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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문화 순례] 호남교회사연구소 문서고 (5·끝)[가톨릭신문 201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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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6-02-18 조회 3,39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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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문화 순례] 호남교회사연구소 문서고 (5·끝)

中 공산당 박해 맞선 눈물겨운 선교사제의 기록
발행일 : 2015-11-22 [제2970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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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지린성당에서 중국 리쉐쏭 주교와 함께한 임복만 신부(왼쪽).
100여 년 가까이 박해를 겪은 한국천주교회는 일제강점기와 분단의 아픔을 겪으면서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었다. 「둥베이는 말한다」라는 책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국으로 파견된 한국인 사제 세 분, 즉 김선영 요셉 신부, 임복만 바오로 신부, 양세환 비오 신부의 삶을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호남교회사연구소 문서고에는 임복만 신부와 관련된 유품이 다수 소장돼 있다.

임 신부는 1910년 전북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일곱 성인이 살던 곳과 가까운 곳이다. 1935년 전주교구 사제로 서품된 후, 나바위본당, 군산본당을 거쳐 1940년 되재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다가 1942년 만주지역 선교사로 파견됐다. 먼저 길림성 장춘에 가서 교구장 고 주교(프랑스인)의 지도로 중국말을 배운 후, 흑룡강성 해륜현 해북진본당 관할 선목촌 조선인 성당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1945년 8월 초, 해륜의 구류소로 끌려가게 됐다. 일본은 패망하기 전에 프랑스 신부들과 임 신부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일본이 패망하자 풀려나게 돼 선목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얼마간은 무정부 상태였는데, 비적들이 총을 쏘며 쳐들어오자, 선목촌 신자들이 피난하기 시작했다. 임 신부도 할 수 없이 피난길에 올랐다. 그리고 장춘에서 고 주교를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고 주교가 임 신부에게 물었다. “지금 해북진과 기타 지방에 조선 교우들이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흑룡강성만해도 300~400명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착한 목자로서 불쌍한 양떼를 버리고 갈 수 있습니까?” 임 신부는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났다. “예, 그렇습니다. 양들을 위해 남아 있겠습니다.” 그렇게 양들을 위해 남은 것이 길고 긴 고난의 시작이었다.

1946년 공산당이 들어왔고, 토지개혁이 시작됐다. 1947년에는 공산당에 협조할 것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시련의 시간이 닥쳐왔다. 이때 두려움에 떠는 교우들에게 임 신부는 “우리 교우들이여, 놀라지 말고 용감합시다. 천주께서 주시는 보속을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며 예수님을 본받아 설혹 죽임을 당하더라도 예수님과 같이 잘 참을 수 있는 인내지덕을 구합시다”라고 격려했다. 얼마 후 임 신부는 교우가 하나도 없는 남쪽 몽고묘 근처로 보내지게 됐는데, 이때도 울며 애통해 하는 노인에게 “노인 어른, 울지 마세요. 눈물을 거두고 용감히 전진합시다. 천주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어찌 우리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용감한 마음으로 지고 갑시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14처를 지나서야 영광을 누리셨는데, 우리는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아직 1처도 지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 용기를 내십시오”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1951년부터는 종교혁신운동이 시작됐다. 혁신운동은 삼자(三自)운동인데, 한마디로 로마 교황청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임 신부는 이를 반대했고 그래서 1962년까지 약 8년간 감옥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로는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져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고, 1963년 농장을 탈출해서는 동포신자 집에서 은신하며 비밀리에 사목해야 했다. 그러다가 1968년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체포돼 갇혀 있다가 1969년에 석방돼 다시 개조농장으로 보내졌다. 이후 1980년 등소평이 집권한 후로 얼마간 종교활동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 때문에 가톨릭에 대한 감시의 눈을 늦추지 않았던 공안당국은 1983년 73세의 임 신부를 다시 체포해 옥살이를 하게 했다.

전주교구에서는 연락이 끊긴 임 신부의 생사를 몰라 걱정하고 있던 차에,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과 103위 시성식에 참석한 조선족 신자들이 소식을 전해와 생존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여러 차례 귀국할 것을 권유했지만, 임 신부는 양 떼를 두고 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다 1991년 임 신부에게 병환이 생겨 이제는 양 떼를 보살필 수 없고 오히려 폐만 끼치게 됐다고 하며 귀국할 의사를 보였다. 결국 1992년 12월 그리운 고국 땅에 돌아왔고 고국에 돌아온 지 1년 만인 1994년 하느님 품에 안겼다. 향년 86세였다.

장례미사에서 이병호 주교는 “하느님은 임복만 신부님을 통해 한국교회와 전주교구를 위해 살아 있는 순교자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게 해주셨다”며 진복팔단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분이라고 말했다. 조선시대의 모든 순교자들이 그러했듯 임 신부 역시 순교자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권력에 반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자의 삶을 산 것이다.

호남교회사연구소에는 임 신부의 소중한 삶의 기록들인 일기장과 편지, 유품 등이 보관되어 있다. 임 신부의 유품은 성베네딕도회 김상진 스테파노 신부를 통해 전해지기도 했다. 이 유품들 중에는 비밀리 사목하기 위해 필사한 기도문과 성가, 손수 만들어 나눠주던 묵주도 있다. 이 유품을 보고 있노라면 박해시대 신자들이 살았던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문의 010-6689-2070 호남교회사연구소장 이영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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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에서 순교자적 삶을 실천한 임복만 신부가 직접 묵주를 만들던 열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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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복만 신부가 중국에서 사목하며 노트에 필사한 기도문과 성가.
이영춘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
사진 호남교회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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