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26호> 1%가 모자라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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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ecil 작성일10-11-09 00:00 조회3,38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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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성서 나누기 모임에 갔다. 회원 가운데 한 분의 집에서 가진 모임이었는데, 20명이 넘는 수였다. 평일이었기 때문인지 남자는 너댓 명, 대부분은 여성들이었다. 20대에서 80대까지 연령층도 다양했다. 내가 갔을 때에는 묵주 신공을 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양팔을 들어 올린 자세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기도가 끝나자, 이번에는 몇 분이 각자 그동안 외웠던 성서 대목을 큰 소리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 말씀이 왜 자신에게 깊이 와 닿았는지를 짧게 설명하였다. 다음에는 그 모임에서 늘 함께 외우는 성서 대목을 다 같이 소리내어 암송하는데, 온 몸을 움직이는 율동을 곁들여서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더욱 활기와 생동감있게 표현하였다. 마치 유치원 어린이들이나 초등학교 학생들의 모임 같았다.
어떤 분은 자기의 평소 기질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그런 분위기를 처음 대했을 때, 여기가 혹시 사교집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했다. 그럴 만도 했다.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 온몸을 동원해서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방식으로 하느님 말씀을 나름대로 표현하고, 그러는 가운데 동작을 반대로 한다든가 너무 서툴게 해서 다른 이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모습은 참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성서 한 대목을 외우겠다고 앞에 나서서 기세 좋게 시작은 했지만, 그만 기억에 혼란이 일어나 우물쭈물하는 바람에 ‘가서 컨닝 좀 하고 와야겠구만’ 하는 사람들의 애교있는 역성에 얼굴을 싸쥐고 퇴장했다가, 한참 후에 다시 나타나서 결국 그 대목을 다 외우고 의기양양해서 돌아가 앉는 정경도 영락없는 유치원 풍경이었다. 그것이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 사이에서 다시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모임에 가기 전에, 몇몇 회원이 와서 자기들은 1프로가 모자라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었다. 이제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분들이 정말 어디가 모자라는 이들인가? 각자의 분야에서 한 가락 하는 것으로 말하면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분들이 많고, 그 중에 어떤 분은 서울에서 성서 공부 혹은 나누기 모임이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다 섭렵했다고 했다. 직장 따라 이곳으로 와서도 성서 공부가 하고 싶어서, 성당에서 우연히 만난 교우에게 물으니 이 모임을 소개해 주어서 참석하게 되었는데, 아닌게아니라 처음에는 대단히 낯설게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단계를 통과하고 나니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과, 여기에서만은 무슨 말이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친밀감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또 한 젊은 여성은 어머니 혹은 할머니뻘이나 되는 분들 사이에서 세대 차이 때문에 처음에는 외톨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생각이 들어설 여지가 없게 되었고, 의미 있는 삶을 찾기 위해서 그동안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 온갖 분야의 책을 수없이 읽어 왔는데, 이 모임에서 마침내 해답을 찾은 것 같다고 했다. 또 다른 분은 우울증에 걸려서 오랫동안 절망 속에 살았으나 이 모임에 와서 하느님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자기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것을 느끼면서 그 증세가 사라지고 지금은 사실상 다 나았다고 했다.
1프로가 모자라는 사람들. 나는 이 모임에 참석하면서, 문제의 이 1 프로가 이분들에게 원래 모자랐던 것이 아니라, 이 모임의 진행 방식과 분위기가 이들에게서 그 1프로를 거두어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다 보면, 차츰 자기에게서도 그 1프로가 빠져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1프로란 무엇인가? 사회생활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묻었던 온갖 인습, 자신의 참 모습을 속 깊이 숨기고 겉으로만 남의 눈에 맞추고 사노라고 겹겹이 입고 있던 껍질, 때로는 교양이라는 우아한 이름까지 달고 있었던 온갖 사회적 겉꾸밈. 한 마디로, 체면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이 어찌 1프로에 불과하겠는가? 하지만, 우선 시작하기로는 그 1프로 만으로라도 이미 대단하다. 그 얇은 껍질만 훌훌 떨쳐버려도 이제 <속 사람>, <참 나>가 밖으로 나올 태세가 되고, 하느님 말씀이 그 가운데 들어오면 그 속에서는 모두가 어린이로 돌아간다. 예수님의 표현으로는 확실히 <어린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마태 18,3-4).
동양의 옛 선현들은 그런 사람을 <무의진인無依眞人>이라고도 했다. 옷을 걸치지 않은 참 사람이라. 창세기를 보면, 원래 낙원에서 사람은 옷을 입지 않았다. 옷은 잘못을 저지르고 그렇게 해서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을 숨길 필요가 생기면서부터 입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모임에서는 처음부터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웃음과 단순한 동작이 그 옷을 흘러내리게 하
는 것이었다.
잃어버렸던 낙원을 이 모임에서 찾아낸 칠순 가까운 어떤 의사 선생님은 직장 따라 이 지역을 떠나 멀리 가고 나서도 가끔 이곳의 모임에 참석하고,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도 그 주간의 성서 대목을 두고 깊이 묵상한 것을 글로 적어 보낸다. 그러면 모임에서 그것을 정성껏 읽는다. 그렇게 해서 그분은 글을 통해 이 모임에 참석하게 되는 것이다.
웃음치료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각박하고 무겁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웃음을 잃고 또 잊고 살다보니 여러 가지 마음의 병이 생기고 그것이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쳐 건강을 상하게 하는 일이 많은데, 웃음을 회복하면 정신과 육체가 활기를 얻게 된다는 원리일 것이다. 어찌 웃음뿐이겠는가? 웃고 울고 말하고, 이 세 가지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로서, 인간성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는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 세 가지를 잘 지키고 있는가? 달리 표현해서, 내가 말할 때, 나는 정말 말했던가? 내가 웃을 때 나는 정말 웃었던가? 내가 울 때 나는 정말 울었던가? 이런 일들이 요즈음 얼마나 자주 저 깊은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겉으로만 그런 척하게 되어 어정쩡하고 어설픈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그래서 말할 때에도 실상은 말하지 않고, 웃을 때도 깊은 속에서는 웃지 않으며, 울 때도 겉으로만 슬픈 척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다가 어떤 자리에서 이 모든 것들을 다시 찾아내어 허리를 잡고 웃다가 눈물까지 찔끔 흘리고 나면 나는 얼마나
큰 자유와 기쁨을 느끼게 되던가?
“나의 백성은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생수가 솟는 샘인 나를 버리고, 갈라져 새기만하여 물이 괴지 않는 웅덩이를 팠다”(예레 2,13).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저질렀던 잘못을 새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히 만회하였다. 그래서 갈라져 새기만하여 물이 괴지 않는 웅덩이를 파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생수가 솟는 샘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흡족히 갈증을 풀고 유유히 노닐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이 각박하고 힘든 삶을 자신 있게 대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면, 이제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게”(2고린 4,8) 된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갈라져 새기만 하여 물이 괴지 않는 웅덩이를 파고 있는가? 한 나라에서 가장 출세를 한 사람, 재산 순위 1·2위를 다투던 부자, 전국에서 제일가는 미모로 뭇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여인. 그런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차츰 삶의 참다운 기쁨과 보람이 그 방향에 있지 않다는 것을 더 널리 깨달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어디에 그것이 있는가? 참된 기쁨은 어디에 있는가? “여자가 해산할 즈음에는 걱정이 태산 같다. 진통을 겪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와 같이 지금은 너희도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와 만나게 될 때에는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1-22).
“내가 다시 너희와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지금 그때에 살고 있다.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던 때는 지나가고 <성령을 통해서>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만나 주시는 때, 아니 그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시는 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그날이 오면” 하시는 표현으로 예고하신 성령의 때는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순간 성령께서는 큰 물같이 우리 안으로 밀려 들어오신다.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이 ‘그 날’이 당장 이 자리에 들이닥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몸으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누구에게 전달해 줄 수가 없고 이해시킬 방법도 없다.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을 겪어서 아는 사람들이 말뿐 아니라 그 얼굴 표정, 활기찬 삶을 통해서, ‘사랑, 기쁨, 평화 등 성령의 열매’(갈라 5, 22-23참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증언이라고 한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동네로 돌아가서 바로 그 일을 하였고, 그 증언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예수께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났다면, 그것을 증언하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이며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가장 확실한 표이기도 하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