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2024.04
20
메뉴 더보기

글모음

쌍백합 제64호(봄) 신앙의 오솔길

페이지 정보

작성일19-03-14 11:41 조회2,115회 댓글0건

SNS 공유하기

본문

“그분은 바보이셨습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새롭게 묵상할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셨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어린이에게 나폴레옹, 알렉산더 등 다른 많은 역사적 위인들과 더불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그린 그림을 보여주라고 제안한다. 그러면 어린이는 틀림없이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그림을 보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도대체 누군지를 물을 것이며, 이때 ‘그분은 일전에 지상에서 사셨던, 사랑이 가장 많으신 분’이라고 대답하면, 어린이는 ‘누가 그분을 처형했으며, 또 무엇 때문에 그분을 처형했는가?’ 하고 진지하게 물을 것이라고 한다.

 

‘그분은 일전에 지상에서 사셨던, 사랑이 가장 많으신 분인데, 왜 그분을 처형했는가?’ 이 진지한 물음에 대해 리지외의 데레사(1873-1897) 성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헤로데가 예수님의 유일한 잘못으로 비난했던 내용은, 그분이 바보였다는 것이다.” 데레사 성인이 이렇게 대답한 까닭은 헤로데가 예수님을 바보로 마구 취급하는 다음 구절 때문이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루카 23,11) 이런 이유로 성인은 계속하여 이렇게 말한다. “저도 그분을 헤로데처럼 생각합니다. 영광의 임금이신 그분은 바보이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친구로 삼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Briefe』) 

 

예수님의 친척들도 헤로데처럼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도움을 받기 위해 그분께 몰려왔을 때, 그분의 친척들은 그분을 붙잡으러 찾아왔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로마 황제를 경호하던 병사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 경호원이 머물던 방의 한쪽 벽에는 십자가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지 얼마 후에 그려진 것으로, 아마 예수님의 십자가 그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그림일 것이다. 이 그림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이 있는데, 그 머리는 당나귀의 머리로 되어 있고, 그 십자가 앞에는 병사 하나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있다. 그리고 그림 밑에는 “알렉사모네스가 자기 하느님께 경배하다.”는 글귀가 있다. 이 그림은 젊은 병사를 비꼬는 풍자 그림이다. 말하자면 인간에 의해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은 힘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무기력하거나 어리석은 당나귀일 수밖에 없고,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 역시 미련하기 짝이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미련한 바보나 미친 사람으로 취급을 받으신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그야말로 그분의 한계 없는 무한한 사랑 때문이다. 그분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죄악으로 인해 파괴된 우리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스스로 기꺼이 짊어지시기 위해, 우리 각자를 조건 없이 사랑하시기 위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셨다.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유다인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3-24)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자기 낮춤을 세상은 어리석고 미련한 일로 여기지만, 바로 여기에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참조)라고 고백하고, 사도 바오로는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코린 13,8)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어 그런 사랑으로부터 살려고 노력할 때, 그리스도교는 비로소 우리 안에서 약동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확실히 모든 이성적인 척도를 넘어선다. 그러기에 건강한 이성은 이런 사랑을 이해할 수 없고 미련하고 어리석게 여긴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절정에 달하는 그분의 삶에서만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도 계시된다. 그 가르침의 핵심은 산상설교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분을 추종하는 제자들을 미련한 사람으로 간주하기 위해 얼마나 자주 이용되고 있는가!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루카 6,27-29) 이런 산상설교를 듣는 이른바 건강한 이성은 이렇게 반응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너무 심하다. 이것은 미련한 짓이다. 이것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현실을 너무 간과하고 있다.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가! 도저히 그럴 수 없다.’ 

 

일전에 어떤 젊은 가장家長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가장은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특이한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이런 경우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하고 물으며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아주 추운 12월 24일 오전, 그는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어머니에게 줄 성탄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가 몇몇 선물들을 구입했을 때, 장갑을 끼고 있지 않은 노동자가 눈에 띄었다. 노동자의 손은 추위 때문에 검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젊은 가장은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노동자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그래도 내 손은 외투 주머니에 넣을 수나 있지!’ 하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의 외투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조금 후에 궁핍한 사람이 그의 외투를 차지하였다. 젊은 가장은 ‘그래도 나에게는 따뜻한 스웨터가 있지.’라고 생각하며 남루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 외투를 벗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행동하는 젊은 가장을 사람들이 수상하게 여기며 주시하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그는 갑자기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었다. 젊은 가장은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런 상황에서 취하셨을 행동을 그대로 이행한 것뿐이었다. 그가 경찰에 연행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수상하게 행동했다는 이유로 신고되어 연행되었던 것이다.

 

그는 경찰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애써 설명했지만 그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아무도 그의 행동을 이해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의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사람들은 그를 정신이상자로 여겨 정신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성탄축일을 보냈다. 성탄 전날 오전에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그에게 일어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신병원에서 풀려난 그는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저는 몹시 놀랐고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제 남은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젊은 가장의 충격적인 이 사건은 우리 신앙인에게 많은 것을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이를 크게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해 보자. 첫째,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 이후에, 이 세상에는 완전히 서로 다른 두 가지 곧 하느님의 실재와 세상의 실재가 있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여 완전히 판이한 두 가지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 있다.

 

진지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실재 안에서 살기 때문에, 그는 ‘건강한 인간 이성’에는 어쩔 수 없이 세상의 실재와 동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은 세상 물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다. 그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월적인 실재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실재가 우리 삶에 개입하면, - 이런 개입은 대체로 순식간에 일어나는데 – 이때 세속적인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무너진다. 피상적인 즐거움, 명예, 재산, 인정, 권력과 영향력 등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이유로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이 세상의 실재는 낯설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생각되고, 반면 세속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실재는 달갑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둘째, 현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소유 의지는 중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항상 목적과 유용성을 우선시하여 생각하고 결정한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개의치 않고 자신의 효율적인 목적만을 중요시한다. 그는 오직 이 세상에만 목숨을 걸기 때문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에만 흥미를 느끼고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만 추구한다. 많은 면에서 그는 개미와 같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모든 동물을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탐욕 때문에 유독 개미만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런데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실재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이 세상의 실재보다 더 참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에게는 가치에 대한 다른 등급이 있다. 그가 우선시하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이다. 그는 많은 것을 손에 넣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놔둔다. 많은 것이 그대로 존재하도록 자신을 내려놓는다. 그러기에 그는 내적인 깊은 고요를 누리고, 그 고요가 자기 현존재 전체를 완전히 다스린다.

 

이런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가장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이에 관하여 로마노 과르디니는 인상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은, 모든 표현을 넘어서는 무한한 것의 섬광일 뿐이다.… 예수님에게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분께서 종교적 본성을 실행하거나 묘사한 내용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서 나타난 하느님의 신비이다.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하신 내용이 아니라, 그분께서 보여주신 하느님 자신이 관건이다. 그분께서 하느님을 찾도록 가르치신 내용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 현존하시는 하느님이 그분에게 중요하다.”(『Die menschliche Wirklichkeit des Herrn』)

 

셋째, 존재 안에서 누리는 평온만이 깊은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은 그 사랑의 힘으로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 안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준다. 이런 단적인 실례로 우리는 막시밀리안 콜베 성인(1894-1941) 사제를 들 수 있다. 이 성인 사제에 대해 바오로 6세 교황은 “참담한 나치시대에 가장 밝은 빛을 내고 가장 큰 목소리를 낸 분”으로 칭송했다. 콜베 신부님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유대인들을 도운 죄로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형무소에 갇혔다. 그분은 형무소에 있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병들고 나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무언가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분은 비록 거의 활동할 수 없었음에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형무소에서 죄수 한 사람이 사라진 일이 발생했다. 죄수가 탈옥했다고 생각한 형무소 지휘관 칼 프리취는 다른 모든 죄수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죄수 열 명을 끌어내서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그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이 “내 아내, 내 아들! 그들은 어떻게 될까!”하면서 울부짖으면서 통곡했다. 그러자 콜베 신부님은 지휘관에게 “나는 가톨릭 사제입니다. 저 사람에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대신하여 처형을 받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에 수용소 지휘관은 ‘승낙’했고 마침내 콜베 신부님은 굶겨 죽이는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지휘관은 “이 자가 완전히 미쳤군!” 하고 중얼거렸다.

 

콜베 신부님의 전기傳記는 이렇게 묻는다. “칼 프리취가 콜베 신부님의 훌쭉해진 얼굴에서 참으로 맑고 깨끗한 눈을 보았을 때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는 유일무이한 이 순간에 어떤 힘이 자신 앞에 있음을 감지하고, 그 힘을 남은 여생 동안 과연 생각했을까?”(Lawrence Elliott) 수용소 지휘관은 ‘승낙’했고, 중얼거렸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죄수 하나가 도망치면 죄수 열 명을 처형하기를 바라던 인간이다. 이에 반해 콜베 신부님은 존재의 힘으로 한 가장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죽음의 길을 갔던 분이다. 그리고 그 길을 기쁜 마음으로 노래하고 기도하며 걸어갔다.

 

여기에서 ‘존재’와 ‘소유’는 대립하고 있다. 그런데 ‘소유’는 이 세상에서 ‘존재’를 허용할 수 없다. 그래서 소유는 존재를 늘 방해한다. 이것은 실제로 예수님에게 운명이 되었다. 예수님의 존재는 소유에 의해 방해를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막시말리안 콜베 신부님에게도 운명이 되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추종하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또한 운명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반대와 박해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