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호-2006년 봄-한사람
페이지 정보
작성자 cecil 작성일08-12-26 00:00 조회3,456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윤리문제 제쳐둔 생명과학
계속 진행될 땐 인류 파괴
황우석 교수 사건. 대통령으로부터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이 한때 그의 연구에 걸었던 기대가 높았던 만큼, 그것이 실체 없는 허상이었음이 드러났을 때 느끼는 좌절의 깊이도 컸다. 그런데 앞으로 비슷한 경우가 또 생긴다면, 그 때에 가서는 전세계 과학계까지 깊은 충격으로 몰아넣은 이번과 같은 실수가 이 땅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아니, 그것보다도, 사람의 생명 문제에 관한 과학자들과 일반 국민의 의식이 이번의 일을 계기로 크게 달라져서, 앞으로 이 분야의 연구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이번 일에 따른 파문이 많이 가라앉은 지금까지, 이 사건의 바탕에 깔려있는 문제에 관한 반성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비싼 대가를 치른 이번의 경험이 별 교훈마저 남기지 못한 채 잊혀지고 말 공산이 크다. 이런 상황이 무서운 것은, 윤리의 문제를 제쳐둔 채 생명과학이 계속 진행되면, 사람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치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체실험 피험자(被驗者) 유익이
과학·사회 이익보다 우선돼야
이제 돌이켜 생각해 보자.
이 엄청난 사태가 촉발된 계기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언뜻 보기에 아주 하찮은 듯한 한 가지가 의심을 받은 것이었다. 복제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사용된 난자 가운데 어떤 것을 바로 그 연구실에서 일하는 연구원에게서 제공받았다는 사실이 외부에 새어나오면서 이 연구 자체가 언론의 표적이 되었고, 그렇게 시작된 일이 이렇게까지 큰 사태로 발전한 것이다.
“연구원의 난자를 제공받았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라는 말인가? 수많은 환자,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우리 나라가 그야말로 수레바퀴 살의 중심점처럼 한가운데 서서 전세계로부터 몰려오는 석학들을 지휘해가며 이 분야를 선도하게 될 텐데, 연구원의 난자쯤 제공받았다 해서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황교수 자신이 수없이 반복해서 주장했듯이, 이처럼 의미 있는 일에 난자를 제공한 “성스런 여성들” 가운데 연구원이 끼어 있다고 해서 무엇이 잘못 되었다는 말인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근거와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그 기준에 걸맞게 우리의 의식이 올라가느냐 아니냐에 따라, 비싼 대가를 치른 이번의 사태가 우리 모두를 성숙시킬 수도 있고, 아무 의미 없이 시간과 함께 사라졌다가 기회가 오면 언제든지 다시 나타나는 유령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시, 무엇이 문제이고 그 근거는 어떤 것인가?
이번의 사태가 불거지던 초기에 생명 윤리를 내세우며 그 근거로 제시되었던 것은 <헬싱키 선언>이었다. 1964년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열렸던 제18차 세계 의학 대회에서 채택되어, 1989년 제41차 대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수정 보완된 이 선언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사람이 관련된 생의학적 실험을 할 때에는, 먼저, 그것이 당사자나 다른 사람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유익에 비해 예견할 수 있는 위험이 어느 정도인지를 면밀하게 검토하여야 한다. 그리고 피험자의 유익이 과학과 사회의 이익보다 언제나 우선해야 한다.”(헬싱키 선언. I,5) 비슷한 내용을 이렇게도 표현한다.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할 때에는 그것이 과학과 사회에 유익하더라도 그 이익이 피험자의 안녕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헬싱키 선언. III,4)
이런 선언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현대 의학의 발전을 위해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인간 생체 실험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관계자들의 양심 및 의식과 직결된 측면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거기에 적용할 원칙을 찾아 온 역사가 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번의 선언으로 채택되어 전 세계 의학 및 생명과학 연구자들의 윤리 기준으로 제시된 것이다. 생체 실험을 바탕으로 한 의학의 발전에 가장 뚜렷한 공헌을 한 이들 가운데 하나인 프랑스인 끌로드 베르나르(1813-1878)는 일찍이 이런 기준을 설정했다. “설령 과학과 의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다른 사람들의 건강과 복지에 도움이 될지라도, 피험자에게 해가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실험을 해서는 안 된다.”
‘윤리문제가 과학의
발목을 잡는다’의식은
위험스러워
“<과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다른 사람들의 건강과 복지에 도움이 될지라도>… 그런 실험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런 기준에 동의할 수 있는가? 과학의 발전과 다른 사람들의 건강이나 복지에 도움이 된다는데, 몇 사람쯤 희생시킨들 그것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런 일이라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할 일이 아닌가?
우리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진보적 입장을 자타가 공인하는 한 신문은 그 사설에 이렇게 썼다. “과학이 윤리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윤리가 과학을 모두 통제하려 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우리 국민의 일반적 생각이다. 극히 상식적이다. 물론 윤리가 과학을 <모두> 통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안이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것이라면 이런 식의 어정쩡한 표현으로써는 한참 부족하다. 실제로 이런 식의 입장에 헬싱키 선언을 받아들일만한 자리가 과연 있는가? 이런 입장이라면 오히려 과학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경우, 윤리 문제는 잠깐 눈감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설 여지가 널리 열려 있는 것은 아닌가?
실제로 이번에 황교수가 복제배아줄기세포 수립에 성공했더라면, 윤리 문제는 적당히 넘어간 채, 온 국민은 계속 그에게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이런 생각, 이런 태도를 유지하는 한, 황교수 사건과 같은 일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과학계와 일반 사람들의 의식을 결정한다면 인류는 그 역사에서 제일 가공할 방향으로 자신을 몰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논리
종국엔 모두를 비참하게 해
인간 생명은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태 16,26) 사람은 그 자체가 목적일 뿐 어떤 경우에도 수단이 될 수 없다.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한 사람쯤 희생시킬 수도 있다고 하는 생각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비집고 들어오는 순간, 인간은 자기부정, 자기파괴의 논리 속으로 빠져든다. 한 사람을 희생시킬 수 있다면, 그 한 사람은 두 사람이 되고, 그렇게 해서 결국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희생시키지 못할 사람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상대가 사람일 경우 <하나>라고 하는 경계가 무너지면, 모든 담이 무너지고, 따라서 인간과 짐승의 경계도 사라진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이 얼마나 오랫동안 인류를 엄청난 착각 속에 빠뜨렸던가? 전체를 위해서라면 소수의 개인은 희생시켜도 좋다는 생각, 그런 의식세계 속에서 삶을 다 바친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인류>를 사랑하려다가 결국 <한 사람>도 사랑하지 못했다.”
사람은 우주 안에서 숫자로
그 가치를 계산할 수 없는 존재
우리가 참으로 사람답게 살려면, 많은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우리의 무서운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 인간을 참으로 살리고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또 어떤 여자에게 은전 열 닢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닢을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루가 15장)
여기서 세 가지 비유는 결국 같은 진리를 말한다. 사람은 이 우주 안에서 숫자로 그 가치를 계산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이며, 그런 계산법이 아무리 비합리적으로 보여도 그것만이 사람을 실제로 살리고 그 존엄성을 지키는 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을 대할 때 다른 사람은 다 잊어버리고 그 한 사람에게만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인류애>는 흔히 우리를 속이고 심리적 알리바이를 제공할 뿐이다. 많다는 말은 그만큼 장소를 많이 차지한다는 뜻이기도 하여, 따지자면 <공간적 관점>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바로 눈앞에 서 있는 한 사람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적 관점>에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사람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이 이루어진 순간부터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세상에 태어날 때까지의 어떤 단계에 있을 때에도 항상 똑같은 사람이다. 수정 후 며칠 동안은 단순한 세포 덩어리였다가 그 후 성장과정의 어떤 단계를 거칠 때에 갑자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모태에서 이루어지는 성장 과정의 어떤 단계에서만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그 이전 단계에 있는 생명체를 마음대로 처분한다면, 그것은 살인행위이다.
이것이 사람의 생명을 보는 눈의 기준, 생명 윤리의 바탕이다. 이것을 놓치면, 과학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행복해지기보다 오히려 더욱 불행해진다.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과학 일반, 특히 정보기술, 생물학, 천문학은 오늘 우리의 의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가공할 능력을 손에 쥐게 된 인간이 어떤 윤리의 의식을 가지고 어떤 가치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대자연과 인류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죽음과 생명, 절망과 희망으로 통하는 문의 열쇠가 모두 지금 우리 손에 쥐어 있는 것이다.
후에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 원인은 우리가 스스로 죽음의 문을 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도 마찬가지여서, 인류가 과학 기술 덕분에 참으로 행복해진다면, 그 역시 우리가 스스로 생명의 문을 열었기 때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