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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25일 성탄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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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ecil 작성일08-12-26 00:00 조회2,1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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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맞이

“주 하느님이 태양이요 방패이시니 은총과 영광을 주께서 내리시고
티 없이 걷는 이에게는 좋은 것 아니 아끼시나이다.”(시편 84, 12)
하느님은 태양이십니다. 그분의 아드님도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시편 84,12)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참 모습이 드러났을 때, 그 얼굴이 “해와 같이 빛”(마태 17,2)났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빛이십니다.  
그런데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습니다.”(요한 1,3) 실상 빛은 어둠 때문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세상에 어둠이 없었다면 빛이 거기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이 있습니다.
정치적, 물질적 권력이 있는 곳에 어둠이 특히 눈에 더 잘 드러납니다. 선거철을 맞아 사람들이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장면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최근에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크게 느꼈습니다. 또 태안 앞 바다 기름 유출 사고로 온 국민의 가슴에 어둠이 짙게 깔렸습니다. 서해안에 넓게 펼쳐진 세계적 철새 도래지까지 이 검은 장막이 덮치면 이 사고는 기름을 뒤집어쓰고 죽어가는 새들의 영상과 함께 인류의 가슴에 걷어내기 힘든 그림자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몇 사람의 방심이 이렇게 엄청난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대권 후보자마다 새로운 세상, 밝은 미래를 약속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아니면 재앙이 올 듯이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선거철을 수 없이 겪고 나라의 살림꾼을 여러 번 바꿨지만 세상은 크게 밝아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재앙이 닥치지도 않았습니다. 정치적 권력이나 몇몇 개인이 세상을 밝아지게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것은 마르크스 공산주의 체제였습니다. 혁명을 통해 사회 구조를 한꺼번에 바꾸려 들고,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듯한 경우도 있었지만, 세상을 참으로 변화시키는 길이 거기에 있지 않음을 결국 인정하고 손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에게서 우리는 그 답을 찾습니다. 마음속에 독기와 증오를 품고 폭력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리며, 그들이 속한 집단을 무너뜨리는 길과는 정 반대 편에 그 답이 있습니다. 무기를 들고 있었다면 그것을 내려놓고, 주먹을 쥐고 있었다면 그것을 풀고, 온 몸에 힘을 주고 있었다면 그것을 빼고, 그렇게 해서 철저히 무력한 존재가 되는 데에 세상을 바꾸는 길이 있습니다. 한 겨울 어둔 밤에 외양간에서 구유를 요람삼아 누워있는 아기는 세상을 구하러 오신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거기에는 한 가지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힘입니다. 그런 모습 앞에서는 누구나 무엇을 해 주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됩니다. 짐승들마저 입김으로 추위에 떨고 있는 갓난아기의 몸을 녹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오셨던 분은 또 그런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예수께서 최후를 맞이하시는 장면에서 참으로 세상을 바꾸는 힘을 찾아냈습니다. 그분 가장 가까이에서 삶을 나누었던 한 사람은 그 힘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 16).       
태양은 빛 말고도 열을 또 줍니다. 빛은 걸어야 할 길을 밝혀주고, 열은 그 길을 따라 실제로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토로하셨습니다.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성령께서는 무엇보다도 마음을 움직여 주시는 분, 사랑, 은총이십니다. 말씀, 진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자칫 인간을 끝없는 시비논쟁 속으로  빠져들게 할 위험마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슴속에 불타고 있던 사랑, 그 성령을 받을 때까지 제자들은 속 깊이 변화되지 못한 채 남아있었습니다. 그 성령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내 쉬시면서 건네주셨습니다. 요한은 그 장면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영을 건네주셨다.”(요한 19,30의 시역)
그렇게 해서 영을 건네받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때, 십자가 아래에 있던 제자는 우주만물의 원리, 그 궁극적 비밀을 또한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그에게 이제 하느님은 저 까마득한 하늘 어디쯤에 계신 분이 아니고, 영웅적 수행을 거쳐서나 간신히 흘끗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아주 가까운 곳, 겉으로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사랑의 행위 속에 계신 분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6)
이 위대한 진리를 터득한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 앞에 내놓는 처방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인류 역사에서 이 진리를 실천한 사람들만큼 세상을 실제로 변화시킨 경우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적어도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어려운 변화는 자기 자신을 바꾸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한 치라도 들어 올리는 것은 세상을 들어 올리는 것”(러 쇠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바꿨으면 세상은 이미 바뀌었습니다. 딱딱한 돌길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온 천하의 길을 다 양탄자로 덮을 필요는 없습니다. 양탄자의 한 조각을 자기 신발에 깔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가 끝은 아닙니다. 그러나 출발점은 분명히 거기입니다. 자기 자신의 변화 없이 세상을 바꾸려드는 것은 폭력으로 세상을 바꾸려했던 마르크시즘의 실수를 거듭하는 일일 뿐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히 따랐던 분 가운데 하나인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기억합니다.

주님,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