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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제70호(가을) 신앙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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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8-27 14:15 조회1,5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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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생각에 여지를 주지 마라.

 

 

1.큰 생각과 작은 생각

인간이 위대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위대함만이 아니라 품위도 생각에서 기인한다. 이런 면에서 요한네스 아렌Johannes Ahlen의 다음 지적은 공감이 간다. “현자와 바보는 생각에서 구분된다. 현자는 자기 생각을 다스리는 반면, 바보는 그 생각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자기 생각을 잘 다스릴 때 품위를 갖춘 지혜로운 삶을 산다는 뜻이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작품을 펼치면, 하느님께 드리는 다음 기도를 발견할 수 있다. “주님, 저에게 큰 생각을 주소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크고 작은 많은 생각들 가운데 항상 큰 생각에 머물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사실 잡다하고 부정적인 작은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다. 오히려 우리의 삶을 망가트린다. 오직 큰 생각으로만 삶의 걱정과 두려움을 덜어내고 위대한 삶을 이룰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특히 곤경과 어려움을 큰 생각으로 대하면 좋다.

한편,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본성상 ‘하느님의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 인간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하느님의 생각을 실현할수록 그만큼 자기 자신이 되고, 자신의 정체성에 이른다. 달리 말하자면, 참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신 존재가 된다. 하느님의 생각과 일치하는 삶이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큰 생각이란 하느님의 생각과 일치하는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hard Shaw(1856-1950)의 일화가 생각난다.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한 기자의 방문을 받았다.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쇼씨, 당신이 다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리고 당신이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 가운데 어느 특정인이 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조지 버나드 쇼가 되고 싶습니다.” 왜 그는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았던가?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그가 가졌던 많은 생각들은 어쨌든 그 자신의 본질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하느님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1828-1910)의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우리가 가진 생각은 손님과 같다. 좋은 손님이든 나쁜 손님이든 손님을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나쁜 손님을 몰아내고 좋은 손님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생각들은 언제든지 우리를 찾아올 수 있는 손님과 같은데, 그 첫 번째 방문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책임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생각들은 언제든지 다시 새롭게 우리를 찾아오는데, 우리가 그들을 기꺼이 환대할 경우 더 자주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 생각대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정적이고 나쁜 생각들을 단호히 몰아내고, 긍정적이고 선한 생각들을 잘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의 용기를 마비시키고 우리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결정적인 힘을 꺾는다. 그래서 우리의 건강과 행복과 삶을 파괴한다.

 

2.부정적인 생각이 끼치는 영향들

사실 이웃과의 작은 갈등에서부터 시작하여 전쟁에까지 이르는 모든 무질서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시작한다. 아들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 아버지가 소크라테스를 찾아가 조언을 청했다. 그 아버지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고, 어두운 생각들이 많이 엿보였다. 이에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사람들은 대개 부패한 음식에 주의합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패한 생각이 우리 영혼에 미치는 영향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는 정말 어이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음식의 위생만 준수할 뿐, 생각의 위생이 있다는 것을 아예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아들과 불화를 빚고 있다는 지적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의 감정과 기분을 이내 부정적으로 만든다. 이에 방심하면 그 부정적인 내용을 무리하게 일반화시키고 마침내 우리의 현실마저 왜곡한다. 마치 부정적인 것만을 볼 수 있는 색안경을 착용한 것처럼 된다.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생각이 눈으로 바라본 것을 자꾸만 부정적으로 되새긴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제가 두 눈으로 젊은 여인의 몸까지 줄곧 바라보는 동안, 저의 생각은 그에 알맞은 상상에까지 도달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를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의 일화는 잘 지적한다.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 벽화의 초안을 구상한 다음, 먼저 그리스도의 얼굴을 모델로 삼을 남자를 찾아 그림을 그렸다. 그 후에 그는 일 년 동안 사도들의 모습을 그렸다. 이제 그에게는 유다의 모습을 그리는 일만 남았다. 그는 내적인 분열과 배반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유다의 얼굴을 모델로 삼을 사람을 찾아다녔다. 수개월 후에 그는 밀라노의 술집에서 찾던 인물을 찾았다. 그림을 그리는 중에 유다의 모델이 된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졌는데, 그는 이전에 예수님의 모델이던 같은 인물이었다. 그 사이에 그 모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부정적인 생각이 기계적으로 작용할 경우,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도스토예프스키도 『죄와 벌』에서 분명하게 묘사하였다. 작가는 가난한 라스콜리니코프가 어느 날 자신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리대금업자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 과정을 묘사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차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 곧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이상한 생각이, 마치 달걀에서 깨어 나오는 병아리처럼 그의 머릿속을 쪼아대며 금방 그를 사로잡아 버렸다.” “마지막 날은 그에게 거의 기계적으로 작용하였다. 흡사 누군가 그의 손을 붙들고 어쩔 수 없이 맹목적이며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는 형편이었다. 그건 마치 옷자락이 기계 바퀴에 물려서, 그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것과 같았었다.” 악한 생각이 떠오르고, 그것에 사로잡혀 그것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에 이르고, 마침내 그것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긴다.

한때 머피의 법칙이 크게 회자되었다. 그 법칙의 일부는 이렇다.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어떻게든 잘못되고야 만다. 일이 잘못 진행될 경우의 수가 여러 개라면 그중 가장 최악의 방법으로 일이 진행된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든 일은 잘못된 상태에서 최악의 상태로 진행되려는 특성을 가진다. 만일 모든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면 어처구니없이 뭔가 빤한 실수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빵은 언제나 잼이 발린 면으로 떨어진다.”

우리는 이 법칙을 가벼운 농담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이 법칙은 부정적인 생각에 갇힌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요즘 의사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현대인의 가장 중대한 불치병으로 여긴다. “현대인의 가장 큰 불치병은 부정적 사고입니다. 많은 환자에게 부족한 것은 오직 하나 곧 긍정적인 생각입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부정적 결과가 나옵니다.” 그만큼 부정적인 사고가 만연하고 있고, 이 때문에 불행을 자초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정적인 생각들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긍정적인 생각들을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긍정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을 경우, 우리는 부정적인 일에서도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찾을 수 있다.

미국의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Thomas A. Edison(1847-1931)이 바로 그렇게 이 세상의 사건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1914년 12월 9일 밤에 에디슨의 큰 공장은 화재로 전소되었다. 에디슨은 순식간에 200만 달러의 피해를 입었다. 자기 삶의 큰 업적을 화마로 날린 것이다. 그가 다음 날 아침 자기 모든 희망과 꿈들이 숯덩이가 된 잔해 속을 걷다가 이렇게 말했다. “큰 재난은 그 자체로 위대한 성과를 가져다줍니다. 우리의 모든 오류는 불에 탔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회사는 3주 후에 처음으로 축음기를 발명하였다.

부정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생각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골리앗의 도전에 응답하는 다윗의 이야기다. 골리앗이 이스라엘에게 도전했을 때 모든 병사들은, ‘그는 우리가 결코 대적할 수 없는 거인이며 장수다.’라고 말했다. 다윗도 그 거인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내가 결코 놓칠 수 없는 거인이다.’하고 생각했다. 병사들의 마음속에는 부정적인 것 곧 불신, 의기소침, 비관주의, 절망 등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다윗에게는 확신, 용기, 결단, 내적인 고요와 유머가 다스리고 있었다.

 

3.부정적인 생각을 다스리는 방법

영성 대가들은 대부분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을 다스리는 방법을 다양하게 알려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생각을 조종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나쁜 생각은, 떠오르자마자 과감하게 대처할 때 손쉽게 이겨낼 수 있다. 레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불은 피어날 때 꺼라. 불이 활활 타오를 경우 끄기가 힘들다.” 일은 대부분 이렇게 이루어진다. 먼저 생각이 떠오른다. 그 다음에는 생각이 더욱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어서 우리의 감각을 자극시키고 정신적 즐거움(쾌감)에 이르러 결국 생각에 동의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윤리적으로 모순되는 일에 몰두하고 반복함으로써 기존의 올바른 생각을 멀리하거나 접는다.

따라서 어떤 수상쩍은 것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즉시 이를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계속 반복하여 긍정적으로 대할 때 우리의 생각은 달라진다. 어떤 저명한 의사는 정신병을 성공적으로 치유하곤 했는데, 그 비결을 이렇게 말한다. “모든 나약한 생각은 강한 생각을 통해서, 부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생각을 통해서, 증오의 생각은 자애로운 생각을 통해서, 어두운 생각은 밝은 생각을 통해서 대체시키는 것이 그 비결입니다.”

게오르게스 베르나노스Georges Bernanos(1888-1948)는 이렇게 말한다. “저에게 영혼을 침해하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저는 그것을 즉시 주님께 맡기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을 저의 기도에 포함시킵니다. 그러면 그것은 놀랍게도 다르게 보입니다. 그것을 다시 알아보지 못할 정도입니다.” 이런 진술은 시편의 다음 말씀을 상기시킨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시편 139,2 참조)

그런데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이라고 간혹 간주되기도 한다. 그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인간의 모든 결합이 긍정적인 관점을 우선시할 때에만 가능해진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실제로 모진 운명이나 불편한 이웃에게서 긍정적인 것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상대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그리고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것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그는 부정적인 것을 알고 받아들이지만, 그것에 전적으로 동의를 하지 않는다. 그 부정적인 것에 여지를 주지 않는다. 창조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은 긍정적인 생각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남다른 사람’으로 드러낸다. 이런 유형의 인간은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주인공 중의 하나인 알렉세이 표도로비치이다. 알렉세이는 아주 특별한 유형의 사람이다. 그가 주변 사람들과 확연하게 차이나는 특이성은 무엇인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인간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한평생 인간을 완전히 믿으며 살아온 듯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한테서 바보라거나 순해빠진 얼굴이라는 말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도 않고 또 남을 비난하거나 핀잔하는 일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이 그에게는 있었다. … 그를 본 사람은 즉시 그가 진실하고 선한 사람임을 알았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인물 없이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 곁에는 이런 사람들이 늘 나타났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어디서나 악하게 취급을 받아 체면을 잃고 파괴된 삶을 살았다. 그들은 그분 곁에서 살았는데, 나병환자, 이방인, 종교적으로 부정한 사람, 자캐오, 십자가에 달린 강도 등이 그들이다. 예수님에게서는 해방하는 힘이 나온다. 그분을 만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욕과 고통을 조금도 숨길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그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시고, 있는 그대로 그들을 인정하신다. 그리고 그들 곁에 머무신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긍정적으로 머무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인간은 자신이 악을 행할 경우 그것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정말 모른다.

결론적으로 율법학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물음을 숙고하자.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마태 9,4) 우리 자신에게 이 물음을 적용할 수 있다. 대부분 자동적으로 우리 내면에 슬며시 들어와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모든 어두운 생각은 피해야 한다. 크고 작은 모든 전쟁을 포함하여 모든 고통은 우리의 어두운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러기에 성경은 늘 회개를 촉구한다. 회개는 어두운 생각에서 밝은 생각으로 방향 전환을 뜻한다. 우리 영혼을 밝은 생각의 본거지로 만드는 사람은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