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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제66호(가을) 신앙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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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9-08-28 15:32 조회1,9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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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삶을 나는 얼마나 비추고 있는가?

 

 1.명성과 실재는 서로 일치해야 한다.

우리의 이름이 아무리 유명하더라도 우리의 실제 모습이 그 명성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는 명성이 높지만 치유하지 못하는 의사와 같다. 이와 비슷하게 그 이름에 걸맞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더러 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그 윤리적 도덕적 품행이, 그리고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삶이 크게 나쁜 사람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 묵시록의 다음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묵시 3,1-2)

에블린 워Evelyn Waugh(1903-1966)는 천재적인 영국 소설가였다. 그는 1930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하지만 그가 개종했다 해서 사나운 말로 이웃에게 상처 입히는 그의 일상적인 습관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았다. 그가 한 번은 어떤 용기 있는 부인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당신은 그렇게 독살스러우면서도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있을 수 있소?” 그러자 그는 격노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상냥한 부인,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저는 분명 나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가 종교를 갖지 않았다면, 저는 더 이상 사람 노릇도 못했을 것입니다.” 더 나빠질 수 있었지만 그나마 하느님의 도움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고백이다. 이 고백은 아주 오래된 진리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것은 하느님 없이 인간은 너무 쉽게 비인간적인 상태로 타락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에서 오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도움을 받기 위해 때때로 오랫동안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성격이 그리 급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일기장에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내가 정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더 일찍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던 점이 아니라 우선 다른 모든 것을 시도했던 점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할 것입니다.”(Die Tagebücher) 이 철학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리스도인 행세를 했던 그동안의 비본질적인 삶을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다음 주장을 크게 반대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보자면 단 한 명만의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그분은 바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분이다.”(Der Antichrist) 하지만 우리는 니체의 이런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지라도, 수천 년 동안 그리스도를 추종했던 많은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여겨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그분과는 대조적으로 점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갈 뿐이다. 되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우리가 죽는 순간에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2.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향하여 자라는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사가 곧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항상 사건의 중심이시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시거나 사람들이 그분을 찾아온다. 그 사람들은 그때부터 자기 삶의 방향을 그분에게 맞추고,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을 통하여 이해하고 또 받아들인다. 그 결과 그들은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되어 구원을 받는다. 그러고는 그분을 떠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예수님 곁에 머무르며 체험했던 모든 것을 함께 나눈다. 그리하여 그 다른 사람들이 큰 기대 속에서 예수님께 나아가 새 사람이 되도록 도와준다. 마태오복음사가는 구체적인 실례로 이렇게 언급한다.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9,32-33)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삶의 중심이 되셨다면, 곧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체험하고 그런 일에 대해 증언한다면, 그 그리스도인은 일종의 복음사가이다. 그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당신 자신의 삶으로 온전히 증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곧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화 하나가 생각난다. 어느 날 두 아들을 둔 어머니가 프란치스코 성인을 찾아와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간절히 청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 성인이 베드로 카타니 형제에게 물었다. “저분에게 적선할 돈이 있습니까?” 그 형제는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신약성경 외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약성경은 특히 영적 독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다. “저분에게 그 신약성경을 줍시다. 저분이 책을 팔아 배고픔을 해결하도록 합시다. 성경에도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단지 성경을 읽는 것보다 주는 것이 하느님께서 더 마음에 들어 하실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일화에서도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그대로 실천하는 복음사가임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정말 실천할 경우 하느님과 더욱더 친숙해지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도 신앙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아니 하느님께서 부재한 듯이 보이는 사건들에서도 하느님을 분명하게 체험한다.

성격이 무척 활달한 젊은 부인이 있었는데, 슬하에 어린 4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부인은 다섯째 자녀의 출산을 바로 앞에 두고 심한 하혈로 급히 병원을 찾았다. 의료진이 응급조치를 취하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부인의 생명이 위독하였다. 부인은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느끼며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나는 더 이상 가망이 없는 것 같아요. 부디 자녀들을 잘 키워주세요.” 이에 남편은 여보, 힘을 내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소. 하느님께서 당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오.” 하고 용기를 북돋우며 희망을 일깨웠다. 그러자 부인은 나는 지금까지 하느님을 줄곧 믿어왔지만 아직도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해요.” 하고 말했다. 하지만 조금 후에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런데 나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받아들이고 싶어요.” 하고 덧붙였다. 그러고는 몇 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부인은 형언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볼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가장 거룩하신 분의 사랑의 신비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인은 원하시는 대로 활동하시는 성령께 온전히 복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이 죽음을 맞이하는 부인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어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부인은 성령의 이끄심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고, 성령께서는 그 부인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셨습니다.”

이 부인의 경우처럼,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을 원망하지도 않고 억울한 감정을 품지도 않는다. 오히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에 온전히 따르려는 태도를 취한다. 하느님께서 자기 자신을 남김없이 차지하시도록 그분께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이다. 그리고는 내적인 평화를 깊이 누린다. 그들은 하느님 안에 늘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때마다 주어지는 상황을 다스린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늘 깊이 결합하심으로써 수난과 죽음의 어려운 상황들을 견뎌내신 것과 같다.

 

3.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고유한 특성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고유한 특성들을 생각해 보자.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도 지녀야 할 특성인데,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겸손이다. 예수님께서 변방지역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점, 나자렛에서 오랫동안 감추어진 삶을 영위하신 점, 예루살렘에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낮추신 점 등에서 그분의 겸손한 모습이 잘 드러난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결코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그분을 치켜세울 때마다 그분은 항상 뒤로 물러가셨다. 그분은 드물지 않게 기적을 행하셨지만, 이를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분이 주로 이야기하셨던 상대는 대부분 변두리의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죽은 아들을 무덤으로 데려가고 있던 과부이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신 하느님이시다. 이런 겸손을 우리 그리스도인도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겸손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에서 기인한다.

둘째는 겸손과 결합되어 있는 개방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여셨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모든 사람은 그분께 나올 수 있다. 그분은 사악한 얼굴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닫지 않으신다. 진지한 사람과 경솔한 사람, 위대한 사람과 보잘것없는 사람, 노인과 젊은이, 많이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 건강한 사람과 병자, 성인과 죄인 등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신다. 그리고 사람을 결코 차별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멍에를 제안하신다. 이런 개방과 공평이 내 삶에는 어느 정도까지 갖추어져 있는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선호하는 반면 다른 특정한 사람들을 멀리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이든지 그리고 어떻게 살든지, 항상 우리를 멀리하지 않으신다.

마지막 세 번째는 따뜻한 마음이다. 이 마음은 모든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다. 그분은 아무도 마치 군중을 대하는 것처럼 소홀히 대하지 않으셨다. 그분에게 모든 사람은 각기 고유한 운명을 지닌 유일한 피조물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특별하고 소중하다. 그분을 만난 모든 사람은 그 만남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간직할 정도이다. 예수님께서는 특히 우리의 온갖 약점들을 사랑스럽게 배려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다. 이런 따뜻한 마음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시사하는 바는 이렇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음과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랑의 문화를 확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되어가는 그리스도인이다. 하지만 이런 되어가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 힘은 분명 성찬례에서 나온다. 성찬례는 예수님께서 지상 생애 전체를 통해 보여주신 당신 삶의 고유한 특징들을 우리 안에서 실현되도록 도와준다. 곧 다양한 상황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던 그분의 겸손, 당신을 찾았던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려 있는 개방, 모든 사람을 각자의 처지에 따라 소중하고 친밀하게 대하셨던 따뜻한 마음 등을 본받도록 도와준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참된 그리스도인가? 이 물음에 대해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고향으로 모시고 우리 삶의 중심으로 여길 때, 곧 그분의 삶이 우리 삶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