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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충 권상연 묘에서 나온 사발 지석 글씨는 정말 다산의 필적일까[가톨릭신문 202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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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1-10-27 조회 1,62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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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충·권상연 묘에서 나온 사발 지석 글씨는 정말 다산의 필적일까?

은밀했던 시신 이장… 위험천만한 일에 다산 관여했을까

■ 정민 교수 의견
사발 지석 글씨, 다산 것과 일치
붓질 습관과 구성 특징에서 확신
다산이 광주 분원서 쓰고 구워 전주 유항검에게 내려보냈을 것
천주교가 제사 금하는 이유에서 관련 문제 나오자 백지로 제출
제사 때문에 배교? 앞뒤 안 맞아
■ 서종태 원장 의견
다산 글씨와 불일치 주장 학자도
사발 지석에 순교자 세례명 노출
타 지역서 보내는 건 위험한 일 이장한 사람들 중에서 적었을 것
당시 다산은 요직 맡아 승승장구 금령 어기는 일 감행할 이유 없어
“천주교에서 마음 끊어” 기록도

발행일2021-10-24 [제3266호, 8면] 

 

본지 10월 17일자 7면에 게재된 정민 교수(베르나르도·한양대학교 국문과)의 기고 ‘윤지충·권상연 묘에서 나온 사발 글씨는 다산의 필적’에 관해 서종태(스테파노) 해미국제성지 신앙문화연구원장이 다른 의견의 글을 보내왔다. 서 원장의 기고문을 싣는다.



지난 9월 24일, 1791년과 1801년에 각각 순교한 복자 윤지충·권상연과 윤지헌의 유해 발굴 보고서가 일반에 공개됐다. 이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윤지충과 권상연의 묘에서 매장된 사람의 인적 사항, 무덤의 소재, 이장한 시기 등이 적혀 있는 사발 지석이 나왔다. 이를 통해 1791년 11월 12일 처형된 직후에 두 순교자의 유해가 수습돼 매장됐다가 약 1년 뒤인 1792년 10월 12일 유항검의 선산에 이장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한 윤지헌의 묘에서 나온 백자제기접시 두 점에는 지문(誌文)이 없는데, 그중 하나의 윗면 중앙에 청화 안료로 그린 원 안에 ‘祭’(제)자가 표기돼 있다.

그런데 다산 정약용의 친필 글씨를 10여 년간 연구해 온 정민 교수(한양대 국문과)는 보고서를 통해 두 사발 지석에 적힌 글씨를 보고 ‘가톨릭평화신문’(10월 10일)·‘조선일보’(10월 11일)·‘가톨릭신문’(10월 17일)에 잇달아 그 글씨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즉, 두 사발 지석의 글씨 47자를 한 자씩 잘라 표를 만들고 그 아래 칸에 다산의 각종 친필 글씨에서 같은 글자를 찾아 채워 비교해 본 결과 두 사발 지석의 글씨는 대부분 다산의 특징적 필체와 일치하고 붓질의 습관과 구성의 특징도 일치한다고 확신하게 됐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두 사발 지석의 글씨는 다산이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1주기를 맞아 당시 전주 교회의 지도자인 유항검 형제가 두 순교자 유해의 이장을 전체 교회 차원의 행사로 준비해 진행한 점, 다산은 윤지충과 사촌 간이고 또한 그를 입교시킨 장본인으로 그의 죽음에 대한 부채감이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두 사발 지석의 글씨를 다산이 써서 광주 분원에서 구워 전주 유항검에게 내려 보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정민 교수의 주장은 당시 유항검이나 교회가 처한 상황과 잘 맞지 않는다. 1791년 윤지충이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치른 진산사건은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에 그치지 않고 공서파 홍낙안 등이 이를 정치 문제로 확대시켜 그 여파가 다른 지방까지 미쳐 서울·경기도·충청도에서도 박해가 대거 벌어져 그 여진이 1793년까지 이어졌다.
 

복자 윤지충(위)과 권상연의 묘에서 발굴된 백자사발 지석. 매장된 사람의 인적 사항과 무덤 소재 등이 적혀 있다.

또한 정부는 천주교 전파를 막기 위해 홍문관에 소장돼 있던 서학서를 모두 소각했다. 아울러 각 도에 천주교 서적을 은닉하고 있는 자들에게 자수령을 내리도록 하고, 20일간의 기한을 주어 자수하는 자는 죄를 묻지 않겠지만 은닉한 자는 법대로 처리하겠으며, 감사와 수령도 연좌형을 면치 못하리라고 했다.

그러자 김제에 사는 한영필은 유항검의 집에서 빌려온 두 권의 책을 김제 군수에게 갖다 바쳤다. 그리고 유항검은 윤지충이 처형되자 잠시 피신했는데, 그 틈을 타 당질인 유중태는 유항검이 필사한 천주교 서적 3권을 전주 감영에 바쳐, 그의 피신 생활은 1792년 6월까지 계속됐다. 그래서 두 순교자의 시신이 효수된 뒤 9일째 되던 날 임금은 그들 가족에게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허락했지만, 유항검은 그들 시신을 수습해 매장하는 일에 나설 수 없었다.

또한 진산사건의 여파로 진산군은 5년 동안 현으로 강등됐고, 군수 신사원은 삭탈관직돼 유배됐다. 게다가 권상연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모시지 않은 일을 친족 권상희가 규탄하고, 윤지충이 순교한 뒤 그 친족들이 항렬자 ‘持’(지)자를 개명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임금에게 요청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의 가족들은 두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고향에 안장하지 못하고 가까운 용머리 고개에 매장했을 것이다.

그 후 7개월이 지난 1792년 7월 유항검은 감영에 자수하고 잘못을 뉘우치며 바른 데로 돌아오겠다고 맹세해 훈방됐다. 그는 책을 몇 권 수습해 집안에 숨겨두고 금구로 시험을 보러 갔는데, 이 틈을 타 당질인 유중태가 그 숨겨둔 책을 끄집어내 물과 섞어 덩어리로 만들고 말았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 지 1~3달밖에 되지 않은 10월 12일 과연 유항검이 두 순교자의 시신을 자신의 선산으로 이장하면서 순교 1주년을 기념해 교회 차원에서 그것도 전체 교회 차원에서 준비해 진행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도 은밀하게 두 순교자의 시신을 이장했을 것이다.

그러면 두 사발 지석은 어떻게 준비했을까. 정부의 지시로 윤지충과 권상연의 사형 소식을 전국에 게시한 마당에 윤지충·권상연의 성명·세례명이 노출된 사발 지석을 광주 분원에서 구워 보내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 그러한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윤지충의 입교를 도운 사람은 정약전이니 윤지충의 죽음에 대한 부채감을 정약용에 돌리는 것도 맞지 않는다. 유항검 가족묘에서 나온, 1914년에 제작된 접시 지석에도 윗면 중앙에 청화 안료로 그린 원 안에 ‘祭’(제)자가 표기돼 있으므로, 이러한 백자제기접시를 근거로 두 사발 지석이 광주 분원에서 제작됐다고 주장하는 것도 맞지 않는다. 이장이 은밀하게 이루어졌으므로 두 사발 지석은 이장을 주도한 유항검이나 그 가족들이나 가정교사 한정흠 중에서 누가 썼을 것이고, 제작은 옹기를 구워 생활하는 교우가 담당했을 것이다.

또한 당시 다산이 처한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1790년 10월 조상제사를 금지하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이 조선에 전해져 교회에서 조상제사를 금지한 데다 1791년 진산사건 이후로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지했다. 그런데 다산은 1789년 봄에 문과에 급제한 뒤 1790~1791년에 예문관 검열,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쳐 1792년 3월에 홍문관 수찬이 됐고, 4월에 부친이 사망해 상중에 있으면서도 정조의 명령으로 성을 쌓는 방법을 조목별로 밝혀 바치고 「도서집성」과 「기기도설」을 참고해 기증가도설 등을 작성해 바쳤다. 이처럼 정조의 총애를 받아 요직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던 다산이 1787년 반촌에서 교회서적을 강습한 일로 공서파들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나라의 금령을 어기고 두 사발 지석을 적어 광주 분원에서 구워 내려보내는 위험천만한 일을 감행했을 것 같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다산의 「자찬묘지명(광중본)」에 “1787년 이후로 4·5년 동안 매우 열심히 천주교에 마음을 기울였으나 1791년 진산사건 이후로 나라에서 천주교를 엄중히 금지하자 마침내 천주교에서 마음을 끊고 말았다”고 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내용이 실려 있는 「자찬묘지명(광중본)」은 1935년에야 세상에 공개된 ‘비본’(秘本) 묘지명 7편에 들어 있는 것으로, 진실의 기록이자 다산의 양심선언서다.

아울러 필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다산의 친필 글씨에 일가견이 있는 학자들 중에는 두 사발 지석의 글씨를 다산의 글씨로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다산 글씨뿐만 아니라 두 사발 지석 글씨를 썼을 가능성이 있는 유항검 등의 친필 글씨도 아울러 구해 대비해 볼 필요가 있다. 요컨대 여러 가능성을 열어 놓고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규명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서종태(스테파노) 전 전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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