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34호>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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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ecil 작성일12-02-14 00:00 조회3,75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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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울지마 톤즈>, 아프리카 수단에 가서 환자들을 돌보는 한편,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故 이태석 신부님 이야기를 담은 기록 영화가 우리를 깊은 감동으로 몰아넣고 있다. 최근에 영어로 번역되어 해외에 알려지면서, 이제는 전 세계 사람들이 같은 감동 속으로 빠져 들고 있다. 2011년 7월 31일 일요일 오후 8시 한국방송은 <울지마 톤즈, 그 이후>라는 제목으로 이 다큐멘터리가 지금 얼마나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퍼져나가 동시대인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에 따르면, 미국 3대 영화제 중의 하나인 휴스턴 국제 영화제는 올해 심사 대상으로 올라온 4,400여 편 가운데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울지마 톤즈>를 대상 작품으로 선정했다. 그리고 영국 상원의원으로서 인권과 생명 운동가로 잘 알려진 알톤 경은 지난 3월 말 영국을 방문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측근인 최태복 씨에게 <울지마 톤즈> DVD를 선물했다. 알톤 경은 영국 가톨릭 신문에 소개된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접하고 그것을 최태복 의장에게 선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21세기의 한 성인”이라는 제목으로 현지 가톨릭 신문에 난 기사의 내용은 대강 이런 것이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다룬 한국방송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본 사람들은 10분 이내에 눈물을 흘렸다.…한국 불교계의 가장 큰 종단인 조계종 자승 스님은 승려나 신도들이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개종할까봐 보여줘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알톤 경은 말한다. “나에게는 이태석 신부님이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있는 장면이 가장 감동적이었습니다.… 신부님을 보면 슈바이처 박사가 떠오릅니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약간의 우월감을 갖고 있었죠. 하지만 이 신부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에게 그 영화를 선물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북한 체제를 비판하거나 그럴 생각으로 그것을 선물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남한이든 북한이든 상관없이 <울지마 톤즈>를 통해 감동받고 같은 한국인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뿐입니다. 나는 그들이 그 기록영화를 보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한 인물의 삶에서 감동받기를 희망했습니다. 우리가 힘으로 대결하는 것을 사랑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을 아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뒤바꿔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비판이나 물리력으로는 바꿀 수 없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사랑에서만 나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또 무엇보다도 죽음과 부활로 이어진 그분의 삶 전체를 통해서 인류에게 주신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통해서 지금 계속 입증되고 있다.
그런데 이 신부님의 이야기가 지금 그런 힘을 발휘하며 세상 사람들의 삶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거기에서 맨 먼저 크게 감동을 받은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울지마 톤즈>에 대상을 수여한 휴스턴 국제 영화제 위원장 헌터 토드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한 사제의 삶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심사위원들이 이 다큐멘터리를 좋아했던 이유는 신부님을 아주 잘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알톤 경의 말은 옳다. “이 영화는 세상을 위한 좋은 선물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만드는 데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크게 축하받고 칭찬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 아무리 감동적이었다 해도 그것을 ‘잘 포착해서’ 전해주는 이가 없었다면 그것은 그대로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1984년에 남미 페루에 선교사를 파견함으로써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상 맨 처음으로 선교사를 파견한 교구의 하나가 된 전주교구의 주교로서나, 한국주교회의 해외사목 위원회 위원장으로 오랫동안 일한 사람으로서나, 해외에 파견된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지역에 따라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서 순교에 가까운 희생적 삶을 사시는지를 많이 보고 들어왔다. 특히 남미 여러 나라에서 활동 중인 사제, 수도자, 평신도 선교사들의 사정을 비교적 많이 대해 왔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분들의 상황을 접하고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지만, 세월이 가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더 많이 대하고 듣는 가운데, 처음에 비해서는 감각이 많이 무디어지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분들 가운데 어떤 분이 돌아가시고, 그 소식을 들었다 해도, 참 고생 많이 하시고 돌아가셨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을 하고는 곧 일상적인 일에 파묻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태석 신부님의 경우도, 그 감동적인 모습을 정확히 포착해서 전해주는 이가 없었다면, 가까운 몇 사람들의 기억에만 남아 있다가 얼마 후에는 아예 잊혀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구수환 PD의 <울지마 톤즈>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구수환 씨는 누구인가? 나는 그의 이 한 마디에서 그가 누구인지를 제일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한센인이 신부님의 사진에 입맞춤하는 것을 보고 저는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그분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씨는 한국방송국에서 25년 동안 시사 프로그램을 담당해왔고 그 중 6년은 분쟁지역을 쫓아다녔다. 시사 프로그램은 사회 약자들의 처지를 알려서 그들도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약자와는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온갖 비난을 받고 때로는 심각한 위협도 당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왜 이태석 신부님을 주목하게 되었던가? 그의 말을 들어보자. “제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서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은 제가 25년 동안 시사 프로그램을 하면서 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가 이분의 삶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구씨는 스스로 이렇게 큰 감동을 받은 다음에, 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어떤 어려움도 감수했다. 수단으로 떠나기 며칠 전에 유엔은 톤즈 지역의 고조되는 위험 상황을 보고 그곳에 있는 모든 외국인에게 철수할 것을 권고했고, 떠나던 날 아침에는 현지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며 들어오지 말라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떠났다. 그렇게 하면 신부님이 어떤 상황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오히려 더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상시와는 전혀 다른 길로 돌아서 우여곡절 끝에 현지에 도착했는데, 가서 보니 무력충돌보다 더 무서운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더위와, 잘못하면 한 방에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말라리아 모기와의 전쟁이 그것이었다. 그 모기에 물리지 않기 위해서 창문을 모두 닫고 이불까지 뒤집어쓰고 자면서도, 불평할 수 없었던 것은, 이태석 신부님이 그런 환경에서 이미 8년을 사셨다는 생각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 기록물을 제작한 분의 의도를 직접 들어보자.
“저는 이 신부님의 상을 통해서 이 사회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하던 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어떤 권력의 힘도 아니고 돈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지극한 사랑이었습니다. …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휴먼 다큐멘터리, 또는 종교영화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굉장한 고발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울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극장에 가서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우셨습니까?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그 동안 살아온 삶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이것보다 더 강한 고발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이번에 고발 프로그램이 어떤 비리를 찾아서 고발하는 방식도 있지만, 이렇게 사랑과 감동을 통해서 스스로 반성하도록 하는 것, 자신을 알게 하는 방식이야말로 강력한 고발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태석 리더십이라는 말을 많이 하고 다닙니다. 그 리더십이란 어떤 것이었습니까?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면서도, 그들 위에 군림하지도 않았고, 생색도 내지 않았습니다. 항상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그들을 이해하려 하였고, 그들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들어주면서 해결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랑을 아프리카 사람들은 눈물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런 면들이 천주교 신자가 아닌 한 사람을 깊은 감동 속에 몰아넣었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온갖 위험과 어려움을 감수하게 했던 것이다. 나는 구수환 씨의 이야기를 듣고, <울지마 톤즈>를 다시 보고, <울지마 톤즈, 그 이후>를 찬찬히 재음미하고, 이태석 신부님이 쓰신 책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를 정독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이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루가 12,49).
“하느님은 사랑이시기”(1요한 4,8.16) 때문에, 여기서 말씀하시는 불은 사랑의 불이다. 그리고 그 불은 십자가 위에서 가장 환하게 타올랐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그래서 예수께서는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씀하신 뒤에 바로 이어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뒤집어쓰시게 될 일을 세례라고 표현하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던 것이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루가 12, 50).
구약성서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당신의 소리를 들려주시어 너희를 깨우쳐 주셨고 땅 위에서 당신의 큰 불길을 너희에게 보여 주셨다. 그래서 너희는 <불길 가운데서 들려오는 그의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신명 4,36).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실 때에도 하느님은 불길 속에서 말씀하셨고,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의 불길 속에서 가장 완벽하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라는 말씀”(1고린 1, 18)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말씀의 완성인 성령은 또 불길의 모상(사도 2,3 참조)으로 내려오셨다.
이 모든 이야기는 좀 복잡한 것 같아도, 내용은 단순하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진정한 사랑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며 결국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불길로 제일 잘 표현된다. 이태석 신부님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불길로 마음이 뜨거워진 이들이다. 성화 주자들처럼 불길이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번져 간 것이다. 나는 이 신부님의 책을 읽으며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꼈다. 그 책을 보면 이 신부님 자신도 그 불길을 여러 사람들에게서 건네받았음을 알게 된다.
“‘꼭 신부가 아니더라도 의술로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텐데 왜 꼭 신부가 되실 결심을 하셨나요?’,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일들이 많은데 왜 그 먼 아프리카까지 가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내가 자주 받는 질문들이다. 7년 이상을 이런 내용의 질문을 계속 받아왔지만 지금도 시원하게 답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얼버무리고 만다. 이런 질문들을 받고 나면 돌아서서 혼자 스스로에게 다시 질문을 해 보지만 특별하게 딱 부러지는 답을 찾기가 힘들다. 정말 특별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고 지금 그렇게 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작게 나에게 영향을 끼친 내 주위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의 향기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그랬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가 의사로서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도 그랬다. 그리고 어릴 적 집 근처에 있었던 <소년의 집>에서 가난한 고아들을 보살피고 몸과 마음을 씻겨 주던 소 신부님과 그곳 수녀님들의 헌신적인 삶의 모습도 그랬으며, 일찍이 홀로 되어 덜렁 남겨진 10남매의 교육과 뒷바라지를 위해 눈물은 뒤로 한 채 평생을 희생하신 어머님의 고귀한 삶도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 아름다운 향기였다”(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179-180쪽).
여기서 이 신부님은 “향기”라는 표현을 쓰셨고 바오로 사도께서도 “우리는 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2고린 2,15)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서에서부터 이어져 온 전통에 따라 앞서 본 바와 같이 “불”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복음선포란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들불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불의 발원지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아들은 세상에 그 불을 지르러 오셨으며,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그 불을 주변 사회에 계속 지르고 다녀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인간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서 창조된 존재들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 마음속에 그 사랑의 불씨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참된 불을 만나면 그 속에 있는 불씨에 그것이 옮겨 붙어 활활 타오르게 된다. 여기에는 종교나 민족, 남녀나 문화의 차이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극한 사랑을 실천하시는 이 신부님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그런 차이를 모두 뛰어넘어 누구나 깊은 감동을 받고 삶에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 목사님도, 스님도, 동양인도, 서양인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28세에 한센병으로 판명되어 아들 셋을 두고 소록도로 들어가 17년을 살고 나와 정착촌에서 지내는 동안 남편과 아들들마저 앞서 보낸 84세의 이복례 할머니. 국가에서 나오는 생활 보조비마저 하나 남은 손자의 교육비로 쓰신다는 이분도 이태석 신부님의 기록영화를 보았다며, 풍족하게 살고 싶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말씀하신다. “풍족하게 살면 못쓰지. 내가 무슨 노력을 했다고. 국가 혜택만 보고 사는데 뭘 풍족하게 살아. 이만하면 됐지.”
이태석 신부님 자신도 여러 사람들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던 그 불길. 이 땅에 교회가 있고, 그 안에서도 특히 복음선포에 몸 바친 사람들이 있는 것은 그 불길을 전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의 신자 수는 불어나도 그 불은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데에 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늘지만 복음의 불길이 그 안에서 타오르지는 않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태석 신부님에게서 구수환 PD가 특별히 감동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라면 이 빈 땅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고 하는 그분의 말씀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말한다. “이태석 신부님은 선교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신 분입니다. 7-8세에 전쟁터로 끌려가는 아이들을 전쟁터에서 끌어내어 교육을 시키기로 한 그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처음에 50명으로 시작한 학교에 지금은 1500명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학생들에게 장래에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고 물으면, 의사가 되어 신부님처럼 남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대답합니다. 신부님은 아이들에게 아버지처럼 닮고 싶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신부님이 떠난 자신들의 삶은 눈물”이라고 말하는 한 한센인 노인의 얼굴을 부각시켜 보여준다.
2012년 10월에는 전 세계 각국 교회를 대표하는 주교들이 로마에 모여 교황님과 함께 3주간 동안 “새로운 복음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같이 기도하고 논의하고 적절한 방법을 찾아내어, 교회의 선교 역사에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게 될 것이다. “복음화”라는 말로 충분한 것을 왜 구태여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일 필요를 느꼈을까? 그것은 교회 안에 들어와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신자가 된 이들 가운데에도 복음의 정신이 깊이 침투하지 못해서, 실제로는 신앙인이라고 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비롯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남미 선교 500주년을 기념해서 열린 제19차 라틴아메리카 주교 총회 강론(1983.3.9.)에서 공식적으로는 사실상 처음으로 이 표현을 썼던 것이다. 그것은 남미에서 한때 선교사 한 명이 백만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만치 폭발적으로 교세가 불어났으나, 정작 복음의 정신을 깊이 넣어주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해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현상을 보시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복음 정신이 제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새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다가 남미뿐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도 비슷한 상황 속으로 빠져 드는 현상을 보며, 이것은 일정한 지역에만 국한된 현실이 아니라, 과학 기술을 앞세운 물질문명의 발전과 함께 현대에 와서 인류 전체가 빠져들기 쉬운 비복음, 나아가 반복음적인 흐름임을 깨달으면서, 새로운 복음화라는 표현은 더욱 넓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새로운 열정을 가지고,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표현을 써서> 복음을 전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삶과 그것을 감동적으로 담아낸 기록영화,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 새로운 복음화가 과제로 삼고 있는 문제들과 그 해답의 방향이 거의 모두 거기에 암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우선, 이 신부님의 삶에 감동을 느끼고 그것을 정확하게 포착한 이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점이 특별한 의미를 띤다. 그런 뜻에서 그분은 우리가 예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접근해야 할 모든 사람들, 특히 오늘을 사는 현대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낙오자로 남아있는 이들도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4반세기 동안 온갖 어려움과 위험까지 무릅쓰고 노력해 온 그가 하는 말은 복음을 전할 사명을 지닌 우리 모두가 깊이 새겨야 할 일이다. “제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서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은 25년 동안 시사 프로그램을 하면서 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가 이분의 삶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구수환 씨는 이태석 신부님에게서 가장 감동적인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해서도 대단히 의미 있는 말을 한다. “이태석 신부님은 선교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신 분입니다. 7-8세에 전쟁터로 끌려가는 아이들을 전쟁터에서 끌어내어 교육을 시키기로 한 그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선교-복음화는 본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는 것이 그 요체다. 그것을 빼면 교회의 신자 수는 늘어날지 몰라도 복음화는 안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외형은 거대하고 화려한데, 그것으로 주변 세계가 좀 더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며 가난한 이들도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하지는 않고 있는 것이, 많은 경우에 특히 우리나라에서, 슬프지만 엄연한 현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선교와 진정한 사랑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현실 때문에 새로운 복음화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오늘날에만 있는 현상은 아니다. 이미 바오로 사도 시대, 고린토 교회에도 그런 일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 역시 세례 베푸는 일과 복음 전하는 일을 따로 떼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 1,17). 여기까지만 들어도 문제가 어디 있는지, 그것을 고칠 길이 어디 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느 시절에나 인간적 말재주로 인기를 끄는 설교가는 항상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한때 몰려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거나 적당히 얼버무리고 만다. 그러고서는 부활, 풍요, 축복, 영생, 구원만을 외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나, 복음이 사회 정치적인 변화까지 이끌어내야 하고 자신도 거기 투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자기 한 몸 잘되는 데에만 생각을 기울이게 할 위험이 있는 표현들이다. 그렇게 되면 이 좋은 말들은 교회가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 있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정 반대의 뜻으로 사용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복음선포자라는 사람의 말도 그렇게 뒤틀려 아무 열매를 맺을 수가 없게 된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영화로 본 한 목사님은 말한다. “설교로 사람은 절대 안 변합니다. 교회가 안 변하는 것은 목사들이 말로 가르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목자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의 말재주 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표현된 자기희생적 사랑을 생각하며 바오로 사도는 이어서 외친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십자가라는 말)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1고린 1,18).
우리는 이 위대한 사도에게서 새로운 복음화에 필요한 빛과 방법 그리고 새로운 열정을 다 배울 수 있다. 베네딕토 15세 교황께서는 1917년 회칙 [인류Humani Generis]에서 바오로 사도를 복음선포자의 주보로 선언하셨다. 이 이방인의 사도께서는 깊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복음선포를 준비하셨다는 점에서, 그 선포의 내용에서, 그리고 그 선포의 방법에서 모두 복음선포자들의 모범이 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그런 면모를 특히 고린토 전서 1-2장에서 발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목을 깊이 숙고하고 묵상해야 하겠다.
그리하여 세례를 베푸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이 따로 떨어지지 않고, 본래의 취지 그대로, 복음이 전해진다는 말은 곧 사랑이 전해진다는 말이라는 사실이 누구의 눈에나 드러날 수 있게 해야 하겠다.
미국 대학 가운데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른바 ‘아이비 리그’에 속하는 학교에서는 하나같이 남에 대한 봉사정신을 입학 때부터 매우 중요한 조건으로 설정하고 교육 기간에도 <섬기는 지도자상>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지도자상을 가르치기 위한 센터도 있는데, 그 책임자가 이태석 신부님의 기록영화를 보고 한 말은 복음선포 사명을 지닌 우리 모두에게 큰 의미를 지닌다. “이 기록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신부님이 세상을 떠난 후의 눈물이나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이나 보았는데, 내가 받았던 가장 큰 메시지는 신부님이 얼마나 멋지고 기쁜 삶을 살았는가, 우리도 그분처럼 섬기는 지도자로서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돕는다면 얼마나 멋지고 기쁜 삶을 살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렇기 때문에 복음 곧 기쁨을 주는 소식, 우리의 삶을 기쁨으로 채워주는 가르침인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 11).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복음선포자로 양성하시는 과정의 끝에 이르러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하고 선언하시는 기회에 하신 말씀이다. 그 기쁨은 진정한 복음선포자의 삶에서 누구의 눈에나 환하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교실에서 논리의 고리를 따라 펼치는 “설명”이 아니라 “증언”이다. 설명은 어떤 일을 말하는 사람이 지금 말하고 있는 그 내용에서 거리를 두고 제3자로서 객관적으로 펼치는 방식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증언이란 말하는 사람이 자기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먼저 체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확신에 차서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하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래서 “증언”과 “순교”는 성서에서 같은 말이다. 그리고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성령이라는 불길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것을 읽고 전하는 사람도 같은 성령 속에서 묵상하고 증언해야 한다. 따라서 복음선포자들의 말이 불길 속에서 하는 말, 불타는 말이 아니면, 그것은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처럼 공허하고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1고린 13, 1).
반대로, 복음선포자들의 말이나 행동이 증언으로서의 특성을 띨 때, 그들은 참으로 주변 세계를 건강하게 하고, 밝게 해주는 소금과 빛이 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 데에도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