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호 2008 여름-어린이, 어른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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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12-26 00:00 조회3,55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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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오후 모처럼 시간이 나서 새 교구청 넓은 잔디 운동장에 나가 풀매기를 하고 있는데, 어린이의 목소리가 등뒤로 들려왔다. 돌아보니 초등학교 아래 학년 어느 반쯤에 다닐 듯한 어린이였다. 넓은 잔디밭과 조용하면서도 시원하게 나 있는 구내 도로가 있기 때문에 동네 어린이들이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가지고 더러 놀러 오는 일은 있지만, 나에게 와서 말을 거는 일은 없었는데, 오늘은 좀 달랐다.
“그래요, 좀 도와주세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 어린이들이 사방으로 퍼지더니 임무를 물었다.
“파란 것은 다 뽑아내면 돼요?” 요즈음에는 잔디도 파릇파릇 돋아나기 때문에, 그냥 그렇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잔디는 빼놓고 파랗게 나 있는 것은 다 뽑아내면 돼요.” 그러나 그 여린 손으로 잡초를 그냥 뽑는 일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호미로 잡초를 뿌리에서부터 파내면 어린이들은 그것을 주워 모으는 일만 하게 했다. 어린이들은 “여기도 있네… 야, 이것은 엄청 크다… 참 재미 있다.” 하면서 신이 나서 일을 하였다.
이 동네 아이들과 사귈 날을 벼르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나는 좋은 기회다 생각하고 조금 후에는 “곧 오마”하고는 아이들에게 주기 위해서 먹을 것을 가지러 갔다. 내가 몇 걸음 가자, 한 아이가 말했다. “호미 가지러 가시는 거예요? 여러 개 좀 갖다 주세요.” 나는 마침 식당에 있던 유과를 들고 호미 두 개를 더 가지고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잠시 일을 한 후에 “일을 했으니 우리 이제 이것을 먹고 해요.” 하면서 상자를 여니, 제일 나이 많은 어린이가 “저희는 일을 한 것 같지 않은데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유과를 한 조각씩 주니 어린이들은 받아서 천천히 먹었다. 그것을 상자째 가져왔기 때문에, 환호성을 지르며 와르르 달려들어 과자를 집어들고 잽싸게 먹을 줄로 생각했던 터라, 어린이들이 천천히 먹는 이런 모습부터가 내게는 좀 의외였다. 다 먹은 사람부터 또 한 조각씩을 집어 주니 그만 먹겠다는 것이다.
혹시 다른 과자를 가져다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에, “무엇이 제일 맛있어요?"”하고 물으니, 여자 어린이가 대답했다. “나는 밥이 제일 맛있어요.” “사탕이나 과자보다 밥이 더 맛있어요?” 적이 놀라며 다시 물으니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면서 자기 동생은 이걸 좋아할 거라며, 그 애는 벌써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서 이가 다 망가졌다는 것이었다. 남자 어린이에게 물었다. “사탕 맛있어요?” 그랬더니, 그 어린이 역시 아니라는 것이었다. “네 살 때 까지는 사탕을 많이 먹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맛을 느끼지 못해서 지금은 전혀 안 먹어요.” “그러면 무엇이 제일 맛있어요?” 하고 내가 다시 묻자 “저는 건강에 좋은 우리나라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김치도 맛있고요, 된장도 맛있어요. 몸이 뚱뚱해질까봐서 고기는 절대 안 먹어요.” 그리고 탄산음료는 이와 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도 저희끼리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생을 생각하던 어린이에게 동생한테 갖다 주라며 유과를 큰 것으로 골라 주니 아주 좋아하며 받는 것이었다. 여자 아이는 어린이 집에 다닌다 했고, 남자 어린이들은 초등학교 1학년과 3학년이라고 했다. ‘이 어린이들은 확실히 새 시대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한 시절에 태어나 자라난 우리 세대에게는 사탕과 과자가 어린이들에게 당연히 환영을 받고 음식 중에서 고기는 제일 인기있는 식품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일에 절도를 지키기가 쉽지 않은데, 이 어린이들은 이 일에 관한 한 이미 자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 어린이가 말했다. “할아버지 혼자 사세요? 아니면 할머니 하고 같이 사세요? 할아버지 집은 어디에요? 한 번 가보면 좋겠다.” 다른 어린이는 “할아버지 내일도 오세요? 오시면 좋을 텐데, 저는 내일도 올 꺼예요.” 그리고는 저희끼리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내일은 학교에 가야 하는데 어떻게 오니?” “방과 후에 오면 되지 뭐.” 자전거들을 잔디 운동장 한 가운데에 세워 놓았기 때문에, 혹시 거기에서 탈까 하여 “자전거는 잔디 위에서 타면 안 돼요” 했더니 한 어린이가 대답하였다. “그러면 잔디가 죽어요.” 나는 신기하고 반가워서 “누가 가르쳐 주었어요?” 하고 물으니 그 어린이가 대답했다. “엄마가요.”
이렇게 어린이들과 할아버지 친구가 되어 보낸 오후 한 때가 기울어 헤어질 시간이 되자 “나는 이 집에서 살아요” 하며 사제관을 향해 걸어갔다. 어린이들은 나를 따라오다가 집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한 어린이가 말했다. “할아버지, 거-언-강하게 잘 계세요.” 이때 그 어린이의 억양이나 태도가 어찌나 마음속 깊이에서 우러나오고 진지한 것이었던지, 나는 난생 처음으로 그런 인사를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삶의 기본 자세에 관한 한, 이 어린이들에게 무엇을 더 가르칠 필요가 있으며 또 가르칠 수가 있을까? 어린이들과 헤어진 다음 나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을 도우려는 마음, 먹을 것을 두고 동생을 생각하는 심성, 인간에게 가장 강한 본능이라는 식욕을 일찌감치 다스려 욕망이 이끄는 대로가 아니라 건강에 정말로 필요하고 좋은 것만을 섭취하는 태도, 다른 이들과 거리낌 없이 의견을 교환하고 깊은 마음을 전하는 자세.
그 세 어린이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이런 품성들을 계속 지켜가는 한, 그들은 하늘나라에 사는 것이 아닐까?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18,3). 예수님의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이런 어린이들은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와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이 땅에 내려온 하늘나라의 한 조각을 가리켜 성서는 “낙원”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이런 어린이들은 이미 낙원에서 산다. 우리 어른들이 말과 행동으로 그들의 마음 밭에 잘못된 생각과 습관이라는 잡초의 씨앗을 뿌리지만 않는다면. 남에 대한 배려, 본능적 경향 가운데에서 해가 되는 것에 대한 절제 등, 삶에 따른 가장 중요한 가치와 규범의 씨앗을 거기 심어 잘 가꾸기만 한다면.
그래서 옛 시인은 노래했던가?
하늘에 뜬 무지개
그것을 바라보면
내 마음은 뛰어오르네.
어린 시절에 그랬는데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네.
늙어서도 그렇게 되기를.
그렇게 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지금 내 삶이 여기서 끝나기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내 삶의 하루 하루가
남을 향해 열려있는 천진스런 마음의 줄로 엮어지기를.
- 윌리엄 워즈워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