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

Home > 글모음 > 글모음

SNS 공유하기

<쌍백합 32호>-대한민국은 행복한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6-28 00:00 조회3,279회 댓글0건

본문

 

대한민국은 행복한가?

 

2011년 1월 16일 오후 8시, KBS 일요 스페셜에서는 <대한민국은 행복한가?> 하는 질문을 화두로 한 기획물을 방영하였다. 우리나라와 사회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요약해서 보여 주고,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도 특히 우리와 대조되는 덴마크와 비교함으로써 우리 문제의 뿌리와 해결의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도 넌지시 보여주었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생각할 때, 이른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라는 일류급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전체 학생 중 1.4%에 불과하고, 서울 소재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도 전체의 7.4%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한국방송의 기획물을 보고 그들이 살인적 경쟁의 풍토에서 얼마나 심한 중압감 속에 살아가는지를 더욱 절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온 나라가 돈을 좇아 무한 경쟁의 숨 가쁜 뜀박질 속에 휘말리고, 그것이 심지어 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되어 학년이 높아질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그래서 늦게 끝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서도 사설학원 몇 군데를 겹쳐 다니고, 대학 입시가 가까워지면 잠을 거의 못 잘 정도로 내몰리고 있으니, 젊은이들이 그 육체적, 심리적 부담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는가? 또 그렇게 해서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의사나 법조인 등 이른바 좋고 안정적이라고들 말하는 전문인이 되면 이제 한 숨 돌리고 삶을 참으로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게 되나? 한 의사의 예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좋은 자리에 병원을 개업하여 고객도 상당하고 직원도 여러 명을 두어 남 보기에는 나름대로 안정된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본인은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안하여 야간 진료까지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의과대학 교수의 일상은 더욱 심각했다. 밤 10시에 집에 들어가니 가족이 생각잖게 빠른(?!) 귀가를 오히려 놀라워하며, 아이들이 잠든 다음에 퇴근했다가 잠 깨기 전에 출근해서 구경도 못하던 아빠를 보게 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라는 것이었다.

돈이 꼭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밥을 먹어야 하고 옷도 입어야 하며 집도 있어야 한다. 옷·밥·집은 그래서 우리에게 절대라고 할 만큼 소중하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에 관해서는 누구나 불안이나 걱정이 없어야 한다. 마음속에 그 걱정이 들어서기 시작하면, 그것은 심리 속에 부풀려져 남이 보기에는 충분히 가진 사람조차 불안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계속 더 쌓아두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도 드러난 바와 같이, 돈이 어느 정도까지는 행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그 정도를 넘어서기 시작하면, 그것이 행복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행복을 저해하는 단계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돈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좇느라고 참으로 인간답고 행복하게 사는 데에 써야 할 시간과 정신을 그 쪽에 빼앗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 행복도를 조사하면, 놀랍게도 경제 수준이 낮지만 가족 간의 유대와 사랑이 옛날 그대로 남아있는 나라가 항상 윗자리를 차지한다.
오늘날 우리와 인류는 자연환경의 오염과 파괴의 문제를 크게 걱정하고 있다. 기후 변화, 동물들 사이에 급증하는 치명적 질병이나 멸종 현상을 보며, 우리가 당장에 손을 쓰지 않으면 생명의 연쇄고리가 심각하게 훼손되어 이제 얼마 못 가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순간을 맞이할 것은 훤히 내다 보이는 일이다. 여러 나라를 거쳐서 최근에 우리가 겪고 있는 구제역 사태는 그때가 바로 눈앞에 닥쳤음을 말해준다. 그만큼,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연환경을 개선할 필요가 절박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밖>,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환경만 심각한 것이 아니다. 우리 <안>, 정신이 둘러싸여 있는 환경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그것이 밖, 물질세계만큼 당장 눈에 확 드러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심각성을 우리가 덜 느낄 뿐이다.

그런데 앞에서 소개한 영상물을 통해 우리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이 어떤 정신적 환경에서 살고 있는지를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도 보았다.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자살률, 특히 청소년들의 사망 원인 가운데에서 제1위가 자살이라는 통계는 충격적이다. 그것은 몸 속으로 들어가는 빵에 비해, 무한경쟁의 분위기 속에서 정신 속을 파고드는 말, 요즈음 유행하는 표현을 빌자면, 각종 저질 “정보”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오염된 문화가 빚어낸 결과다. 눈으로 읽고 귀로 듣는 것만 정보가 아니고, 1등만을 향해서 극도의 경쟁 속으로 몰고 가는 사회 전체의 분위기도 그에 못지않은 말이고 정보다. 그리고 성서가 말을 음식에 비유한 것은 이 둘이 서로 비슷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양쪽이 다 우리 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그렇고, 오염되었을 때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며, 둘 다 건강한 것을 섭취해서 잘 씹고 천천히 삼켜야  소화가 제대로 되어서 생명에 필요한 힘으로 바뀐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정신 속으로 들어가는 말, 언어가 저질이거나 오염되어 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내는지에 관해서 우리 사회는 근래 몇 가지 극단적인 경우를 통해서 절실히 체험했다. 얼마 전에는 막가파, 지존파라는 이름으로 통하던 사람들이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이 극악한 범행을 저질러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진 일이 있었다. 체포 되고서도 보통의 범죄자들과는 달리 머리를 숙이거나 얼굴을 가리기는커녕, 몸이 묶여 어쩔 수 없는 처지에서도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죽일 듯한 기세를 꺾지 않는 것이었다. 근래에는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젊은이가 갑자기 거리에 나가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러 엉뚱한 사람을 죽이는 사건도 벌어졌다. 막가파와 지존파들은 엽기적 살인을 저지르는 내용의 만화책, 소설책을 탐독하다가 그렇게 되었고, 최근에 일어난 일은 인터넷을 통해 종이책의 자리를 차지해가는 영상물에 빠져 시간을 보낸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고 한다. 이런 극단적 행동은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심각한 것은 사람의 정신에 음식의 구실을 해야 할 말, 문화가 오염되어 있고, 사람들이 그것을 들이마시면, 극단적으로까지 가지는 않는다 해도, 결국은 사람을 같은 방향으로 이끌어, 그 삶이 무미건조해지고 우울증에 빠지고 그것이 심하면 극단적 선택까지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반 이상이(어떤 이는 70%라고도 한다.)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지난 반세기 동안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축에 끼었다가 제일 부유한 나라 축에 끼게 되었다. 세상에 다른 예가 없던 일이다. 그 점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노력 끝에 도달해 있는 대한민국이 행복이라는 궁극적 지표를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면, 다시 꼴찌에 속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참으로 허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슨 해법이 있을까?

앞에서 언급한 영상물에서도 우리와 대조되는 덴마크 사회의 예를 들어 그 해결의 방향을 넌지시 알려주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와 국민을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일에 책임을 진 위정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이 분명한 가치관과 사명의식을 가지고 국민 모두가 미래에 대해 지나친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한 때는 권력, 부, 명예 등 각 분야에서 뭇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조차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치 아무도 행복할 수 없는 망국적 무한경쟁의 분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덴마크처럼, 국가 공동체가 국민의 미래를 보장해주면, 각자는 세금을 많이 내더라도 심리적 걱정에서 해방되어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적은 것에 만족하며 기쁘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살림을 맡은 이들이 그런 환경을 만들어줄 때까지 그 사람들만 쳐다보며 산다면, 우리는 하루도 제대로 살지 못한 채 삶을 마칠 수도 있다. 그리고 더 할 수 없이 귀한 생명을 받아서 태어난 삶이 다른 사람의 처분에 따라 지나치게 영향을 받는다면, 그 또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어울리지 않는다. 더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야 말할 것도 없다. 신앙인이라면, 이 세상 환경이 어떠하든,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에게서 참으로 사는 법을 배워,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의 문제는 나라 전체가 <물질>, 경제라는 이름의 <다른 신> 앞에 엎드려 그것을 섬기고 있다는 데에 있다. 멀리 두고 생각했을 때에는 경제 성장의 고지에만 도달하면, 약속의 땅, 행복과 자유의 나라가 펼쳐질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땅에 들어와 얼마쯤 살아보고 나니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우리 마음속에서 그것을 신처럼 떠받들도록 속삭인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얼마나 큰 거짓말의 아비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인류 역사의 비극은 항상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속아 넘어간 데서 출발하였다. “야훼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가운데 제일 간교한 것이 뱀이었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 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되,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그러자 뱀이 여자를 꾀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 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 주었다. 남편도 받아먹었다”(창세 3,1-6). 우리네 삶 속에 슬픔과 고통이 들어온 연유에 관해서 성서는 소박하지만 깊은 의미를 지닌 이야기를 이렇게 전해준다.


이 성서 이야기에서 보듯이, 세상에 고통과 절망, 퇴폐와 죽음이 몰아닥친 역사는 인간이 “거짓말의 아비”(요한 8, 44)인 사탄의 말을 들은 데서 시작되었다. 이런 역사를 거꾸로 돌려, 기쁨과 희망, 자유와 참 삶의 역사를 도입하기 위해 오신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이 되신 말씀”(요한 1,14)이시다.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분은 바로 그분이시다. 참된 행복의 길은 속임수요 거짓일 뿐인 유혹자의 소리를 단연코 뿌리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유혹자의 말이 처음에 그럴 듯해 보이다가 끝에는 거짓임이 드러나는 것과 반대로, 생명의 말씀은 처음에 영 아닌 것같이 보이다가 뒤에 가서야 그 참됨이 드러나는 것이다. 처음, 언뜻 듣기에는 유혹자의 속삭임, 속이는 말이 훨씬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에, 그리로 몰려가는 사람들이 많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마태 7,13-14).

그래서 사람이 되신 말씀 앞에서 사람들의 태도는 처음부터 항상 둘로 나뉘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한 1,10-12). 빛은 지금도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하늘나라는 지금도 겉눈에는 잘 띄지 않는 모습으로 밭에 묻혀 있고, 사람들이 그 가치를 눈치 채지 못하는 값진 진주로 숨어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이나 진주를 사지만”(마태13,44-46 참조),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갇혀 그 이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행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들에 둘러 싸여 사는 동안, 우리는 누구나 그런 의미에서 반쯤은 소경이다. 프랑스 태생 미국 작가 줄리앙 그린의 말마따나, 바로 전까지 자기 주먹처럼 분명히 보이던 것이 한 순간 뒤에는 안개처럼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 신심 깊은 작가는 죄를 짓기 전과 후에 이 특유의 감각에 나타나는 변화를 이런 말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죄와 상관없이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한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는 하느님 말씀을 먹는 일이다. 외워야 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헌장 선포 이후 하느님 말씀을 주제로 한 모임으로서 최대의 사건이었던 2008년 10월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 논의된 것을 정리하여, 교황 베네딕도 16세께서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권고서를 2010년 9월 30일자로 발표하셨다. 거기에서 교황님은 주교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교리교육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와 관련된 주요 성서대목을 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셨다.

하느님 말씀은 밭에 묻혀 있는 보화와 같아서, 아무 생각 없이 스쳐가거나 피상적으로 훑어보는 식으로 대하면, 그 깊은 뜻을 깨닫기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금을 찾는 사람처럼 파헤치고, 체로 치고, 불에 넣어 녹이는 과정을 거쳐야만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다른 비유를 쓰자면, 그것은 먹어야 한다. 그래서 소가 풀을 먹고 나서도 오랜 시간 동안 되씹듯이, 우선은 외워서 정신 속에 넣고는 계속 반추해야 한다. 그러면 죽은 문자가 살아있는 말씀이 되고, 그것이 다시 “영과 생명”(요한 6,63)으로 바뀐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2고린 3,6).

하느님 말씀을 이렇게 정신 깊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두고 구약성서 시대부터 “먹는다”는 표현을 쓴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예레미아는 말한다. “말씀 내리시는 대로 저는 받아 삼켰습니다. 만군의 야훼 하느님, 이 몸을 주님의 것이라 불러 주셨기에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도 기쁘고 마음에 흐뭇하기만 하였습니다”(예레 15,16). 에제키엘도 같은 경험을 하였다. “‘너 사람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만은 저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처럼 나에게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입을 벌려 내가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 내가 바라보니, 한 손이 나에게 뻗쳐 있는데 그 손에는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보이시고 그분은 ‘받아먹어라. 너 사람아, 이 두루마리를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가서 이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일러 주어라.’ 내가 입을 벌리자 그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면서 그분은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내가 주는 이 두루마리를 배부르게 먹어라.’ 그리하여 그것을 받아먹으니 마치 꿀처럼 입에 달았다”(에제 2,8-9; 3,1-3).
그런데 예언자들은 그렇게 맛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먹은 다음에, 자신의 삶에 일어난 변화를 이렇게 표현한다. “저는 웃으며 깔깔대는 자들과 한 자리에 어울리지도 않았습니다. 주님 손에 잡힌 몸으로 이렇게 울화가 치밀어 올라 홀로 앉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야훼의 말을 들어 보아라. 너의 마음을 돌려 잡아라. 나는 다시 너를 내 앞에 서게 하여 주겠다. 그런 시시한 말은 그만두고 말 같은 말을 하여라. 나는 너를 나의 대변자로 세운다. 백성이 너에게로 돌아와야지 네가 백성에게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내가 너를 그런 놋쇠로 든든하게 만든 성벽처럼 세우리니, 이 백성이 아무리 달려들어도 너를 꺾지 못하리라.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너를 도와 구하여 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나는 너를 악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주며 악한들의 손아귀에서 빼내 주리라.’”(예레 15,17-21).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생명 깊숙이 받아들여 소화시키고, 그런 다음에는 세상의 말을 듣고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살게 된다. 별 가치도 없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며 “웃고 깔깔대는 자들과 한 자리에 어울리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면, 이제 인간은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어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미 한 발은 하늘나라에 들여놓고 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주님의 말씀이 그 사람을 지켜 줄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 6, 31-34).

  • 주소: 전북 전주시 완산구 기린대로 100 우편번호 : 55036
  • 대표전화: 063-230-1004 | 팩스: 063-230-1175 | 이메일: catholic114@hanmail.net
  • copyright 2015 천주교 전주교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