있는 수인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들은 거의 ‘작은 자아’에 굴복했다.
아울러 ‘작은 자아’의 계략에 쉽게 넘어간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도 충분하게 찾아볼 수 있다. 헤로데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동방에서 박사 세 명이 새로 태어나신 임금님께 경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을 때, 헤로데의 ‘작은 자아’와 온 예루살렘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모든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을 불러 모아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알아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마태 2,8) 그러나 ‘작은 자아’는 실제로 전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동방박사에게서 우리는 ‘위대한 자아’를 만난다. 그들 마음 안에 위대한 무언가가 떠올랐을 때, 그들은 그것에 다다르기 위해 과감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길을 나섰다. 그들이 마침내 그것을 찾았을 때 그들은 무릎을 꿇고 경배하였다(마태 2,11). 이로써 그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법칙을 따랐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악령」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인류 존재의 법칙은 모두 한 점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간은 항상 뭔가 한없이 위대한 것 앞에 무릎을 꿇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부터 무한히 위대한 것을 빼앗아 버리면, 그네들은 살아갈 수 없어 절망한 나머지 틀림없이 죽어 버릴 것입니다.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란 인간에게는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 극히 우매한 인간까지도 뭔가 위대한 것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작은 자아’에서 ‘위대한 자아’에 다다르는 방법, 그러니까 자신을 보잘것없이 만드는 이기심에서 자신을 위대하게 만드는 자기 비움에 도달하는 방식을 체험하려면, 우리는 위대한 신비를 그 자체로 지닌 사상에 의지해야 한다. 그것은 곧 인간 삶의 가장 큰 모순으로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적게 생각할수록 더욱더 자기 자신이 된다는 사상이다. 곧 우리 안에는 ‘그릇된 자아’와 ‘바른 자아’가 있다. 늘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자신을 강조하는 자아는 잘못되었다. 이런 ‘잘못된 자아’는 항상 자기 자신만 바라본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자신의 이익에 관련시킨다.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관철시키고 자신의 권능을 마음껏 발휘하기 위해 유리한 모든 순간을 사용한다. 이러한 ‘작은 자아’는 자기 자신을 한껏 부풀리는 관계로, 늘 이면에서 숨어 있는 태도를 취하는 ‘위대한 자아’에 대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다시 엔리코 카루소에게 돌아가자. 엔리코 카루소가 ‘작은 자아’에서 벗어나 그것을 완전히 극복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은 단호하게 맞서는 방법이었다. “작은 자아야, 물러가라. 위대한 자아가 나를 통해 살길 원한다.”
“물러가라.” 이와 똑같은 말을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사용하셨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유혹자에 의해 광야에 인도되시어 유혹을 받으셨을 때의 일이다. 유혹자가 반복하여 예수님을 유혹하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셨다. 그래도 사탄이 계속하여 유혹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사탄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명령하신다. 이러한 힘찬 말씀으로 사탄은 예수님에게서 떠나갔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11 참조). 이러한 일은 항상 일어난다. 실제로 사탄일 수 있는 ‘작은 자아’가 하느님의 능력으로 무릎을 꿇을 때 일어난다. 이때 가치에 대한 의식, 기쁨, 평화, 안정 등이 현존재의 큰 흐름에 모인다.
이러한 첫 번째 사건이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에 있었던 일이라면, 두 번째 사건은 공생활 말기에 있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길’ 외에 다른 길을 가지 않기로 결정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 길을 아예 인간적인 ‘도피의 길’로 바꾸려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이기 때문에, 베드로의 제안은 예수님께서 견디시기 가장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이다. 가장 큰 유혹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작은 자아’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편한 삶이 아니라 선한 삶을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작은 자아야, 내게서 물러가라!’하고 단호하게 맞설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나의 ‘위대한 자아’가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