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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국[3.1 운동 100주년]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회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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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9-02-27 15:43 조회4,5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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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주년]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회의 독립운동
(경향잡지 2019년 3월호 경향 돋보기 기고문)

 

_원재연 하상바오로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와 중앙대학교 등지에서 한국사를 강의하며, 저서로 조선 왕조의 법과 그리스도교, 서세 동점과 조선 왕조의 대응이 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은 식민지 압제에서 벗어나 민족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고자 국내외에서 다양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천주교인들도 이러한 민족 해방 운동 또는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선교사들이 주축이 된 천주교 교단은 교회를 보호할 목적으로 정교분리를 내세워 민족 운동을 금지하고 일제 총독부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의 독립운동은 많은 제약과 한계를 지닌 채 전개될 수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역사의 전면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회의 민족 운동은 대부분 은폐되어 교회 밖 민족 구성원들에게 저평가되고 말았다.

그동안 축적된 교회사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여 개략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일제 치하 하느님 백성으로서 천주교 신자들의 다양한 수준과 분야의 독립운동 실상을 재평가하는 실마리를 열어 두고자 한다.

 

국내-소극적 항일 움직임과 친일 논란

일제의 한국 침략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집단적 저항은 국권 피탈 전부터 시작되었다. 1904년 일제는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는 중에 황무지 개간을 명분 삼아 한반도의 토지를 약탈하려고 했다. 이에 신자들은 서울 명동성당에 모여 일제의 토지 개간과 수탈에 반대하는 기도회를 열었다. 이 기도회는 근대에 들어와 한국 천주교회에서 최초로 교회 밖 사회 문제에 집단으로 반응을 보인 사회 참여이자 민족 운동이었다.

1907년 일제에 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하고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경상도 의병장 김상태는 일본군에게 잡혀 사살될 때까지 몸에 묵주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안중근 토마스가 두만강 일대의 의병 전쟁에 참여하면서도 날마다 하느님께 기도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인으로서 항일 의병 전쟁에 참여한 사람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3·1 운동 당시 서울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에 다니던 소년 김수환 스테파노(추기경)는 갑조의 선생님들한테서 일제의 식민 통치 만행과 민족혼을 일깨우는 강의를 들으며 민족적 울분이 치솟곤 하였다고 밝혔다. 김수환 추기경은 신학교 시절 수신 과목에서 일본 천황의 칙유를 받은 황국 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문제가 나오자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니라서 천황의 칙유에 대해 소감이 없다.”는 당찬 답안지를 제출했다가 교장에게 불려가 뺨을 맞고 심한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추기경은 당시 교장이었던 장면이 이 일로 고초를 겪게 될 자신을 보호하고자 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당시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다양한 근대 학문을 가르쳤던 장면 요한(2공화국 국무총리)은 수원농림학교 재학 시절 학내 항일 비밀 결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노기남 바오로(10대 서울교구장, 대주교)를 비롯한 신학생들에게 일제의 식민 통치를 비판하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강의를 수시로 하였다.

동성상업학교와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있었던 이런 일화는 소극적이지만 민족 교육을 통한 천주교회 나름의 항일 움직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신사 참배가 의무화되고 전시 동원 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1930년대 후반부터 노기남 신부와 장면은 각각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성직자와 평신도로 선정되어 일제가 강요하는 각종 군중대회에 불려 나가 전쟁 동원에 협조하라는 마음에도 없는 연설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이러한 활동은 오늘날까지도 친일 행위로 비판받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일제 말 천주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 단체의 수장들은 이러한 군중 연설에 강제로 동원되었다. 그리고 이런 활동은 당시 교회가 생존하는 데 불가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며, 일제 밀정들도 천주교회 지도자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공격하곤 했다.

공베르 신부(안성본당)와 폴리 신부(수원본당), 정규하 신부(풍수원본당), 윤예원 신부(은율본당), 빌렘 신부(청계동본당), 그리고 서울과 충청도를 오가며 활동한 교회사가 피숑 신부 등도 직간접으로 천주교인이 포함된 민족의 독립운동을 지원 협조하거나 개인적 차원에서 일제에 저항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은 채 개인 차원에 머물렀고, 문제가 커졌을 때는 교구장의 강한 제지를 받아 더 확대되지 못했다.

 

해외-한국 천주교인들의 적극적인 독립운동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간도를 비롯한 중국 등 해외에서는 국내와 달리 교회 밖 다른 한국인들과 연합하여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적극적인 무력 항쟁에 비교적 자유롭게 나섰다.

해외에서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이 추진한 독립운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북간도 교우촌을 중심으로 한 의민단의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만주와 상해, 중경 등 중원 전체를 대상으로 한 안중근 일가의 활동이다.

3·1 운동 직후 장백현의 한국인 천주교 신자 30여 명은 압록강 건너편 혜산의 일본 경찰서를 습격하였다. 당시 연길 지방의 천주교 계통 학교 학생과 교사는 대부분 한만 국경을 넘나들며 무력 항쟁을 전개하였다.

19206-7월 무렵 북간도의 천주교인들이 조직한 의민단은 방우룡 대장을 비롯하여 김연군, 현빈, 채창묵, 김종헌, 허근, 홍림, 김병렬 등을 포함하여 200명의 군인과 200정의 무기를 보유했다. 이들은 신자들의 헌금으로 운영한 독자적인 독립군 부대로서 1920년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 대첩에도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의민단은 대한의민회라는 이름으로 대한신민단, 대한광복단, 대한국민회 등과 연합하여 북로사령부를 구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안중근 토마스에게는 안정근 치릴로와 안공근 요한 두 명의 친동생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3·1 운동 직후에 조직된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안정근은 흔히 3·1 운동의 불씨로 알려진 일본 도쿄의 2·8 독립 선언보다 일주일 정도 앞선 191921일 만주 길림성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39인이 발표한 대한 독립 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해외 민족 운동 대표 가운데 한 명이었다.

안정근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이후에 연해주로 이주하여 권업회를 통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1915년에 신민회의 노령총감을 맡고, 1918년 중국 길림성에서 전개된 무오 독립 선언서발표에도 공동으로 참여했다. 그는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김구와 함께 황해도 신천군 조사 위원으로 활약했다. 또 북간도에 교민단을 설치하고 청산리 대첩에도 참여하여 상황을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가족과 함께 상해로 옮긴 뒤에는 김구, 안창호 등의 도움을 받아 임시정부의 내무차장과 대한적십자사 회장 직무 대리 등으로 활동하여 198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정근의 장남 안원생은 임시정부 광복군과 미국 전략정보국(OSS)의 중개 역할을 했다. 차녀 안미생은 김구의 장남 김인과 혼인하였고, 임시정부 시절은 물론이고 광복이 된 뒤에는 귀국하여 며느리 겸 비서로서 김구의 활동을 보좌하였다. 그는 당시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와 함께 평소 김구에게 천주교의 영적 감화를 주었고, 김구가 1949년 피격되어 절명하기 직전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병자성사를 받는 데 한몫했다.

안공근은 안중근이 운영하던 진남포의 돈의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애국 계몽 운동에 헌신했다. 1919년 안창호의 추천으로 임시정부에 들어왔고, 1921년 외무 차장으로서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독립 자금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1926년에는 여운형의 후임으로 상해 교민단장을 지냈으며, 독립운동 내 좌우 분열을 극복하는 데 힘써 1927년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민족 유일당 운동의 집행 위원으로 활동했다.

또 안창호, 조소앙, 김구 등과 함께 우파 통일 전선 연합체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이사로 활동했으며, 김구의 보좌관이자 한인애국단 단장으로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열 활동을 기획하였다.

안공근의 장남 안우생은 부친과 함께 김구의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뒤 북한 정권에 참여하였다. 차남 안낙생은 한국광복단에 참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 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이들 외에도 안중근의 사촌 안명근 야고보는 1910년 말에 황해도 일대에서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발각된 안악 사건의 주모자로 무기 징역이 선고되었고, 1926년 출옥한 뒤에는 만주 의란현에서 전교에 앞장섰다.

안중근의 오촌 조카 안민생은 젊은 시절부터 만주에서 항일 유격대에 투신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서울에서 옥살이했다. 안중근의 사촌 안경근은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고, 1925년 중국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의 독립군 단체인 정의부에서 활동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상해 임시정부로 옮겨와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다.

안중근의 집안에는 근자 항렬 사촌이 열한 명, 이들의 소생인 생자 항렬 조카가 스물두 명이 넘는다. 이들 가운데 중국과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해방 뒤 남북한의 정권에 참여한 이가 많았다. 이들은 앞으로 한국 천주교회사의 역군으로서 한반도의 분단 극복과 민족의 화해 일치를 위한 운동에 상당히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