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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신임 전주교구장] 삶과 신앙[가톨릭신문 2017-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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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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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신임 전주교구장] 삶과 신앙

성당이 놀이터였던 소년… 신학연구 이끄는 학자 사제로

어린시절 학교 마치면 매일 성당행
새벽미사 복사 도맡으며 신부 꿈 키워
스위스에서 기초신학 박사학위 받아
귀국 후 전주가톨릭신학원 기틀 다져

발행일2017-03-26 [제3037호, 10면]

■ 유서 깊은 교우촌에서 보낸 어린 시절

김선태 주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기억나는 것은 성당뿐이다. 1961년 9월 김 주교가 태어난 전북 익산 성치마을은 한국 천주교 박해시대에 박해를 피해 교우들이 만든 유서 깊은 교우촌이었다.

1960년대 어디 가나 가난하던 시절 아궁이에 불을 피워 밥을 짓던 김 주교 집안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5남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나 형제가 많았던 김 주교도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지만 성직자와 수도자가 나온 집안이어서 성당이 놀이터였고 어린 시절 기억은 성당밖에 없다”고 회상했다.

시골에서 성장했지만 다행히 김 주교가 신앙생활 했던 여산본당이 집에서 6~7분 거리로 가까워 학교가 끝나면 형제들과 성당으로 달려가곤 했다. 김 주교의 남동생 김웅태(대건 안드레아·49)씨도 “형님이 고향에서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같이 살았는데 성당을 놀이터 삼아 매일 같이 형님과 성당에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며 “형님은 어린 시절 새벽미사 복사를 서는 열심한 신앙인이었고 어린 나이에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주교의 누나 김숙희(소화 데레사·56)씨 역시 “새벽미사에는 부모님과 형제들이 모두 갔고 항상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고 기억했다. 김 주교는 여산본당 새벽 5시30분 미사 복사를 도맡아 서다시피 하며 새벽 4시50분에 어머니 박정규(세레나·84)씨가 깨우면 일어나기 힘들어도 반드시 일어나 성당으로 향하곤 했다.
 

1977년 소신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교정에서 부모님과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전주교구 홍보국 제공

■ ‘착한 형’ 김선태 주교

김 주교는 ‘착한 형’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김웅태씨는 “옛날 시골 동네에서는 형이 동생을 때리는 일이 흔히 있었지만 형님 주교님은 한 번도 저를 때린 적이 없었고 6살 차이 동생인 저에게 수학 수련장을 사다가 가르쳐 줄 정도로 자상한 면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김 주교에게 신앙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단연 어머니였다. 박정규 여사는 김 주교에게 ‘늘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고 80이 넘은 지금도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는 것을 철칙으로 지키고 있다. 김 주교가 3월 14일 오후 8시30분 전주교구청 사제관 성당에서 주교 임명식을 마치자마자 환호하는 교구청 사제단과 직원들을 뒤로 하고 제일 먼저 병상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간 것도 주교가 되기까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였다.

1983년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 학사, 1989년 광주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받고 1989년 1월 20일 전주교구에서 사제로 서품된 김 주교는 신학교 재학 시절 식사 시간과 잠자는 시간 빼고는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는 학구파로 유명했다. 취미가 공부였다. 석사 논문이 이미 교수 신부들 사이에서 회자될 만큼 일찌감치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89년 1월 사제품 받는 장면(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진 전주교구 홍보국 제공

■ 탁월한 학자이자 성실한 사목자

사제서품 후 전주 전동본당과 군산 둔율동본당에서 2년간의 짧은 보좌신부 생활을 마치고 스위스 프리부르대학교에서 6년간 유학생활을 거쳐 기초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김 주교에게 정해진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김 주교는 유학 기간 중 독일어 학습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그가 독일어로 쓴 박사학위 논문은 프리부르대학교 신학총서에 등재되는 영광을 안았다.

김 주교는 1997년 유학을 마치고 전주교구로 돌아와 그해 교구장 이병호 주교가 교리 연구와 선교사 양성을 위해 설립한 전주가톨릭신학원 부원장을 맡게 된다. 이병호 주교는 “전주가톨릭신학원의 기틀을 다진 분이 김선태 주교”라고 말한 바 있다. 김 주교는 전주가톨릭신학원 설립 초창기 부원장으로 4년간 봉직한 뒤 곧이어 2001~2003년과 2006~2009년에는 원장으로 전주교구 가톨릭신학 연구를 선도했다. 김 주교가 전주가톨릭신학원 원장으로 일할 때 행정실장으로 김 주교를 도왔던 최원석(시몬)씨는 “김 주교님은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공부가 좋아서 연구에 매진했던 분이었고 정말 존경스런 학자였다”고 말했다.

2009년 전주가톨릭신학원 원장직을 떠난 뒤로는 전주 화산동본당과 정읍 연지동본당, 전주 삼천동본당에서 주임으로 사목하면서도 학술 연구와 번역서 편찬을 멈추지 않았고 신뢰받는 사목자상을 정립했다. 신자들이 성당에 오기 전 먼저 매일 새벽 5시 전에 성체조배로 하루를 열었다. 최근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라」를 포함해 10여 권의 번역서를 내고 전주교구 계간지 「쌍백합」과 교구 주보 ‘숲정이’에 10년 가까이 묵상글을 연재하는 등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본당 내 각 단체 회합시간에 맞춰 훈화를 빠뜨리지 않을 만큼 성실한 사목을 펼쳤다. 또한 연초에 사목회 임원들과 협의해 본당 1년 계획을 짜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추진력 있게 진행시켜 본당 신자들의 일치와 참여를 이뤄냈다.

김 주교에게는 마지막으로 사목한 본당이 된 전주 삼천동본당 한상갑(바오로) 사목회장은 “신자들이 새벽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오면 항상 김 주교님이 홀로 성체조배를 하고 있어 감명 받은 신자들이 많았다”며 “지난해 10월 시작한 가정 방문 기도에 김 주교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신자들과 함께해 신자들이 그 분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1997년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한 강의실에서 유럽에서 공부하는 교구 신부 및 신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사진 전주교구 홍보국 제공

■ 가족의 기도

김 주교의 누나 김숙희씨는 “우리 가족이 신앙에는 엄격하고 칭찬에는 인색해서인지 동생 주교가 져야하는 십자가의 무게를 생각하니 기쁘다기보다 가슴이 납처럼 무거워지는 심정”이라며 “동생 주교가 착한 목자가 되도록 교구민들이 지혜와 분별, 자비심을 청하는 기도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박지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