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31호>-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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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ecil 작성일11-06-28 00:00 조회3,56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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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2010년 9월 19일 교황 베네딕도 16세께서는 존 헨리 뉴먼 추기경(1801-1890)을 복자품위에 올렸다. 이분이 성인 반열에 드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옥스포드 대학을 나와 그 대학에서 가르치는 가운데, 당시 영국교회의 형편을 돌아보며 근본적 쇄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서, 이른바 옥스포드 운동을 일으키고 그 선봉에 섰던 사람. 젊었을 때는 가톨릭에 대해 극도의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가 후에 많은 사람들과의 교분, 그리고 자신의 연구를 통해 참된 종교는 가톨릭임을 확인한 다음에는, 함께 했던 동료와 주변 사회, 자신의 정신적 생명을 가꾸고 길러온 요람과 같은 영국교회를 떠나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당시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인물. 한 마디로, 양심이 가리키는 진리를 위해서는 사회적 죽음이라 할 수 있는 온갖 인간관계까지 서슴없이 끊었던 뉴먼을 두고 베네딕도 16세께서는 추기경 시절에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다.
“뉴먼 추기경의 삶과 그분이 하신 일은 <양심>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거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뉴먼은 어떤 것이 일단 진리로 판명되면, 자신의 기호나 개인적인 생각을 모두 희생시켜서라도 그것을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자신의 느낌이나 우정 또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등 그 어떤 것도 양심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었다. 같은 이유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해도, 한 집단이 일반적으로 어떤 경향을 보여도, 그것이 진리에 비추어 거리가 있을 때에는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진리에 따를 것을 그는 강조한다. <양심의 사람>이란 세상일을 이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의미한다. <양심의 사람>은 관용, 일신의 평안, 성공, 출세, 사람들의 평판, 그 밖에 어떤 것도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면, 그것을 깨끗이 포기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뉴먼은 영국이 낳은 또 다른 양심의 증인인 토마스 모어(1478-1535)와도 연관시켜서 볼 수 있다.”
토마스 모어는 어떤 인물인가? 일반인들에게는 [유토피아]의 저자로 더 잘 알려진 그는 한 때 영국에서 왕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 출세의 정점에 서 있었는데, 당시 헨리 8세의 부당한 결혼에 양심상 동의할 수 없는 입장을 고수했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후에 성인으로 인정되신 분이다. 감옥에 갇혀 처형만 기다리고 있던 중, 일체의 필기도구까지 빼앗겨 숯 토막으로 써서 자녀들에게 보낸 쪽지와, 형장에서 마지막 남긴 말은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기도 중에 너희를 누구보다도 잊지 못하며 사랑이 넘치는 너희의 아버지가 한 토막의 숯으로 썼다… 자, 이제는 종이도 끝이 나니 잘들 있거라. 우리 주님께서 너희를 참되고 의리 있고 정직한 사람으로 지켜주시기를 빈다.” 그는 단두대 위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으면서 잠시 하느님의 자비를 빌고 난 후, 그에게 용서를 청하는 형리를 포옹한 다음,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고, 둘러서 있는 이들에게 왕을 위해 기도하기를 권유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 선언하였다. “나는 왕의 충실한 신하로 죽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에 앞서 하느님의 신하로 죽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19장에는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묻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참된 삶, 보람 있는 삶, 후회하지 않을 삶을 두고 묻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준비 단계였다면, 이제부터는 인생의 본무대에 올라가 본격적으로 살아야 하는 시점에 이르러 한 젊은이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스승에게 와서 조언을 청하는 장면이다. 예수님의 답은 두 단계로 나간다.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어느 계명입니까?” 하고 묻는 젊은이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그가 잘 알고 있는 계명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들려주신다. 그 젊은이가 “저는 그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께서는 두 번째 단계에 들어가 말씀하신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부자 청년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너무 지나친 주문이 아닐까? 역사를 통틀어도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버리고 따른 사람은 몇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그렇게 어려운 일을 왜 젊은이에게 권하실까? 한 단계 낮추어 누구나 따를 수 있는 정도를 권하셨더라면, 오늘과 같이 복잡한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들, 특히 같은 문제를 안고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 넣고 또 다른 말씀을 읽으면, 이해가 한 발짝 앞으로 가는 것 같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마태 13, 44-46).
밭에 묻혀 있어 아무의 눈에나 띄지 않는 보물,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모르는 진주. 이 두 가지 비유에서 공통되는 것은 그 참된 가치가 아무의 눈에나 띄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진가를 알아 본 사람은 지금까지 애지중지하던 것들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선뜻 처분해서 참으로 귀중한 것을 얻고 싶은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부자 청년에게 문제는 하늘나라가 얼마나 큰 보물인지, 얼마나 값진 진주인지를 몰랐다는 점이다. 그 참된 가치를 알았더라면, 그 사람도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치우면서도 전혀 아까운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시나? 재산의 소유 자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하느님은 가난뱅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입을 것이 없어서 헐벗은 모습을 보셔야 희열을 느끼고 직성이 풀리는 분이실까? 그렇다면 이 세상의 재화는 무엇 때문에 만드셨을까?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서 대답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가 16,13).
그렇다. 그것이 재물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출세든, 성공이든, 모든 형태의 재화는 사람이 부려먹는 종이 되기 위해서 거기 있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종은 내가 밑에 두고 내 뜻대로 부려먹지만, 주인은 오히려 내 위에 서서 내 자유를 빼앗고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나를 부려먹는다. 어떤 재화든 종으로 부려먹을 수 있으면 다 좋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나를 묶어서 내가 거기에 끌려 다니는 형국이 되면,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금송아지처럼 우상이 된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했다가 불과 반세기 만에 잘 사는 나라 그룹에 속해서 세계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한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그래서 자동차, 주택, 가전제품 등 옛날 같으면 미국에서나 가능했고 우리로서는 꿈속에서나 그리던 것들이 많은 국민의 생활 속 깊이 들어왔다. 그런데, 전에는 없었거나 잘 눈에 띄지 않던 절망의 그림자가 점점 더 사람들의 정신과 사회 전체를 덮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그만큼 많다. 이렇게 되니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게 떨어졌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큰 것이다. 자살자들 가운데에는 정치, 경제, 연예, 문화계에서 정상에 올랐던 이들도 많다. 요즈음에는 예를 들어 연예계에서 최정상의 자리에 오른 이들을 보면 마음 한켠에서 걱정스런 느낌마저 든다. 저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환경에서 자극적인 조명을 받다가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조용하고 텅 빈 듯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면, 그 공백을 어떻게 소화하며 살까?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언젠가는 내려오지 않을 수 없는 저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들이는 노력 뒤에 따라올 수밖에 없는 허탈감은 어떻게 견디어낼까? 이런 생각 때문이다.
반대쪽을 보아도 마찬가지일 뿐 아니라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다. 성공한 사람은 한때만이라도 꿈을 이루어 보았다는 생각, 그리고 그 기회에 모아둘 수도 있는 재산을 가지고 나름대로 여생을 살아갈 수가 있겠지만, 성공한 몇 사람 뒤에는 그 수천 수만 배나 되는 사람들이 삶에서 어느 면으로도 각광을 받지도 못하고 뚜렷하게 이룬 것도 없이, 적어도 남이 보기에는, 군중 속에 묻혀 극히 평범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런 이들이 자신들과 너무나 다른 세상, 동료 인간이라고 느끼기에는 너무나 차이가 나는 세계의 존재들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을 보며, 그만큼 더 초라하게 나타나는 자신을 어떻게 견디어낼까?
가끔 터지는 사건들을 보면, 이른바 잘 살게 되었다는 지금에 와서 극적으로 대조되는 이 두 세계 중 어느 편에 속해 있어도, 정신 깊숙이에 안정을 찾지 못하고 불안하거나 사막처럼 황폐한 가슴을 부여안고 사는 이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다. 이것은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위에 든 분야 외에도 사람들의 정신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각종 통계 수치가 말해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런 세상에 “제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온 젊은이의 이야기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한 현실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람들이 얻으려고 그렇게나 애쓰는 모든 것들은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그것이 정신 속에 기본 토양처럼 깔려 있으면, 그런 사람은 성공을 했으면 한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삶을 여유 있게 대하며 주어진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공과 실패 둘 다 더 큰 파멸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고, 삶은 한 번도 주인으로서 살지 못하고 끌려 다니다가 끝마칠 수가 있다.
젊은이여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이 질문은 상대방의 이해력이나 지성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마음에 대고 하는 것이라는 것이 뉴먼의 견해다. 그래서 이 질문은 실상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는 어느 쪽을 택하고 싶은가? 마음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그에게는 뼈아픈 경험이 있었다. 헨리 뉴먼에게는 찰스라는 동생이 있었다. 그는 옥스포드 재학 시절, 자신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가치관 쪽으로 기울어지는 동생을 설득하기 위해 수없이 토론을 하고 여러 가지로 애를 써 보았지만, 그를 설득하는 데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동생에게 아주 거칠게 말했다. “너는 어떤 말도 들을 마음 상태가 아니구나!”
그 경험은 뉴먼의 사상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하느님 혹은 절대 가치와의 관계에서 인간은 이론적으로, 이치를 따져서 하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떡이며 믿게 되는 것이라기보다, 마음 상태가 일찍부터 잘 형성되어야 말이 귀에 들린다는 것이다. 1879년 추기경으로 선임되었을 때 택한 좌우명이 그의 이런 기본 신념을 잘 말해준다. Cor ad Cor Loquitur. “마음이 마음을 향해 말한다.” 우리 식으로 옮긴다면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앞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 채 지금 단계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준비는 마음 밭을 잘 가꾸는 일이다. 말은 그 밭이 제대로 가꾸어진 뒤에야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말씀으로 할 수 있는 가르침을 다 주시고 난 다음, 마지막 저녁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 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 올 일들도 알려 주실 것이다. 또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요한 16,12-15).
지금 깊은 의미에서 인생의 진로를 두고, 기도하면서 찾고 고민하는 젊은이에게는 반드시 풍요한 열매가 기다리고 있다.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 주시라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아름다운 미래가 펼쳐진다.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돌아간 젊은이도 그 뒤에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고, 또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직접 겪으며, 옛날 스승의 말씀이 계속 화두로 남아 그의 걸음을 계속 조정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간”(마태 21,29) 맏아들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