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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제72호(봄) 신앙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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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1-03-02 11:41 조회1,3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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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1.가장 오래된 단어 형태인 이름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대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른다면, 그 순간 마음속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틀림없이 내 마음속에 무언가가 움직일 것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서는 나의 이름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마르틴 부버Martin Buber(1878-1965)의 대답에 따르면, 이름은 가장 오래된 단어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 역사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개인 역사에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개개인의 이름은 사람들이 우리 자신을 향해 말을 걸었던 첫 단어이다. 따라서 우리 이름은 다른 어떤 것과는 달리 우리 자신과 직접 관련된 단어이다. 왜냐하면 이름은 우리의 궁극적인 유일무이함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유일무이함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나치 체제하에서 양심과 신앙을 지키려다 처형당한 예수회 신부 알프레드 델프Alfred Delp(1907-1945)는 수갑이 채워진 손으로 이런 글을 썼다. “생명과 사물에 다시 이름을 부여합시다. 저는 오랫동안 번호로 불리며 살았기 때문에, 이름 없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그가 늘 물건처럼 비인격적인 취급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 이름이 인격적이고 호의적으로 불러질 때 우리는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활력을 얻는다. 우리 안에 뭔가 약동하기 시작한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이름, 그것은 우리 자신이 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아직 한 번도 불러지지 않은 이름, 그래서 생명으로 일깨워질 수 없었던 부분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하지만 누가 우리 존재의 가장 궁극적이고 가장 깊은 내면을 어루만질 수 있는가? 그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느님뿐이시다. 그분의 사랑만이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때로 주님께 이렇게 청하는 것은 유익하다. “주님, 저를 부르는 것을 중단하지 마십시오. 제 안에는 아직도 부름을 받지 않은 것이 너무 많사옵니다.”

 

2.“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주님의 기도 첫 번째 청원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고 기도한다. 이 청원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이름이 제대로 불러지지 않았던 사실 곧 그 이름이 다양한 방식으로 멸시를 받거나 때때로 남용되어 더럽혀졌던 사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실제로 인류는 역사 안에서 감내하기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그 책임을 하느님께 돌리기도 했고, 나아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고 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실을 마르틴 부버는 적나라하게 이렇게 지적한다.

“신이란 단어는 인간의 말 중에 가장 부담스러운 말이다. 그 어떠한 말도 그처럼 더럽혀진 말이 없었고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았다. … 인간은 두려움에 싸인 삶의 멍에를 이 단어에 뒤집어 씌웠으며 또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 단어는 인간들의 뭇 짐을 지고 홍진 속에 던져져 있다. 인류는 그들의 종교집단으로 이 단어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들은 이를 위해 죽임을 당하고 또 이 때문에 죽어갔다. 이 단어는 이 모든 이들의 손자국과 그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있다. 그들은 온갖 어릿광대짓을 해 보이며 거기에 하느님의 이름을 적어 놓는다. 그들은 서로 죽이고 그리고 이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야기한다.”(『Begnungen』, 43)

사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 역시 하느님의 이름과 영예를 수시로 모독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실수나 잘못, 심지어는 악행마저 그분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고 있고, 우리의 고통과 곤경에 대한 책임을 그분께 돌리고 있지 않는가! 하느님을 오롯이 섬기고 있다 하면서도 그분보다 더 우선적으로 여기는 것들이 있고, 스스로 내 삶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가! 바로 이러한 그릇된 태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고 기도한다. 하느님의 이름을 다시 합당한 경외심으로 대하기를 간절히 청하는 것이다.

이제 이 청원을 조금 더 묵상하기 위해 ‘하느님 이름’의 의미를 세밀하게 살펴보자.

먼저, 하느님은 창조주로서 만물의 근원이시며 목적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은 인간과 모든 생명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모든 것은 각자 자신의 이름을 잃고 잘못된 이름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결과 판에 박힌 생각이나 고정관념, 획일적인 주장, 대중 등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면 전체주의자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하나의 외관, 하나의 구호, 하나의 이름에 복종하는 일이 일어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기도 첫 번째 청원 곧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가 우리 인간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 이름은 오늘날 우리 시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표현하였다. 이름은 한 인간의 성격 전체를 특징지었다. “이름은 본질과 인격의 신원과 그 생명의 의미를 표현하였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03항) 그러니까 하느님의 이름은 우리 인간에게 ‘아빠, 아버지’로 계시하셨던 하느님의 본질과 인격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이름은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 자신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 속에 깃들여 계시다. 그분은 그 이름 안에 머무시며 사신다.

그러면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은 무엇인가? 그 이름은 야훼YHWH인데, 이는 하느님께서 친히 모세에게 계시하신 이름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라는 소명을 받았을 때 하느님께 이렇게 묻는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탈출 3,13-15 참조)

하느님의 이름(YHWH)은 ‘나는 곧 나다.’, ‘나는 있는 나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이름은 ‘나는 항상 너희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로 이해될 수 있다. 곧 하느님은 과거에도 그러하셨고 지금도 그러하시듯이, 미래에도 줄곧 우리 인간을 위해 존재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변함없이 영원히 우리 인간에게 성실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늘 우리 곁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고 행동하심으로써 당신의 이름을 사실 그대로 증명해주신다.

한편 이름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이 이름 없는 어떤 세력이나 힘이 아니심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이교도들과는 달리 자기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하느님이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셨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하다. 사실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은 타인에게 자신을 알리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타인이 자신에게 다가와 자신을 더 깊이 알고 인격적으로 부를 수 있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 주는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03항) 하느님의 이름 덕분에 우리는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가운데, 그분의 이름은 우리에게 보호와 피난처가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축복하고,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고 극복한다. 기도 가운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고백에 이르기도 한다. ‘당신은 분명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마치 이 세상에 저 혼자 있는 것처럼 느낄 정도로 당신은 저를 위해 존재하십니다. 당신은 저를 바라보시고, 제 말에 온통 귀 기울이십니다. 당신은 저를 알고 계시며 또한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저를 돌보아주십니다. 저와 함께 고통을 겪으십니다. 제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당신은 제 곁에 계시며 저를 도와주십니다. 제 곁을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이 너무 존귀해서 직접 부르지 않았다.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그분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 하느님의 이름(YHWH)을 ‘주님’(Adonai, Kyrios)이라는 명칭으로 바꿔 읽었다. 그분 이름의 신비가 세속화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3.‘거룩하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에 나오는 ‘거룩하다’는 단어는 무엇보다도 도덕적 혹은 윤리적 완전함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일반적인 것 곧 속된 것들로부터 철저히 구별되고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성경의 맥락에서 내가 어떤 사물이나 인물을 ‘거룩하게’ 여긴다면, 나는 그것을 세속적인 것과 구별하여 다른 영역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신앙인이 ‘하느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고 기도할 경우, 그는 먼저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 죄스럽고 불경스런 이 세상에서 마땅한 흠숭과 찬양과 찬미를 받으시기를 청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분의 거룩함이 이 세상에서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찬란하게 드러나기를 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빛내기 위해 자신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께 그분의 본질에 상응하는 자리를 내어드리는 일, 그분을 우리 삶의 첫째 자리에 모시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께 최상의 경외심과 영예를 드리도록 우리가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최상으로 경외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거룩하신 그분을 드러내는 삶을 산다면, 이는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고 기도한다면,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거룩하게 되시기를 기도하는 것과 같다.

프랑스와 모리악François Mauriac(1885-1970)은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살아있는 감실은 분명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대화를 깊이 나누는 가운데 갑자기 그 사람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강렬하게 체험한 나머지, 말을 잃고 그 하느님께 경배하고 싶은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온갖 어려움과 곤경을 겪으면서도 세상의 유혹과 타협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충실히 지킨 사람들의 증언을 들을 경우, 우리는 거기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 자신의 행동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주는 사람,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다.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특히 우리가 우리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마태 5,44 참조). 요한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12,21) 하고 말한다. 이에 대해 성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현대인들 또한─흔히는 아마 무의식적으로─신자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해 달라’는 요청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분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모든 역사적 시기마다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 주고 … 그분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새천년기』 16항)

바로 이런 점을 교부들도 늘 재차 강조한다. 그들은 이교도의 환경에서 살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진리에 따른 삶을 살아 다른 사람들이 그 삶의 신비에 참여하고 싶을 경우 그리스도교가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의 다음 말씀이 크게 울린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 안에 거룩히 빛나시기를 청합니다. 사실, 우리가 착하게 살면 하느님의 이름이 찬미를 받으나, 우리가 악하게 살면 하느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당신들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비방을 받고 있습니다.’(로마 2,24)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신 그만큼, 우리의 삶도 거룩해지도록 기도합시다.”(『설교집』, 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