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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성월 특집> 잘 알려지지 않은 성지순례기

서천교, 초록바위, 전주옥터, 김제동헌,형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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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5-09-21 조회 2,68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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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교 : (전주시 완산구 서완산동1가351-1) 아침 일찍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묵상하면서 가까이 있어 지나쳐 버렸던 도보성지 순례를 시작하였다. 싸전다리를 지나 남부시장 천변의 새벽시장 풍경을 보았다. 햇볕이 따가웠지만 풀잎에 맺힌 이슬은 반짝이는 크리스탈 묵주알 처럼 아름다웠다. 물길을 따라 교각 밑을 걸으면서, 성 조윤호 베드로의 순교를 떠올렸다. 아버지와 자식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으므로 조윤호는 처형이 미뤄졌다. 서천교 밑에서 빌어먹던 거지들에게 성 조윤호 성인의 목을 감은 끈을 서로 조르게 하고, 거지들은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니며 거렁뱅이 짓을 하곤 했는데 이들의 시체가 하도 참혹해서 거지가 끌고 가면 누구든지 겁에 질려 밥을 주었다고 한다. 성 조윤호 가문은 3대가 순교하였다. 새벽시장의 많은 사람은 18세 조윤호 성인 순교 당시 구경꾼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의 가슴은 너무 아팠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초록바위 : (전주시 완산구 서서학동945번지) 빛깔이 푸르스름한 초록바위는 없고 절벽의 안전을 위해 설치한 회색 콘크리트 옹벽이 초록바위였다. 그곳이 성 남종삼 요한의 큰 아들 남명희와 이름을 알 수 없는 홍봉주 토마스의 아들이 처형될 때, 두 사람은 나이가 너무 어려 성인(15세)이 되는 이듬해까지 처형이 연기됐다. 나이기 차도 차마 목을 베어 죽일 수 없어 곤지산의 낭떠러지 초록바위 밑으로 전주천의 깊은 물에 떠밀어 죽였다. 순교자 홍(洪) 소년은 4대째 순교자였고, 남명희의 가문은 3대가 순교하였다. 지금은 도로가 생기고 주변이 많이 달라졌지만 5월이면 아카시아 향기와 꽃구름 같은 이팝나무 하얀 꽃들을 순교지 꽃향기이라 생각해 본다. 초록바위 밑으로 수장된 어린 2명의 순교자를 떠올리면서 갓 피지도 못한 어린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 하였다. 서천교와 초록바위는 도로변 차량들이 많아 성지를 스쳐 지나가기가 쉽다. 자전거도로 에 설치 된 모자이크 벽화와 표지석 만이 성지임을 알려 주고 있다. 

 

■ 전주 옥터 : 전주시 현무1길 20 (경원동 3가 14-2) 전주옥터를 가기 위해 지났던 풍남문, 전동성당엔 많은 순례객이 있었다. 동문예술거리를 지나 한국 전통문화 전당 후문 쪽 옥터를 찾았다. 박해 때마다 천주교 신자들로 가득 찼으며,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신앙을 증거하며 순교했다. 신유박해 때 유중철 요한, 유문석 요한, 정해박해 때 240여 명이 감금되어 문초를 받고 이때 이경언 바오로도 옥사 했다. 기해박해 때 순교자 중에는 정해박해 때 잡혀와 만 12년 동안 옥중에서 긴긴 세월을 보낸 이들도 있었다. 김조이, 심조이 옥사했고, 한국 천주교 순교 역사상 가장 어린 12세 이봉금은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도 진산에서 붙잡혀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전주옥에 있었다. 이들에게 옥은 고통스런 고난처지만 동시에 기도처이다. 옥중에서 밤마다 등불을 커놓고 함께 성경을 읽으며 큰소리로 기도를 드려고 그리스도 신앙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신앙을 증거하며 순교하였다. 안내판을 보며 순례객 없는 옥터에서 신앙의 선조들을 위해 기도하고 오늘 날 우리가 본 받아야 하는 순교자들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옥터의 자취는 없지만 그 순교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에 한국 전통문화 전당이 세워져 과거의 정신을 되새기게 되는 현장이다. 

 

■ 김제 동헌 : 김제시 동헌4길 46-1 (김제시 교동 7-3) 형장터 : 김제시 요촌5길 (김제시 요촌동 2가 14번지부근) 김제 고을의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에는 근민헌(백성을 가까이하는 집), 피금각(옷깃을 풀고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나눈다) 현판과 달리 건물들이 위압감을 주었다. 한정흠 스타니슬라오는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 태어나 유항검으로부터 천주교를 접하게 되고 세례를 받은후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유교식 제사를 폐지하기도 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고, 고향인 김제로 이송되어 며칠 후인 1801년 8월26일 장터에서 한정흠 스타니슬라오는 이곳 장터에서 45세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사형 선고문에는 “제사를 폐지하였으며, 천당으로 일찍 가지 못한 것을 오히려 한탄했다. 그는 죽음을 삶처럼 보았고 그릇된 도리로 많은 이를 유혹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죽음을 삶처럼 생각한 순교자의 굳센 믿음에서 참된 죽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를 바랄 뿐이다. 김제동헌과 100여 미터 떨어진 순교의 현장터는 현재 시장이 들어서 있고, 공영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고 그 어디 하나 순교터라는 흔한 표지석 하나 서 있지 않아 참담했다. 요촌성당 경규봉 신부는 “김제 동헌은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으로 김제시와 협조하여 (전라북도 유형문화제 제60호) 성지 순례객을 위한 표지석과 안내표지판을 제작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순교자성월엔 매번 순례는 했지만 내가 찾은 성지들은 알려진 유명한 성지를 찾아 관광을 하였고, 가까이 있어 지나쳐 버렸던 성지, 알려지지 않은 성지, 성인들은 어떻게 순교했는지를 알릴 수 있을까? 이 길은 성지인데! 무심했던 나를 보았다. 출퇴근길, 운동하는 천변길, 시장가는 길에 지나쳤던 그 길들은 성지였고 순교를 기다리며 기도했던 순교자들의 빛나는 길들이었다. 가족과 같이 기도하며 걸어서 갈 수 있는 성지 그 길에 있는 표지석 하나에도 관심을 갖고 순교자들의 정신을 되새기고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을 순교자 성월을 맞아 마음속에 굳게 새겨본다.

글 : 이진주, 사진 : 김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