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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첫 순교자 유해 발굴2[가톨릭신문 202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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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1-09-09 조회 1,46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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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첫 순교자 유해 발굴] 세 복자는 누구인가

윤지충 - 참수 직전까지 당당히 교리 설파
권상연 - “예수, 마리아” 부르며 칼날 받아
윤지헌 - “천당 이치 믿어 국법 안 두려워”

발행일2021-09-12 [제3261호, 11면]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2014년 발표한 124위 복자 개별 초상화 중 (왼쪽부터)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 복자 초상화.

유해가 발견된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 복자 윤지충(바오로)과 복자 권상연(야고보),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윤지헌(프란치스코)은 누구일까.


■ 윤지충과 권상연 복자

복자 윤지충과 복자 권상연은 전주에서 1791년 신해박해로 순교한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들이다.

윤지충은 1759년 전라도 진산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품행이 단정했을 뿐 아니라 학문에도 정진해 1783년에는 진사 시험에 합격한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윤지충은 고종사촌인 정약용(요한)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이후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3년에 걸쳐 교리를 공부했다. 마침내 1787년 이승훈(베드로)을 찾아가 입교했다. 이후 윤지충은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에게도 신앙을 전했을 뿐 아니라, 인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자주 왕래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썼다.

윤지충의 사촌인 권상연도 윤지충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했다. 특히 두 복자는 1790년 중국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집안의 신주를 불살랐다. 이듬해엔 윤지충의 어머니가 선종하자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천주교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두 복자가 신주를 불태우고 유교식 제사를 하지 않았다는 소문은 조정에까지 퍼졌고, 두 복자에 대한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윤지충과 권상연은 각각 충청도 광천과 한산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진산군수가 그들 대신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한 소식을 듣고 즉시 관아에 나와 자수했다.

진산군수는 여러 차례에 걸쳐 두 복자에게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했다. 하지만 두 복자는 천주교가 진리라고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진산군수는 회유를 포기하고, 두 복자를 전주 감영으로 보냈다.

두 복자가 전주에 도착하자 전라감사는 이들에게서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알아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다. 그러나 복자들은 교회나 신자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오히려 윤지충은 천주교 교리에 대해 설명하면서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화가 난 감사는 두 복자에게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두 복자는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함에도 불구하고 신음소리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전라감사가 문초 끝에 조정에 보고서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두 복자를 처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만 갔다. 결국 임금은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형을 허락했다.

마침내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1791년 12월 8일 두 복자는 전주 남문 밖으로 끌려갔다. 이때 윤지충은 마치 잔치에 가는 사람인 양 즐거운 표정으로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설명했다. 권상연은 모진 형벌로 이미 초주검 상태였지만 “예수, 마리아”를 읊조리고 있었다. 형장에 도착하자 윤지충이 먼저, 이어 권상연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칼날을 받았다. 당시 윤지충의 나이는 32세, 권상연의 나이는 40세였다. 이번 발견된 윤지충의 유해에도 참수의 흔적이 남아 있다.

복자들의 친척들은 순교한 지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시신을 수습하러 간 사람들은 두 복자의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흘린 것처럼 선명해 매우 놀랐다. 이후 신자들이 여러 장의 손수건에 순교자의 피를 적셨는데, 당시 죽어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 신유박해 순교자 윤지헌 복자

윤지헌은 윤지충의 동생으로, 1764년 전라도 진산에서 태어났다. 형 윤지충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윤지헌은 1791년 형의 순교로 더 이상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윤지헌은 가족들을 데리고 진산을 떠나 전라도 고산의 운동(현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으로 이주했다.

윤지헌은 교회 서적을 필사해 읽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또 자신의 이름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곤 했다. 1795년 복자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이후 교회의 밀사를 중국에 파견하는 일에 동참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윤지헌의 활동은 관청에 알려졌고, 결국 동료들과 함께 체포됐다. 윤지헌은 수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이미 드러난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윤지헌은 그저 “평소에 좋아하던 천주교 교리를 끊지 못했고, 고질병처럼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오로지 만 번 죽겠다는 말씀만 드릴 수밖에 없다”며 “천당 지옥의 이치를 굳게 믿은 탓에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고 말할 뿐이었다.

당시 조정은 교회 밀사가 중국을 왕래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이유를 알아내려 하고 있었다. 이에 조정은 윤지헌과 동료들을 한양으로 압송했다. 윤지헌은 포도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또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그의 신앙고백은 여전했다. 이윽고 의금부에서 마지막 문초를 받은 윤지헌은 자신의 사형선고문에 서명했다.

윤지헌은 다시 전주로 이송돼 1801년 10월 24일 최대 극형인 능지처참으로 순교했다. 당시 윤지헌의 나이는 37세였다. 윤지헌의 유해에는 둘째 목뼈와 양쪽 위팔뼈, 왼쪽 넙다리뼈에서 사망 무렵 생긴 골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윤지헌의 순교 뒤 고산에 갇혀 있던 아내와 가족들은 모두 유배됐다.



◆ 유해 발견된 바우배기는…

유항검 생가터이자 복음 가르치던 곳
 

세 복자의 유해가 발견된 전북 완주군 바우배기 발굴 현장.


바우배기(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169-17)는 복자 유항검 일가의 원 묘지터로 알려진 곳이다.

유항검은 ‘호남의 사도’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호남지역 복음화에 앞장선 인물로, 순교 후 바우배기에 묻혔다가 1914년 전주 치명자산성지로 이장됐다.

초남이성지 초대 담당 김환철 신부는 호남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김진소 신부의 저술을 통해 바우배기에 대해 알고, 주민 증언 등을 바탕으로 교회사 속 바우배기로 추정되는 장소를 찾아 십자고상을 세우고 그곳에 낮게 만들어져 있던 봉분도 높였다.

현 초남이성지 담당 김성봉 신부는 지난 3월 11일 바로 이 바우배기에서 윤지충·권상연·윤지헌의 유해를 발견했다. 바우배기에서 약 1㎞ 거리에 있는 초남이성지는 유항검의 생가터이자 유항검이 복음을 가르치던 교리당이 자리했던 곳이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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