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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도 사목교서 - 주님과 함께 길을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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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리 앞에 새로운 한 해가 펼쳐졌습니다. 그와 함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대희년(大禧年)으로 선포하신 2000년이 불과 5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뜻깊은 시점을 바라보며 교황님께서 제창하신 <새로운 복음화>의 요청도 한층 더 절박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 주변의 세상을 복음의 빛으로 밝히고 절망의 안개에 휩싸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우리의 사명이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절실한 것입니다.


난해는 우리 사회에 유달리 걱정스런 일도 많았고 하루하루의 삶이 살얼음판을 밟고 지나가듯이 불안한 한 해였습니다. 자고 깨면 또 무슨 사건이 터질지 모를 나날이었습니다. 낯모르는 사람끼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이웃, 친구, 친척, 심지어 부모자식 사이에도 너무나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이른바 지존파 사건에서부터 성수대교 붕괴사고에 이르기까지 이러다가는 나라 전체가 내려앉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마저 들게 하는 대형사건들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무너져 내린 것은 성수대교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지켜주던 인륜도덕도 마찬가지임을 보여주는 사건들이었습니다.


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일부 유보하면서까지 온 나라가 한 방향으로 밀고 온 경제성장의 결과가 이런 것이었던가?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할 것인가? 도대체 실타래처럼 헝클어진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이 있기나 한 것인가? 어디엔가에 희망이 정말 있는가? 우리는 무겁고 답답한 마음을 숨길수가 없습니다.


런 우리의 심경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루가24,13-35)의 마음에나 비길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어둡고 절망적인 마음을 속에 담고 길을 가던 그들이 끝에 가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기쁨과 새로운 삶을 얻게된 이야기에서 우리는 희망의 빛을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1. 먼저, 거기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납니다.
리는 개인으로나 교회 공동체로나 하느님을 만날 시점을 향해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개인으로는 세상에 태어나서 한 삶을 마칠 때까지 교회로는 창립 때부터 이 세상이 끝나고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는 날까지 계속 길을 가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세월은 그만큼 우리를 목적지에 가까이 데려다 줄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약 2천년을 걸었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또 다시 2천년을 걸어 왔습니다. 이제 불과 5년 후면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세 번째의 천년대가 시작되는 2000년대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에는, 우리가 걷기 시작한 때도 각기 다르고 지금 도달해 있는 지점도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도중에 우리는 넘어야 할 산, 건너야 할 강, 도둑과 강도가 출몰하는 후미진 곳, 우리의 발걸음을 헷갈리게 하는, 온갖 유혹 등 수많은 장애물을 만납니다. 그래서 가끔은 비틀거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며 이리저리 헤메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서 길을 가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마음속에서 놓치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을 놓쳐버리면 사람은 조그마한 어려움을 당해도 쉽게 자포자기하고 삶을 중대하게 그르치고 말게 됩니다.


2. 두 사람은 길을 걸으면서 <침통한 표정>으로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들은 지금까지 열심히 쌓아 올린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어디에도 희망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으나”, 그 예수님이 힘없이 관헌의 손에 잡혀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고는, 모든 꿈이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세상만사를 하느님께서 그 손에 쥐고 안배하신다는 말도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성전이 있고 그분의 일이 완성될 장소로 알려진 예루살렘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삶의 방향을 바꿔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절망과 낙담뿐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죽은 것입니다.


3. 그런테 뜻밖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두 사람 <곁에 나란히 걸어가십니다.>
느님께서 함께 해주심을 믿기가 가장 어려운 사건을 당하고 그 충격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던 바로 그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 곁에서 함께 걸으십니다. 아무 희망도 없이 그저 걸어가던 두 사람의 삶에 어떤 일이 시작되는 순간입디다. “나는 너희 가운데에서 걸어가리라. 그렇게 되면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레위 26, 12). 제자들이 참다운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그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십니다.


4. 그분은 이제 <말씀>을 건네오십니다.
동안의 침묵을 깨고, 그분께서는 말씀을 건네십니다. 모두 세 번에 걸쳐 말씀하십니다. 처음 두 번은 간단한 질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생명 깊숙이 들어가 충격과 파문을 일으킵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이사 55, 10-11).


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삽니다. 그 말씀은 때와 장소에 맞추어 생명을 살리기 위해 가장 필요한 효력을 냅니다. 지금은 주님의 말씀이 우선 제자들의 처지를 환히 드러나게 합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먼저 정확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마음의 눈이 멀고 지혜가 사라져서 어리석음의 밤 속을 헤메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5. 그들은 부활에 관해서 알아야 할 것을 다 알고 있는 데도, 그 <앎이 그들의 삶을 조금도 바꾸지 못합니다.>
수님의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을 보면, 그들은 자기들이 잘 아는 여인들 몇이 무덤에 찾아갔다가 천사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그분이 살아 계시다고 일러주었다는 사실과, 그들의 말이 너무나 믿기지 않아 자기네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알아본 결과 그 여인들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이 모든 말을 듣고 깜짝 놀라기까지 했다고 자백합니다. 그런데도, 그 모든 앎이 그들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에 관해서 듣고 안 것만으로는 그들의 어두운 얼굴이 조 금도 밝아지지 않고, 떠나가는 발길이 멈추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참담한 표정을 한 채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6. <성서를 들어 설명하심으로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던 사건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든 희망을 잃고 걸어가던 제자들은 성서 전체를 들어 설명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자, 자신들을 절망에 빠지게 했던 지난 일들을 달리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실 때, 그들의 눈은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과 죽음이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임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제 세상 만사는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다시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대로가 아님이 분명해집니다. 죽음의 상징이던 십자가가 생명의 상징으로 바뀌고, 수치가 영광으로 통합니다. 그리고 머리에만 있던 앎이 생명을 움직이는 힘과 확신으로 바뀝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7. 제자들이 이 낯선 나그네를 <초대>합니다.
금까지는 예수님 쪽에서 먼저 말을 건네시며 성서를 설명해 주시는 등 기선을 잡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자들 쪽에서 자유로이 응답할 순서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찾아가던 동네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 예수께서는 일부러 더 멀리 가시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십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제자들은 그분을 초대합니다. “이젠 날도 저물어 저녁이 다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 가십시오.” 제자들이 낯선 여행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지금 여기서> 잡지 않으면, 그들은 하느님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8. 그 사람들이 낯선 나그네와 함께 빵을 <나눌 때>, 그들의 눈이 완전히 열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서가 그 자체로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안에서 뜨겁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감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구체적인 나눔의 행동입니다. 그렇게 해서 눈이 열린 제자들 앞에 분명히 살아 계신 예수님이 앉아 계십니다. 제자들이 아는 한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치고 아무리 크고 위대한 힘과 권력을 가진 이도 죽음의 힘을 당해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혹독한 고통을 당하신 다음 죽어 가시는 모습을 보고는 만사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절망하여 돌아가던 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형을 당하셨던 예수님이 이렇게 살아 계시다면, 그분께서는 죽음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계심이 확실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뚫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순간 제자들도 절망과 불신을 뚫고 희망과 믿음 속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살아납니다.


9. 제자들은 방향을 바꾸어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갑니다.
기 자기 주장만 내세우며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한 마음이 되어 예루살렘으로모여듭니다. 그렇게 하여 새 마음과 새 정신을 가지고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 신앙인들은 특별히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합니다. 신앙인들의 공동체는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은 믿는 이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 감지되는 것입니다.


10. 새로 태어난 사람들로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뒤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오늘도 옛 삶에서 죽고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서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소리 높이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주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브 12, 1-2)


형제 자매 여러분!
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 거기가 새로운 복음화의 목적지입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절망과 슬픔을 뚫고 희망과 기쁨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이끄는 일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제2차 바티칸공의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1항)이기 때문입니다.


리가 이런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스스로 그 제자들이 거쳐갔던 골목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낯설고 새로운 상황(이사 43, 18-19) 앞에 서게 되었고, 그믐밤에 숲 속을 헤메는 사람처럼 짙은 어두움과 답답함(애가 3, 2. 6 ; 이사 42, 18-20)을 뚫고 지나갔으며, 지금까지 걸어오던 길을 포기하고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 걷고 싶은 유혹(마태 4, 1-11)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이런 골목을 통과하고 나서만, 그들은 절대적인 순종(히브 5, 8 ; 필립 2, 8)을 통해서 죽음으로부터 생명이 솟아나게 하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뵈옵고 예수께서 참으로 살아계신 주님이심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러므로 새 생명 속으로 부활하기 전에, 제자들은 당황하고 절망하며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 지 모르는 어두움, 말하자면 죽음의 굴을 통과합니다. 그 때 성서의 말씀만이 그런 제자들에게 등불이 되어줍니다. 그리하여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던 현실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성서가 아니고서는 세상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또 세상의 실상을 모르고서는 성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경험하고 있는 각종 대형 사건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엇나간 인간성을 포함하여,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은 이미 성서 속에서 그 비슷한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서를 보면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고장나고 망가진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 역사에 뛰어들으셨고, 마지막으로는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어 죽음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던 사람들을 건지셨습니다.


리 나라는 지난 한 세대 동안 경제성장만을 유일한 목표로 내걸고 달려왔습니다. 말하자면 빵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 4)는 사실을 잊고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요즈음 부쩍 늘어난 각종 비인간적 사건들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런 추세를 바꿀 수 있는 묘책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빵도 꼭 있어야 하지만, 사람에게는 정신의 양식이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이제부터라도 여기에 온 힘을 기울이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는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불행한 일들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길이 어디에 있는 지를 잘 알려줍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원사(原史)부분(1-11장)만을 보아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성서를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는 사람과 사회를 빗나가게 하는 세력이 아무리 크다해도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의 손길은 그보다 더 크고 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수님께서는 악과의 투쟁에서 결국 승리하심으로써 가장 분명히 우리에게 그것을 입증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리라”(이사 43, 19 ; 묵시 21 ,5)하신 주님의 말씀은 아무리 짙은 어두움을 뚫고서도 반드시 실현됨을 보여주셨습니다.


제 우리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걸었던 길을 걷고, 개인과 사회가 함께 새 삶의 기쁨에 도달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실천합시다.


(1) 우리 모두는 <성서의 말씀> 을 더욱 가까이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것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렇게 할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도와 성서 말씀의 다양한 면들을 깨닫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2) 그러므로 <가정기도>에서 가족이 함께 성서를 봉독하고 정기적으로 성서 나누기를 합시다.
리고 새로운 가족의 탄생, 영세, 생일, 각급 학교 입학, 약혼, 결혼, 취직, 그리고 살아가면서 겪는 기쁨과 슬픔의 때 등, 삶의 여정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기회마다, 곁에서 함께 걸어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가족의 여행길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나가기로 합시다.

(3) <교회의 모든 모임>, 신심단체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나누는 일을 첫자리에 두도록 합시다.

(4) 반회합이나 직장별 모임 등 성서 나누기에 가장 적합한 <소공동체>를 조직하여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맛들일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합시다.

(5) 미사에서 사제뿐 아니라 성서 봉독과 미사안내문을 맡은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명확하고 생생하게 선포할 수 있도록> 정성껏 준비합시다.

(6) 성서공부는 당연히 배운 바를 사회생활 속에서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서 부패해 가는 사회의 방부제로서의 사명을 띠고 세상에 파견되어 있는 우리가 참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닌 지는 사회생활 속에서 드러납니다. 와해되는 가정의 문제에서부터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 사회 안에서 우리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큰 일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원래 뜻하신 방향을 찾아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세상은 한층 더 밝아질 것 입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건강, 시간, 기회, 능력, 성령께서 주신 좋은 생각, 물질 등을 이웃과 <나눌> 때, 우리는 주님을 뵈올 수 있는 눈이 열리고, 하느님의 세계가 점점 더 넓게 퍼져나갈 것입니다.


1994년 대림 첫 주일에
천주교 전주교구장 이 병 호(빈첸시오)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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