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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도 사목교서 -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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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아버지의 해를 맞이하여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신부님들과 수도자 여러분!
2000년 대희년을 향해 가는 우리의 여정이 이제 그 문턱에 접어들었습니다. 온 세계에 걸쳐서 우리 신앙인들이 준비하고 기다려온 대희년이 1999년 12월 24일 성탄 전야에 개막되어 2000년 1월 6일 주님의 공현대축에 폐막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금년을 <하느님 아버지의 해>로 지내면서 대희년 맞이 준비를 마무리할 것입니다.


1. 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서 <제삼천년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해의 목표를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표현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올해의 목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마태 5,45)의 눈으로 세상 만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모든 신앙인들이 그 시야를 넓고 깊게 하는 데에 있다”(49항). 그런데 그리스도야말로 바로 그런 눈으로 세상 만사, 특히 당신 삶을 바라보시고 그에 걸맞게 사신 분이었으며, 그 사실은 이 한 말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 돌아 간다”(요한 16,28).


“많은 형제 중에서 맏이가 되신”(로마 8,29)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므로, 그분의 형제자매인 우리도 똑같이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를 지어내신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잠시 세상에 살다가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 가고 있는 중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처럼 만물의 근원이시며 창조자이신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다시 본래의 자리인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실제의 삶에서 우리는 흔히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잊고 지냅니다.


2. “잃었던 아들의 비유”(루가 15,11-24)는 그런 점에서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른 채 그날그날의 관심사에만 파묻혀 사는 모든 인간을 표상하는 그 젊은이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면서도, 가지고 온 돈이 남아 있는 동안은 두고 온 고향을 까맣게 잊은 채, 방탕한 삶에 몸을 맡겼습니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고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겹쳐서 알거지가 되어, 돼지 밥으로나마 주린 배를 채우지 않을 수 없는 신세가 되었을 때에 그의 정신이 깨이기 시작했습니다.


렇게 해서 그는 몸을 돌려 아버지 집을 향해 걸었고, 아버지는 멀찍이에서 그를 알아보고 마주 달려와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하였습니다. 아들이 잘못을 고백했을 때, 아버지는 그를 제일 좋은 것들로 치장해 준 다음 성대한 잔치를 베풀며 말했습니다.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수께서 들려 주신 이 비유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보여줍니다. 한 없는 자비와 사랑을 가진 아버지이심을 더 없이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비유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인간의 처지보다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에 더 큰 뜻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1요한 4,8.16) 라는 요한의 깨달음은 하느님께서 아버지시라는 말의 깊은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해는 사랑이라고 하는 대신덕(對神德)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는 한 해이기도 합니다(제삼천년기 50항 참조).


런데 이런 깨달음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25년간이나 수도의 삶을 산 다음에야 하느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홀연히 깨닫고 그 때 얻은 기쁨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잃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분은 사제생활을 수십년 동안 한 다음에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고 술회했습니다. 비유 속의 작은 아들은 자기 몫으로 돌아온 재산은 물론, 명예와 체면까지 모두 잃고 마지막으로는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 깨달음의 빛이 비쳐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이 그 때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돌아갔다”(공동번역에서는 “제 정신이 들었다”고 옮겼음)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돌아갔다면, 그 이전에는 그가 자신에게서 떠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제 정신을 잃고 살았던 것입니다.


3. 런데 우리는 지금 구제금융시대라는 표현이 잘 말해주는 것처럼, 너무나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경제적 한파 속에서 온 나라가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은 가장, 서슴 없이 막노동판에 뛰어든 사장, 생활비를 반으로 뚝 잘라 허리띠를 졸라맬 대로 졸라매는 주부 등은 그 몇 예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은 당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나라와 사회 전체의 삶에서도 이른바 거품이 빠져 나가고, 사람들의 정신 역시 뜬 구름 속을 헤메는 듯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현실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은, 탕자의 경우처럼, 우리 각자와 온 사회가 잃었던 분수를 되찾고 환상과 허위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참 모습으로 돌아가는” 기회로 바꾸어 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보다 더욱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마음을 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요한 것은 어떤 길을 통해서든지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을 먼저 걷지 않는 한, 참으로 아버지께 돌아가기는 불가능합니다. 몸으로는 아버지를 결코 떠난 일이 없이 늘 함께 있었다 해도 그것은 실상 별 의미가 없습니다. 큰 아들의 경우가 그것을 잘 말해줍니다.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당신의 아들> (공동번역성서는 <동생>이라고 번역하였음)이 돌아 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주시다니요!”


아들은 돌아온 동생을 가리키며 아버지를 향해 “당신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에게는 누더기 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과 형제 관계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형제일 수 없는 것은, 그에 앞서 그들 사이를 맺어주어야 할 분이 그의 마음 속 깊이에서는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는 그동안 몸으로는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실상은 “종이나 다름없이” 일했을뿐, 참된 아들로 살아온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리는 여기서 돌아온 젊은이를 앞에 두고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길과 큰 아들의 눈길 사이에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지를 봅니다. 그것은 마치 “부자와 거지 라자로”(루가 16,19-31)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거리만큼이나 큰 것이었습니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 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 오지도 못한다”(루가 16,26). 큰 아들이 이 거리를 좁혀서 아버지처럼 형제에게 달려 가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의 눈길로 그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 만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그 시야를 넓고 깊게 해야”(제삼천년기 49항) 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와 더불어 동생의 귀환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함께 잔치를 벌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1요한 5,1) 하신 요한의 말씀대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의 자녀인 인간에 대한 사랑은 떼어놓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래서 이 이야기는 형제관계를 거부하며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당신의 아들” 이라고 쏘아대는 큰 아들의 표현을 고쳐주며, 그가 바로 “형제” 임을 일깨워주는 아버지의 말로 끝을 맺습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형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버지의 이 말씀에 큰 아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에 관해서는 이 비유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누가 보나 드러나게 아버지 집을 떠났던 사람은 회개도 단순하고 분명한데 비해, 겉으로 보기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그것이 한층 더 복잡하고 어렵다는 점입니다.


4. 리가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라면 십중팔구 우리는 맏아들입니다. 내가 사목자로서 직무에 따른 권위를 봉사의 기회가 아니라 그 반대로 사용했다든지, 자신의 취미생활에 지나친 시간과 힘을 쏟고 있다면, 나는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고 있었지만, 실상은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 산 셈입니다. 내가 수도자로서 살면서도 선택한 복음삼덕의 길이 자유보다는 짐으로 느껴져 쉽게 인간적 경향으로 기울고 따라서 영혼 깊이에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아직도 노예에 불과합니다. 내가 신자로서 주일 미사에는 꼭꼭 참석하고 최소한의 의무도 게을리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을 쉽게 비판하고 불우한 이들에 별 관심이 없다면, 나는 하느님의 아들 딸이 아니라 종에 불과합니다.


렇다면, 우리는 둘째 아들 못지 않게, 아버지 집을 향해 뻗쳐 있는 먼 회개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님께서는 아버지의 해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셋째 해에는 누구나 자신이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여정’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간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 굳게 매달려 진정한 회개의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제삼천년기 제50항). 그런데 참된 회개의 여정을 가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의 삶이 무언가 잘못되었거나 적어도 부족하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비유 속의 큰 아들은 바로 이 점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극히 정상적이고 나무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하는 그의 말 속에는 당당함마져 엿보입니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 버린” 동생에 비하면, 그가 스스로 아무 나무랄 데가 없다고 생각함직도 합니다.


5. 러나 우리가 눈을 돌려, <참된 아들>, 말하자면 <아들의 원형>을 바라보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아버지의 마음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게 됩니다. 그 <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이분에게서 아들의 참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이 아들을 통해서만 우리는 아버지를 참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마태 11,27).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정확히 알고 그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아는 것. 이 둘은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 우리의 구원은 바로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아들 노릇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들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까? 앞에서 묵상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무엇보다도 당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분명히 의식하시고 당신의 그 기원과 목적지가 바로 아버지이심을 한 순간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을 따라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 돌아 간다”(요한 16,28)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막연히 흘러가는 부평초나 정처없이 떠 다니는 구름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떠나왔다가 다시 돌아갈 고향이 분명히 있으며, 하루를 살아도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아버지 집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때에만 그 삶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수께서는 아버지를 향해 가시는 길에 어떤 장애가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그 길을 꿋꿋이 걸어 가셨습니다. 복음선포 길에 나선 후 맨 먼저 나자렛 회당에서 당신의 사명을 밝히셨을 때, 사람들은 처음에 그분을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루가 4,21)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모두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루가 4, 29)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칭찬>, 그들의 <비난과 박해>, 그 어느 것에도 잡히지 않고 “그들의 한 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루가 4,30)고 루가복음사가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점점 가까이 다가 오고 온갖 위협이 그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나는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루가 13,33).


수께서는 또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아버지께서 무한한 사랑과 지혜로 만사를 잘 이끌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더할 수 없는 신뢰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데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납니다. 혹독한 고통 끝에 죽음을 당하실 것을 내다 보시면서 아버지께 드리신 기도는 그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아빠, 아버지(공동번역성서에서는 ‘아버지, 나의 아버지’라고 번역하였음)!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 14,36). 실제로 일이 당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진행되었을 때, 그분께서는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뜻에 모든 것을 다 맡기셨습니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46).


6. 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유명한 <산상설교>(마태 5-7장)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주의 기도>는 몇 마디 안되는 말 속에 이를 다시 응축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깊은 의미를 정확히 깨닫는다면 우리는 실상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을 이해하는 셈이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말의 자연스런 표현 방식을 따라 이렇게 번역했지만 성서원문의 순서는 이와 정확히 반대임을 기억하는 것이 그 깊은 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 <아버지> <우리> <하늘에 계신>” 이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본래의 순서를 따라 묵상해 봅시다.


<아버지!>
첫 마디에서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하느님을 향해 마음 속 깊이에서부터 이 한 마디를 외치는 순간, 한 사람의 존재가 바뀌고, 그를 둘러싸고 있던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는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고, 세상에 살면서 느꼈던 두려움에서도 벗어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가장 혹독한 고통을 앞두고 예수께서 하느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마르 14,36)라고 부르셨을 때 그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깨닫고 실제로 그렇게 부를 때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희생하시어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후 미리 약속하셨던 대로 성령을 보내주셨을 때, 사람들은 일체의 공포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 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4-15).


<우리>
수께서는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신 것은, 같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 사이가 형제자매 사이임을 늘 잊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러시아 사람, 중국 사람, 일본 사람, 이북 사람, 아랍 사람, 미국 사람, 유럽 사람, 아프리카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돈많은 자본가도, 그 회사에서 일하는 말단 공원도, 출세한 사람도, 걸인도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이나 그리이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갈라 3,28)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버지와 어머니는 한 아기가 태어나게 하는 데 있어서뿐 아니라, 일단 이 세상에 나온 다음에도 그 아기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겉 모양부터 부모를 닮고 나온 아기는 양육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에 따라 아주 훌륭한 인격자로 성장할 수도 있고 정 반대로 되고 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부모가 아무리 그 역할을 잘 한다 해도 거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데가 있습니다. 특히 근래의 부모들은 달라진 생활 여건 때문에도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이 세상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비하면 아버지라고 할 수도 없을만큼 부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마태 23,9).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느님께서 참된 아버지, 아빠이시라는 사실을 신앙인들이 깊이 깨닫고 사람들 사이에서 그에 걸맞게 살아갈 때, 그분의 이름이 빛나게 됩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요한 15,8). 사람들은 하느님을 인정하고 종교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흔히 그 하느님이 아버지이심을 실제로 깨닫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의 손길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이 전달되면 그들은 비로소 그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마르 1,15). 예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의 복음 선포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란 하느님의 활동 전체를 가리킵니다. 예수께서는 말하자면 악령의 세력에 사로잡혀 그의 뜻대로 움직이던 세상을, 하느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삶 전체는 그런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 뜻에서 그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면 그것은 그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될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이 참으로 어떤 분인지를 사람들이 알고, 그분이 무엇을 하시며 우리는 그분을 따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아 그대로 실천할 때, 그분의 뜻은 땅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은 서로 뗄 수 없이 붙어 있어서 어떻게 보면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기서부터는 “저희(우리)”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아버지는 한 가정 안에서 딸린 자식들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챙겨 줄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면, 우리는 당연히 그분께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여기서 양식은 우리 입으로 먹어야 할 음식에서부터 물질생활 전반을 위해 필요한 것, 나아가 빵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인간으로서 필요한 정신적 양식까지를 모두 뜻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기는 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웃을 형제 자매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게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럿이 모여 사는 곳에서 가장 큰 고통은 흔히 다른 사람에게서 옵니다. 성처는 상처를 만들어, 삶은 형제끼리의 공동체라기 보다는 자칫 서로 할퀴고 물어뜯는 지옥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말했습니다. “지옥, 그것은 다른 사람이다.” 그렇다고 하여 사람들을 피해 혼자 도망치면, 거기에서는 더욱 철저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작은 아들의 경우가 그것을 잘 말해 줍니다.


렇다면 천국으로 통하는 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데에 있습니다. 다른 이 안에 지옥이 있다면, 천국도 거기에 있습니다.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받아들일 때, 상대방은 천국이 되고,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는 똑 같은 사람이 지옥으로 바뀝니다. 그런 뜻에서, 용서할 때 사람은 지옥을 천국으로 만들고, “악마의 자식”(요한 8,44)의 처지에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갈라 4,6) 자녀의 처지로 건너갑니다. 하느님은 먼저 우리를 용서해 주시지만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마음 속 깊이에서 용서해 줄 때에만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 안에서 실제적인 힘을 띠게 됩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수께서도 유혹에 맞서 싸우셨고, 특히 공생활의 시작과 끝에 가장 거센 저항을 받으셨는데,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유혹은 본질적으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잃고 그분의 나라에 대한 신념을 저버리게 하는 데에 그 특성이 있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작은 씨앗(마르 4,30-32)에 불과하여 잘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환상이나 착각일 뿐이라고 판단하여 절망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심, 절망, 환멸의 단계를 거쳐 만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시각으로 굳어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현세에서는 아주 작은 씨앗처럼 잘 보이지도 않지만, 그것은 반드시 큰 나무로 자라나고 온 창조계를 그 안에 포용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굳건히 지켜야 하겠습니다.


<악에서 구하소서>
수께서 세우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악의 세력을 쳐부순 자리에 건설됩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던 악마를 물리친 다음에만 하느님의 나라가 자리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의 삶은 “하느님 나라”를 한 진영으로 하고 “악령과 죄와 죽음”의 지배를 다른 진영으로 하는 대결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투쟁이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인간적이거나 현세적인 상대방만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는 속아 넘어가기 쉽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올가미에 걸려들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그래야 악한 무리가 공격해 올 때에 그들을 대항하여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에페 6,12-13).


7. 당 사목회에서 한 분야를 책임지고 수년간 일을 하신 어떤 자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 저런 경우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관련되는 분들을 모아놓고 부탁을 하면 거의 예외 없이 말씀들을 하십니다. ‘예, 알았습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각자 제 잘난 맛에 산다는 말 그대로,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똑똑한 체하고 자기가 올라가기 위해서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일이 많은데, 성당에서 교우님들은 모두들 겸손하시고 좋은 일이면 저 같은 사람의 말에도 잘 따르십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속으로 얼마나 놀랍고 큰 감동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이런 모습은 여기에서만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로 이것입니다. 이런 일이 점점 더 널리 퍼져 나간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그만큼 더 실현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겉으로는 작게 보이지만, 실상 이런 모습은 우리가 타고난 이기심을 눌러 이기고 자기 중심적인 방향으로 달리게 하는 힘, 곧 악의 세력을 쳐 이길 때에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 사이에 정의가 조금 더 이루어지고 평화와 기쁨이 실현된다면, 그 때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만큼 더 우리 앞에 다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흔히 작고 눈에 띠지 않는 모양으로 시작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심어 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만큼 된다”(마르 4,30-32).


8. 느님의 나라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 교구가 그동안 몇 차례의 논의를 거쳐서 확정한 방향에 따라, 우리는 <세상의 복음화>에 초점을 맞추어 대희년 맞이 준비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한데, 그 첫 번째가 “나부터 새롭게”라는 표어 그대로, 각자 자신의 쇄신을 위해 노력하는 일입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대희년의 기쁨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활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렇게 하는 데에는 1998년 10월 15일, 한국 주교단이 반포한 “새날 새삶” 운동의 기본 지침이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새날 새삶” 운동은 ‘나부터 새롭게’, ‘참된 가정 이루기’, ‘좋은 이웃 되어주기’, ‘함께 가요, 우리’의 순으로, 우리 각 개인의 쇄신에서부터 주변 사회의 변화까지를 목표로 하여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9. 애하는 교우 여러분, 수도자와 성직자 여러분,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 오던 대희년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이제 한 해밖에 남아 있지 않은 지금, 이 기회를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그 뜻깊은 해가 우리 각자와 공동체 그리고 우리 사회에 참으로 새로운 기쁨과 희망을 주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힘을 다 합시다.


 

1998년 대림 첫주일에
천주교 전주교구장 이 병 호(빈첸시오)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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