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33호>-저 밭들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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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6-28 00:00 조회3,46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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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밭들을 보아라
하느님은 창조자. 우주 만물을 만드신 분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이미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만드시거나 새로 만드시는 일은 그분에게 아주 쉬운 일입니다. 사람이 무언가 뒤틀리고 고장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의 손에 맡기기만 하면 그렇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고장 난 사람들을 고치기 위해서 오신 의사이십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예수께서 일생을 통해 하신 일들이 모두 그것입니다. 사기꾼, 도둑, 강도, 죄녀, 매국노를 고쳐주시고, 병자를 치유해 주셨으며,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려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살려달라고 부탁을 드리면 그분은 외면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분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풀풀 나는 라자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눈에는 죽은 사람도 흔들어 깨우기만 하면 곧 부스스 일어날 것처럼 잠들어 있는 모습에 불과했습니다. 그분에게는 지금이 아니라 조금 뒤, 미래의 모습이 늘 눈에 보였던 것입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남편이 아닌 여자가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그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한 번 빠져든 수렁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몸과 마음이 더 할 수 없이 황폐하고, 누가 무어라 하지 않아도 자기혐오증에 걸려 지옥을 살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 지방의 더위 때문에 아무도 밖에 나다니지 않는 한낮을 이용해서 아무도 모르게 물을 길어갈 셈으로 샘에 나왔다가 만나게 된 그리스도 예수의 눈길을 받으면서 그 여자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분명히 드러나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앞으로 바뀌게 될 모습을 지금 벌써 보아내신 그분의 눈길이 그 여자의 속 깊이에 숨어있던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싹트게 하고 자라게 만들었습니다.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온다.’ 하지 않느냐? 그러나 내 말을 잘 들어라.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이미 다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다”(요한 4,35). 추수 때로부터 넉 달을 뒤로 계산하면, 대부분의 작물이 씨뿌리는 시기로 돌아갑니다. 이제 겨우 씨를 뿌린 밭을 보고 그분은 곡식이 다 익어 추수를 기다리는 광경을 보아내는 분이었습니다. 말라 비틀어진 볍씨 한 알을 앞에 두고서도, 이미 잘 자라 60배 100배의 낟알을 맺고 있는 벼를 보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눈길은 지금의 사실을 보시는 현실적 눈길이 아니라, 미래에 바뀌고 변화될 모습을 보시는 창조적 눈길이었습니다. 그런 눈길을 받으며 그 여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참 모습을 찾아갔습니다. 지금까지 남들의 시선에서,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 자신에게 되쏘면서 거기 갇혀있던 자기는 참된 자신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창조적 눈길을 받고 그 여자는 비로소 자기가 되어 갔습니다. 그것은 그분과 그 여자가 함께 이루어낸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둘은 서로가 상대방으로부터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예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를 얻으시고 세례를 베푸신다는 소문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요한 4,1).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후퇴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요한복음은 이렇게 밝힙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시 때문에 유다 지방에서는 더 이상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는 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그런 상황이 그분을 배고픔에 허덕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고향 땅으로 돌아가시는 도중에 우연히 만난 사마리아 여인 덕분에(?!)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실 수가 있게 되었고, 그래서 허기를 한껏 해결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여자도 예수님의 배고픔을 채워드렸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의 지나온 길, 지금 처해 있는 상황 속에 깊숙이까지, 그러나 부드럽게 들어가 거기에 당신의 창조적 눈길을 보내십니다. 지금 당장 느끼는 샘물에 대한 목마름, 사랑이라는 이름의 더 깊은 목마름, 그리고 절대적 사랑이신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채울 수 없는 목마름에 이르기까지, 그 여자가 삶에서 가장 절실하게 느끼지만 어디에서도 흡족하게 채울 수 없었던 그 목마름의 흔적과 깊이를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그것을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우주보다 그 한 사람이 더 귀중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우주 전체를 통틀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난 고장도 유일합니다. 처방 역시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 하나하나는 나름의 우주를 이루고 있고, 거기에 난 고장도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특유의 그림자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사람의 얼굴이 다른 것보다 그 그림자의 모양이 더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특유의 창조적 눈길을 보내 주셨기 때문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지금의 이 얼굴을 하고 여기 와 있는 것입니다. 뱃속에 들어 있을 때, 엄마는 이미 예쁜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 아기를 보며 계속 이야기를 해 주셨고, 세상에 나온 다음에는 아직 핏덩이였을 때부터 이미 멋지고 늠름한 성인이 되어있는 모습을 내다보시며 나를 그 쪽으로 계속 키워주셨던 것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눈길이 특히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에게는 사람의 나이가 137억 년이라는 우주의 나이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우주가 생겨나던 때, 이미 사람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원자재가 다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시간에 따라 이리저리 모이고 결합하고 여러 단계를 거쳐 변화했지만, 그 모든 일은 결국 인간을 만들기 위한 준비, 아니 그 과정의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새가 알을 낳기 전에 나뭇가지와 잎새, 깃털을 모아 집을 만들고, 알을 낳은 다음에도 오랫동안 그것을 품고 앉아, 그 속에 든 생명을 키워낸 다음 밖으로 나오게 하듯이, 우주 만물의 역사는 그대로 인간의 탄생을 위한 여러 단계였던 것입니다. 아니라는 사람의 말도 틀리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것은 어차피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 안에서만 통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증명할 수 있는 것만 사실이라고 하면, 우리는 마음속에 간직한 우정도 인정할 수 없게 되고, 어머니의 사랑도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우주도 낯설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자연도 차가운 공간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아인슈타인은 말했습니다. “이 우주가 인간에게 따뜻한 곳인가, 아닌가? 이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밖의 것은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합니다.”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 자신은 물론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따라서 우주 곳곳에서 그분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한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창조적 눈길은 사마리아 여인을 한꺼번에 새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그 여인은 자신의 존엄성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모든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남의 눈길도 꺼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직전까지 만나기를 그렇게나 꺼려했던 동네 사람들을 향해, 죽기보다 싫었던 자신의 과거까지 스스로 들추어내며 외칩니다. “나의 지난 일을 다 알아 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가서 봅시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요한 4, 29).
우리는 다 그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엉망으로 돌아가던 삶에서 같은 그리스도를 만나 제 길을 찾아내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모습을 회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뿐 아니라,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베드로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성령을 받을 때까지 그렇게도 갈팡질팡하고 우유부단해서, 천국의 열쇠를 약속받는가 하면, 사탄으로 지목받기도 하고,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하는가 하면 하녀의 한 마디에 아니라고 하던 시몬은 우리 자신의 거울입니다. 그 시몬이 성령을 받아 이제 이름에 값하는 사도 베드로가 된 다음에 보여준 첫 번째 기록된 기적(사도 3, 1-10)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세 시,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하나 있었다. 날마다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다 놓으면 그는 앉아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을 하였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눈여겨보며 “우리를 좀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앉은뱅이는 무엇을 주려니 하고 두 사도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 하며 그의 오른손을 잡아일으켰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걸어다니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또 그 사람이 바로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에 몹시 놀라서 어리둥절해졌다.-
우리는 여기서 우선 예수의 시선이 성령을 통해서 사도들에게 옮겨 온 것을 확인합니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눈여겨보시는” 분이었습니다. 장차 당신의 수제자가 될 시몬을 처음 만나셨을 때에도 예수께서는 그를 “눈여겨보셨다”(요한 1, 42)고 요한은 전합니다. 바로 그런 눈길이 이제 사도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앉은뱅이 걸인을 눈여겨보며 상대방도 그렇게 할 것을 권할 때까지, 그 사람은 한 번도 사람들로부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눈길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자신도 다른 이들의 눈길을 자신에게 되쏘는 습관이 굳어져 상대방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두 발과 발목만 굳어진 것이 아니고, 세상에 태어난 이후 자신과 타인을 보는 시선도 똑같이 굳어지고 망가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자신들의 눈길로 그의 눈길을 바로 잡아주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를 좀 보시오.” 그 전까지 그 사람은 사람의 손만 보았습니다. 거기 동전이 몇 푼이나 얹혀 있는가 하는 것만이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은 손과 거기 들려있는 돈 몇 푼으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이상의 관계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어차피 자신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적선을 받아 배를 채울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생각에 붙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 이렇게 말하면서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일으키자, 그 앉은뱅이는 당장에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고 루가는 전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께서 하시던 일을 이제 제자들도 그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 놀라운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던 그 힘, “위에서 오는 능력”(루가 24,49)이 이제 제자들에게 전해져서 그들이 제자 단계를 졸업하고 참된 의미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다른 면도 봅니다. 다름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모든 사도들)에게는 이 앉은뱅이였다가 걷게 된 사람의 이야기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까지 제자들은 말하자면 전동차 뒤에 매달려 끌려 다니기만 하는 객차들처럼,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자신의 힘은 전혀 없이 순전히 스승의 힘에 의존하며 살았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하는 주님의 말씀 그대로 그들은 앞서 가시는 스승의 뒤를 따라다니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물리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는 더욱더 그러해서, 그들은 참된 방향으로 자신을 움직일 힘이 전혀 없었고, 말로는 큰소리를 쳐놓고도 실제 행동은 정반대 방향으로 가곤 하는 처지를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요한 13,23)라는 별명으로 통하던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까지 스승께서 죽음을 바로 앞두신 시점에서도 출세할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 주님 안에서 활동하던 그 능력을 받고 나서 바뀐 모습은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이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껑충껑충 뛰게 된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베드로가 그 사람 덕분에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니 여기서도 베드로가 그 앉은뱅이를 도와준 것 못지않게, 그 사람도 베드로를 도와준 셈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성령을 상징하는 크리스마 기름을 부어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참 좋다”(창세 1,31)고 말씀하신 아버지의 창조적 사랑의 눈길은 아들에게 전해지고, 그 눈길은 다시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그 눈길이 가는 곳마다 혼돈이 질서로, 어둠이 빛으로, 질병이 건강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원한이 용서로 바뀝니다. 한 마디로,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고 세상의 소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