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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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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2-03-29 00:00 조회2,8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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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사제, 수도자, 그리고 교형자매 여러분!

드디어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금년 말에는 대통령 선거도 있을 것입니다. 2012년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유난히 집중되어 있는 해입니다. 국제적으로나 나라 안에서나,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빠르게 변해가는 정치 현실과 사회 상황을 감안하면, 우리가 하는 선택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폭과 깊이로 우리의 삶을 바꿀 것입니다. 특히 북한에서는 최고 통수권자가 이미 교체되었고, 남한에서는 곧 바뀔 것이기 때문에, 이번의 선택은 우리나라의 미래, 특히 한반도의 평화와 실질적인 민주주의 그리고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서 결정적인 의미를 띠게 될 것입니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세상이 끝 모를 추락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나라는 그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거침없이 국경선을 넘어 밀려드는 자본주의는 울타리를 벗어난 맹수처럼 경제 구조를 송두리째 무너뜨려 양극화 현상을 가속시키고 있습니다. 소도시까지 점령하여 작은 가게에 목숨을 의지해 살던 소상인들의 삶을 여지없이 짓밟고 있는 대형 백화점은 그 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는 1%를 위한 99%의 희생이라는 말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 자살률 1위라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상황을 한 마디로 말해 줍니다.  

 

사람들의 정신세계도 물질생활 못지않게 파괴되고 황폐화하고 있습니다. 중독의 수준에 이른 게임, 도박, 포르노, 학교폭력, 그리고 점점 나이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확산되는 비속어의 사용은 그 몇 가지 증상일 뿐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민의 20%가 당장 정신과적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심리적 문제를 안고 있으며, 그 수는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우리 사회의 총체적 방향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이며, 각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고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현실생활의 여러 구체적 측면에 이르기까지를 깊고도 긴 시선으로 바라보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정치인이 절실히 기다려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4월 11일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와 12월 19일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어떻게 준비하고 무슨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생활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생활 전반과 우리의 미래 세대 교육의 방향까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밑에 있는 새를 잡으려면 위에 있는 새를 겨누라는 속담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과 경제성장이 아무리 시급하다 해도, 그것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온 나라가 그 이야기로 해가 뜨고 지며, 누구나 입만 열면 이야깃거리가 돈 문제뿐이라면, 그 나라는 이미 크게 병이 든 것이며, 물질적 진보마저 제대로 이루어낼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 개인과 사회 전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관해서 분명한 기준과 생각을 가지고 나라의 지도자들을 뽑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산업화 초기에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잔인했던 자본주의의 실상을 목격하며 레오 13세 교황께서 반포한 회칙을 시작으로 현 교황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정치-경제-사회 문제에 관해 발표해온 가르침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간추린 사회교리]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습니다. 그리고 2011년 10월에 있었던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추계총회에서는 [사회교리주간]을 설정하여, 교회가 120여 년에 걸쳐서 발전시켜온 가르침을 연구하고 실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의 역사에서 1891년에 처음으로 나온 것이 [새로운 사태]라는 제목으로 반포된 레오 13세의 회칙이었다는 사실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인류 사회에 등장한 이래 오늘에 와서 세상은 다시 한 번 그 무서운 맨 얼굴을 눈으로 보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 모두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태”를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교회가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해서 말하고 어떤 입장을 표명하려고 하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르 12,17과 병행구)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자기네 입장을 정당화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말이 언뜻 듣기에 그럴싸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화폐로 상징되는 정치질서나 정당한 제도가 제대로 돌아가게 할 권위와 책임은 통치자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정치라고 한다면, 정치는 통치자가 대표하는 정치인들의 몫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절대로 정치 집단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정치나 현실문제에 관해서 일일이 간여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앞뒤 배경과 함께 정확히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그 이야기를 마태오 복음은 22장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러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아 올가미를 씌울까 하고 궁리한 끝에 자기네 제자들을 헤로데 당원 몇 사람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신 분으로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을 압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간악한 속셈을 아시고 “이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의 속을 떠보느냐?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 하셨다.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 오자.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하고 말씀하셨다. -

 

여기에서 문제는 무엇이 카이사르의 것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돈에 새겨진 최고 통치자의 모상과 새겨진 글자가 상징하듯이, 그가 정치-사회 질서를 보장해 주어야만 국민들이 안심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국내 질서를 유지하고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돈에 새겨진 통치자의 모상과 이름이 상징하는 권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통치자의 몫, 그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민은 마땅히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법을 지켜야합니다.

 

그런데 돈에 새겨진 모상보다 더 중요한 모상이 또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자주 잊어버립니다. 하느님의 모상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성서는 인간이 바로 그 하느님의 모상(창세 1,26참조)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인간과 그 존엄성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절대자이신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존엄성도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어떤 권력이나 권위 또는 명분도 이 하느님의 모상을 훼손하거나 파괴할 권리가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말 그대로 신성불가침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의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도 인간의 존엄성이 걸린 문제에 관해서는 과감히 나서서 말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면 어떤 투쟁과 희생도 감수하는 것입니다.  

 

태아를 무참히 죽이는 일, 태어난 생명을 함부로 대하는 일. 특히 어린이나 학생들이 사람으로서 제대로 성장할 수 없게 하는 환경.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없는 상황. 이런 것들은 인간 존엄성의 이름으로 반드시 막고 고쳐야 할 일들입니다. 같은 이유로, 삶에 꼭 필요한 재화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집중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타고난 존엄성을 지키고 살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궁핍하게 되는 현상도, 교회가 정의의 이름으로 규탄하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노력해야 할 과제입니다. 일찍이 대 그레고리오 교황(590~604 재위)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삶에 꼭 필요한 것마저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것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들의 것이었던 것을 되돌려주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선의 명목으로 선행을 한다기보다, 정의의 이름으로 의무를 다해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182-184항). 사람뿐 아니라, 물, 흙, 공기, 산천초목 등 대자연이 파괴되면, 한 순간도 그것들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사람의 생명도 따라서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환경문제도 교회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하거니와, 교회는 정치집단이 아니며, 특정한 정당을 지지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정당이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편짜기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품어 안아야 하는 교회가 특정 정당의 편에 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이나 존엄성이 위협을 받으면, 교회는 단연 그것을 보호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 쪽을 편드는 것입니다. 이때의 편들기는 1970년대부터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말로 알려지다가, 특히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백 주년](1991년) 이후에는, 세상 어디에서나 교회의 기본 입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교회나 각 신앙인들이 한 쪽에 치우친다거나 정치적인 색깔을 띤다고 비난받는다면, 그 비난은 교회가 제 길을 잘 가고 있다는 표지가 될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칭찬이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보여주신 모범이 실현되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마태 5,10-12).

 

그러므로 우리는 특히 두 번의 큰 선거를 앞에 두고, [간추린 사회 교리]를 잘 공부하여,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고 온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방향으로 선택할 준비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선택”이라고 했습니다만, 우리나라가 특히 선거 때 보여주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객관적 사리나 나라 전체의 앞날을 생각하기보다, 너무나 쉽게 자신의 개인적 이익이나 연줄에 따라 투표하는 세태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때, 우리 신앙인들이 양심 속 깊이 들어가 하느님을 만나며 투표권을 행사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방이 막혀서 아무도 볼 수 없는 공간으로 되어있는 “투표소는 고해소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해소에서 우리가 양심 속 깊이에 들어가 하느님과 대면하듯이, 투표소에서도 양심 속에 깊이 들어가서, 자신의 개인적 이익이나 사적 인연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 전체를 위해서 무엇이 좋은지를 정확히 식별하고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하겠습니다. “양심은 각자가 하느님을 만나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투표는 나라와 국민 전체의 삶에 그토록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어울리는 깊이에 들어가서 생각하고 판단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바탕이며 국민의 최상권인 그 권한을 적극 행사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힘을 합침으로써, 국민 모두가 하느님이 주신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정의로운 나라를 이룩하는 데에, 각자가 제 몫을 잘 할 수 있도록 빛과 힘을 주시라고 주님께 기도합시다. 

 

- 2012년 4월 1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