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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60호(봄)-신앙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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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8-03-30 13:27 조회2,0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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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하느님의 사랑을 이긴 죄는 없다

 

 

1. 작은 죄보다 큰 죄를 더 기꺼이 용서하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용서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간이 죄를 범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사랑과 자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떤 의미에서 그분에게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이에 대해 에크하르트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깊이 생각하게 하는 대답을 준다. “하느님께서는 큰 선물 외에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죄보다도 큰 죄를 더 기꺼이 용서하십니다.” 에크하르트의 이러한 진술은 어쩌다 돌발적으로 발설된 것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진술을 자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가 크고 무거울수록, 하느님께서는 그만큼 한없이 용서하시고, 그만큼 더 빨리 용서하십니다. 왜냐하면 죄가 그분에게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상상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이러한 사랑에 대해 많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자주 증언했다. 그 가운데에는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도 있다. “만약 내가 하느님이라면, 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시작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하느님께 용서를 받지 못할 죄란 이 세상엔 없고 또 있을 수도 없소. 게다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으로도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그런 큰 죄를 사람은 저지를 수가 없는 것이오. 하느님 사랑이 미치지 못할 만한 그런 죄가 어디 있겠소?”
이러한 사랑 앞에서 샤를 드 푸코(1858-1916)는 글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의 이름은 시대의 흐름에 이미 묻히어 오늘날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오늘날 교회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분명 회개할 때까지 상당히 방탕한 삶을 살았다. 젊은 푸코는 재능이 있었지만 이리저리 방황하며 쾌락만을 쫓는 삶을 살았다. 나쁜 책들을 가까이하고 여자들을 좋아하고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결국 젊은 소위로서 군에서 물러나야 했다. 푸코가 뒤늦게 가장 후회했던 것은, 자신이 16세 때에 신앙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신앙을 저버린 때부터 삶이 심연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위블랭 신부를 만나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을 극명하게 체험했다.
그는 당시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항상 저는 당신에게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당시처럼 저는 그렇게 큰 슬픔, 불쾌감, 동요 등을 체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당신께서는 절망의 물에 빠진 저를 분명하게 지켜주셨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는 손으로 저를 붙잡고 계셨고, 당신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저는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았을 때에 당신께서는 저를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당신 섭리의) 때가 왔다고 생각하실 때까지 저를 줄곧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다가오시길 원하셨고 마침내 더러운 욕망의 악마를 저에게서 몰아내셨습니다.”
푸코는 트라피스트가 되었고, 극도의 가난과 단순함으로 살았다. 후에 그는 나자렛으로 가서 숨어 지내시는 예수님의 삶을 모방하여 살았다. 후에 그는 알제리 남부로 옮겨가 보잘것없는 은둔소를 만들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가장 작은 형제라고 불렀다. 그러다 한밤중에 원주민의 습격으로 생을 마감했다.
푸코와는 정반대로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한 경우도 더러 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유다가 그러한 경우이다. 이러한 사실을 훗날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되신 알비노 루치아노는 피정지도서 『사마리아인의 모범』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유다는 은전 서른 냥에 스승 예수님을 배반하는 끔찍한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내 죄가 너무 크다. 나는 저주받았다.’라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가 아무리 커도,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는 언제나 그 죄를 덮어 줍니다. 죄는 유한하고 일정 영역에만 해당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여 어떤 죄도 감싸 줍니다.” 때문에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불의한 사람은 (…) 주님께 돌아오너라. (…)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이사 55,7)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는 언제나 그 죄를 덮어 줍니다.” 이는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확고한 믿음이다. 이러한 신념을 교황은 가장 중대한 죄를 범하였던 유다 이스카리옷과 결부시켜 분명히 밝힌다. 잠시 유다를 더 생각해 보자. 유다는 인류의 역사에서 잊힐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운명은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하여 숙고되고 묘사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쥘리앵 그린의 소설 『모든 인간의 어둠』을 읽을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 빌프레드 인그람은 신앙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라는 내적 요구와, 다른 한편으로 주저 없이 쾌락을 즐기라는 성적 욕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살았다. 그의 이웃은 그를 단정한 사람으로 생각했지만, 빌프레드는 자신이 더 이상 헤어 나올 수 없는 죄의 수렁에 빠져 있다고 의식했다. 사실 그는 먼 친척 제임스 나이트의 젊은 부인을 알게 되었는데, 그녀와 아주 내밀한 관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어느 날 빌프레드와 제임스는 함께 앉아 진지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우리는 모두 유다의 이름 자리에 우리의 이름을 넣을 수 있네.”하고 제임스는 말문을 열면서 이렇게 계속 말한다. “예수님은 유다를 사랑하셨지. 그러한 예수님을 배반했던 것은 큰 죄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있었지. 유다의 잘못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데에 있고, 그 때문에 목을 매단 것이지. 이 모든 일이 다르게 전개되었다고 생각해 보게. 예수님이 십자가 아래에서 기진맥진하며 힘들어 하실 때, 유다가 뉘우치며 예수님께 달려갔다고 상상해 보게. (…) 예수님이 어떤 눈으로 유다를 바라보셨을까? 증오의 시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완전한 사랑의 눈빛! 빌프레드, 완전한 사랑의 눈빛이네. 수난의 길에는 유다가 예수님께 용서를 구함으로써 예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짧은 순간이 있었다네. 그런데 화가 나는 것은, 그 순간이 유다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나갔다는 것이지. 나는 사건을 그렇게 생각하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에서 아래로’ 굽어보시는, 말하자면 얕잡아보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이러한 면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인간은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자꾸만 격하시킨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취약한 모습이다. 이에 비해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사람을 들어 높이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신다. 이것이 하느님의 위대한 모습이다. 인간은 배반자 유다를 증오의 마음으로 얕잡아 바라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정하게 바라보신다.

2. 용서의 의미
죄를 없애는 능력을 지닌 사죄경은 인위적으로 꾸며진 말이 아니다. 이것은 복음 한가운데에서 유래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공생활 초기에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그런데 용서란 예수님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그분에게 용서는 특히, 그분께서 죄로 인해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들과 친교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용서의 전제조건은, 죄인과 죄를 구분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거리를 두지 않으시지만 죄와 거리를 두시면서 용서를 이행하신다. 그분에게 죄로 인해 길을 잃은 사람은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 자비의 대상이다.
죄인은 예수님에게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자비의 대상이다. 아니 죄인은 그분에게 큰 사랑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다. 그분은 죄인의 곤경, 곧 내적인 경직 상태를 잘 아시기 때문에, 죄인을 동정하시며 자비롭고 가엾은 마음으로 대하신다. 이 때문에 당시에 사기와 거짓말과 간음 등을 일삼는 자들이 그분에게 깊은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 안에도 어떤 선함이 있음을 믿고 계시며, 죄악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마음 깊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는 사람마저 용서하신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통해 살해하는 공격성과 폭력성을 죄인에게서 거두어내시며 죄인과 친교를 유지하신다.
용서는 그분에게 죄인의 나쁜 것을 기억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존재에서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용서를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눈빛에서 깊이 체험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신다는 것을 의식하고, 밖으로 나가 슬피 울며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눈빛이 그를 구원하였고, 그에게 하느님께로 향하는 미래를 열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용서를 받고 계속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갈 수 있었다.
디트리히 본회퍼도 용서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용서는 “하느님 권능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내 삶의 기쁘고도 새로운 시작인 선물을 통해서 구원이 없는, 잘못되고 실패한 모든 과거(이에 대해서는 아마 나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를 없애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용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몸소 엄청난 고통을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사랑의 선물이다. “그분은 나의 심각한 병을 알고 계시며 그것 자체를 짊어지셨던 유일한 의사이시다. 그분은 마음, 영혼과 육신을 치유하실 수 있는 구원자이시다.”
여기에서 다음 물음이 제기된다. 죄의 용서는 육체적 건강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는 물론 신비로운 관계이다. 죄를 용서받아 마음이 진정으로 다시 자유를 되찾은 사람에게서 그 많은 육체적 고통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자주 듣는다. 사실 영혼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생긴 육체의 질병도 많다. 그리고 영혼의 치유로 육신이 회복되기도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몸이 성령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온전히 머무시며 활동하실 때 우리의 몸은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만끽하며 점점 회복된다. 

3, 인간을 뒤쫓으시는 하느님의 사랑
마지막으로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를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해 보자. 이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주인공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지라도, 비유의 주인공은 잃었던 아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버지이다. 아들은 되도록 아버지에게서 멀리 달아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는 차츰 몰락하여 나락의 벼랑 끝에까지 이른다.
그런데도 그는 왜 추락하지 않았는가? 왜 멀리 계신 아버지께 다시 돌아가 죄를 고백하기로 결심했는가? 집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의 사랑을 분명 맛보았기 때문이다. 제 몰골을 보자 아버지의 사랑이 새삼 되살아났고, 아버지와의 대화가 그리웠다.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께 달려간다. 그가 아버지께 용서해달라는 말도 꺼내기 전에 아버지는 사랑으로 그에게 입맞춤을 한다. 아버지의 사랑을 멀리했어도, 아버지의 사랑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그 사랑은 먼 길을 쫓아왔고, 결국 그를 다시 데려왔다. ‘하느님의 뒤쫓으심’은 이러한 것이다.
끝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죄를 지은 인간에게 엄청 크다는 것이다. 마치 죄인이 자신의 죄에서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꺼낼 수 있을 정도로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위대하기만 하다.
다시 디트리히 본회퍼에게 돌아가자. 그는 『저항과 순종』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모든 것에서, 가장 큰 악에서도 선을 일으키실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잘못과 오류도 헛된 것만이 아니라고 본다. 하느님에게는 우리의 선행을 완성하는 것보다 우리의 잘못을 완성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