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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 종소리 따라 퍼지는 순교 정신 신심 기리며 명백 이어가[가톨릭평화신문 202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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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2-18 조회 1,82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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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총탄 속 귓전에 울린 “요한아”

참전 생존자 고광렬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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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과의 격전 상황을 설명하는 고광렬 할아버지.


성당을 나와 지역 치안대장으로 참전해 부상을 입은 고광렬(요한, 96) 할아버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문 옆 ‘국가유공자의 집’이라는 푯말과 마당에 꾸며진 성모 동산이 공산 세력에 맞서 싸우며 신앙을 지킨 할아버지의 지난날을 말해주는 듯하다.  
 

 

고령인 탓에 고 할아버지의 말은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70년 전 일이다 보니 기억도 선명하지 않았다. 고 할아버지는 수류공동체가 겪은 아픔과 자신의 체험을 조금씩 풀어냈다.
 

“빨치산들이 성당에 불을 지르고 마을로 내려와 사람들을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쏴 죽였어요. 아무 죄 없는 성인과도 같은 사람들을 골라 죽인 거죠.”
 

빨치산에 맞서 지역을 지켰던 고 할아버지도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빨치산 때문에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까 외지에서 식량을 가져다 나눠줬어요. 빨치산이 있다는 산을 향해 총을 쐈더니 저를 향해 총알이 빗발치더군요.”
 

산에 숨어 치안군의 동태를 살피던 빨치산들에게 고 할아버지는 우선 제거 대상이었다. 하지만 치안군은 적이 어디서 총을 쏘는지도 볼 수 없었고 숫자도 적어 대응할 도리가 없었다. 총을 들고 어깨에 두른 탄띠가 출렁이게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뛰는데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더군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고 했는데 누군가 ‘요한아, 요한아’라고 부르는 소리에 좀 더 달려갈 수 있었어요.” 고 할아버지는 “결국 달리다 쓰러졌는데 금빛에 휩싸인 누군가가 나타나 손을 내밀면서 ‘요한아, 빨리 일어나 가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다”며 “당시 세례명을 잘 안 쓰고, 제 세례명을 부를 사람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겨우 일어난 고 할아버지는 계곡을 넘어 몸을 나무 사이에 숨기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계곡에 먼저 몸을 숨긴 대원이 피를 흘리는 고 할아버지의 이마에 붕대를 감아줘 급한 대로 치료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고 할아버지는 40일 이상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복귀했다. 지금도 이마와 관자놀이에는 그때 맞은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엑스레이 사진을 보면 얼굴에 쇠붙이가 있어 얼굴이 빛에 쌓인 것처럼 나옵니다. 의사들이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이마에 박힌 파편이 썩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 말이죠.”
 

고 할아버지의 딸 정아(데레사, 57)씨는 “아버지는 전쟁 전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분이 아니었다고 들었다”며 “지금도 자신에게 손을 내민 존재가 성모님이라고 굳게 믿으시며 지난 세월 수류본당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셨다”고 말했다. 고 할아버지는 지난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한 공로를 인정받아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에게 감사패를 받았다.
 

백영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