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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제67호(겨울) 신앙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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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9-12-17 15:35 조회1,8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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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저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1.기도하는 법을 정말 배워야 하는가?

어떤 사람이 진지하게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에게서 비범한 힘이 나오는 것을 느낀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우리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

베르너 베르겐그륀Berner Bergengruen(1892-1964)이 쓴 어떤 단편소설(Die Kunst, sich zu vereinigen)에는, 나이든 노숙자가 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헌병에게 체포되어 학교에 구금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완전히 기가 꺾여 철저히 버림받았다고 느낀 나머지 하느님께 구해달라고 기도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에 창문 하나를 통해서 그는 가까이 있는 사제관 정원에서 젊은 사제가 성무일도를 바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기도하는 그 사제의 모습에서 갑자기 큰 위로를 받았다.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사제가 지금 어떤 기도를 바치는지 나는 모른다. 그래도 그의 기도에 동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나의 마음을 단지 그의 마음과 그의 입술에 일치시키면 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가 기도드리는 모든 내용을 나의 간청으로 받아주실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 사제와 일치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고, 그는 그 사제에게 자신의 온 마음을 내맡겼다.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저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참조) 이렇게 청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간청하는 제자가 주님, 저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저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 제자는 기도하는 데에 개인적인 이유에서 어려움을 느낀 나머지 개인 자격으로 주님께 기도를 문의한 것이 아니다. 제자들 전체를 대변하여 제자들의 이름으로 간청하고 있다. 모든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잘 모르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직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 필요하다.

사무엘기 상권의 시작 부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엘카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하나는 한나였고, 다른 하나는 프닌나였다. 프닌나는 자녀들이 있었고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으셨던 것이다. 그래도 남편 엘카나는 한나를 무척 사랑했다. 하지만 그의 적수 프닌나는 한나를 무시하고 모욕했다. 화가 난 한나는 울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엘카나는 이렇게 물었다.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도 않고 그렇게 슬퍼만 하오? 당신에게는 내가 아들 열보다 더 낫지 않소?”(1사무 1,8)

한나는 너무 서글픈 나머지 성전을 향했다. 그 성전 입구에는 사제 엘리가 앉아 있었다.

한나는 흐느끼면서 주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엘리는 성전에 들어간 한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나가 속으로 기도하고 있었기에, 입술로 움직일 뿐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상태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술에 취해 있을 참이오. 술 좀 깨시오!’ 그러자 한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나리!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을 따름입니다.’”(1사무 1,14-15)

이것이 바로 개인 기도의 모습이다.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 앞에서 털어놓는 것이 개인기도이다. 아주 단순한 이런 개인 기도를 정말 배워야 하는가? 얼핏 보기에 우리 자신이 처한 불행한 상황이 그런 기도를 바치도록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기도하는 법을 따로 배우지 않아도 불행한 처지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기도하게 만드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런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모르는 체 하시지 않는다는 확신을 항상 어느 정도 전제하고 있다. 이런 확신을 보증이라도 하듯이,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그들의 길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고 그들을 인도하며 그들에게 위로로 갚아 주리라.”(이사 57,18)

아울러 여기에서 우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기도의 참된 스승은 성령이시라는 진리이다. 우리 안에 사시는 성령에 힘입어 우리는 하느님께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성령께서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우리를 도와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기도 하신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따라서 성령께서는 기도의 원천이시며 스승이시다. 말하자면 불행한 처지에서도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2.우리의 마음을 털어놓을 경우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행동하시는가?

다시 앞에서 인용한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이 말씀은 기도와 관련하여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세 가지 특성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 마음을 털어놓을 경우,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태도를 취하신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첫째, 우리를 고쳐주시고, 둘째, 우리를 인도하신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위로하신다. 개신교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의 도움으로 이 특성들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첫째,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고쳐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의 길을 바라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 삶에서 자주 상처를 받고 있고 혼란을 겪으며 불안에 빠져 있는 것을 이미 모두 알고 계신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에게 늘 구원자로서 가까이 다가오신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오신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를 치유하시는가? 그분은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지심으로써 우리를 고쳐주신다. 그분의 자비로운 어루만지심이 바로 우리의 상처를 대하시고, 우리를 고통에서 해방시키시는 하느님의 방식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시는 놀라운 힘은 그분의 어루만지심에서 나온다. 많은 치유 기적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리의 상처와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특히 기도 중에 그분의 자비로운 손길을 느낄 수 있다.

둘째,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신다. 지난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우리 자신의 생각을 주로 고집하며 살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하느님의 길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 자신의 길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적극적으로 걷던 우리 자신의 길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늘 우리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주변에만 맴돌며, 우리가 정작 추구하는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위험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붙잡으시어 끊임없이 당신의 길로 인도하신다. 우리를 어둠으로부터 당신의 빛으로 인도하신다. 그분의 빛 안에서만 우리 인간은 행복을 누리며 제대로 살 수 있다.

셋째,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신다. 하느님의 위로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십니다.”(2코린 1,3-4 참조)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위로하시는가? 위로란 고통이나 어려움을 몰아내거나 없애주는 행위가 아니라, 페터 리페르트Peter Lippert(1879-1936)가 지적했듯이, 고통이나 어려움에 넓음의 외투를 씌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비좁고 답답한 곤경과 속박에서 무한히 크시고 넓으신 하느님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이 위로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곁으로 부르시거나 우리 곁으로 다가오시어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당신 곁에 머무르고 그분의 길을 떠나지 않도록 도와주심으로써 우리를 위로하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품 안에서 그분의 현존을 생생하게 체험하며 자유를 누린다.

나는 그들의 길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고쳐주고 인도하고 위로한다.’ 이사야의 이런 말씀을 우리는 실제로 일상 삶에서 자주 체험했을 것이다. 아마 하느님께서 우리를 크나큰 곤경과 위험에서 구해내실 때 그 말씀을 체험했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의 하느님!’하고 외치며 기도드리고 울부짖었을 때 특히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행동하셨던 것이다.

나리, 저는 불행한 여자입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을 따름입니다.”하고 한나는 고백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한나와 같은 기도는 불행한 처지에서 마치 봇물처럼 자연스레 터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느님을 정말 아버지로 여길 경우에 비로소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3.‘털어놓는 것은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털어놓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털어놓다내려놓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이 들어 올리다를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상황에 무관심하신 것이 아니라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고 모든 것을 잘 돌보신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무기력과 연약함, 부당함의 심연으로부터 자신의 기도를 높이 들어올린다. 시편 34편은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 주신다.”(시편 34,19)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인간은 자신의 곤경에서 하느님께 부르짖을 수 있다. 아니 부르짖어야 한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늘 새롭게 하느님께 재촉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곤경 중에 하느님 아버지께 재촉하시고 부르짖으셨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보다 더 넓게 그리고 더 멀리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를 간절하게 드릴지라도 그분의 응답은 우리의 기대와 다를 수 있다. 세상에서도 아버지는 자기 자녀들의 간청을 모두 들어주지 않는다. 간혹 그 간청이 자녀들에게 최상의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가장 적합한 응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응답에 대해 우리는 어느 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다. 따라서 높이 들어 올린다는 것은 모든 기도에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하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

시편에는 어려운 처지에서 자신의 무거운 마음을 털어놓는 기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는 시편도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높이 들어 올린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더욱 높이 들어 올린 감사기도와 찬미기도가 있다.

다음 시편이 바로 그것이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그들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는 온 땅으로,

그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가네.”(시편 19,2-5)

 

이 시편 작가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고 있다. 하지만 이 기도에는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깨끗한 믿음과 신앙과 감사가 담겨있다. 이런 순수한 기도에 이르러 우리 자신의 기도를 깊이 성찰할 경우, 결국 우리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주님께 청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너무 자주 상투적으로 기도를 바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