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37호> 엘 파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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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12-11 00:00 조회3,85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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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파쏘.
미국 골롬반 선교회의 초청을 받아, 그분들이 활동 중인 지역들을 둘러보는 이번 여정(2012. 4. 16-23)에서 마지막 지점에 해당하는 도시 이름이다. 5백여 년 전,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은 유럽 사람들이 큰 강(리오 그란데)을 앞에 두고 그것을 건너기 위해 가장 알맞은 곳으로 지정해 붙인 이름이었다고 한다. 스페인어인 엘 파쏘El Paso는 우리 식으로 하자면 <건널목> 쯤이 될 이름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이 강이 멕시코와 미국 사이의 국경선으로 변했고, 이 두 나라를 넘나드는 건널목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큰 강이라는 뜻의 리오 그란데는 국경선으로서의 역할에 맞춰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좁게 흐르는 운하처럼 직선의 수로가 되어 큰 강으로서의 위용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엘 파쏘.
그러나 건널목이라는 뜻의 엘 파쏘라는 이름만은 그대로 남아 세월이 갈수록 그 무게가 더해져서 국경선이 된 다음부터는, 자전거를 타고 가도 십여 분이면 충분할 거리가 경우에 따라 서너 시간을 기다려 외국에 갈 때 거쳐야 할 수속 절차를 다 밟아야 건널 수 있는 관문이 되었다. 나도 멕시코 쪽에서 미국 쪽으로 넘어올 때, 땡볕 아래서 한 시간 반을 기다리며 그 현실을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아주 사소한 일상사일 뿐, 무리하게 그것을 넘어가다가 총을 맞아 죽는 일까지 자주 발생한다고 한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그 경계선을 넘으려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가난에 찌든 멕시코에서 그 건널목만 넘으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엘 파쏘.
창조 이래 자연스런 곡선을 그으며 흐르던 강이 이제는 무장 군인이 삼엄하게 감시하는 국경선이 되어 두 나라를 갈라놓고 있는 현실과 거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을 보며, 나는 엉뚱하게도 <엘 콘도르 파싸>라는 남미 특유의 음악이 생각났다. 이 땅의 어떤 경계선에도 아랑곳없이 하늘 높이 자유롭게 떠다니는 독수리를 연상시키는 곡인데, 거기에는 어쩐 일인지 짙은 애조가 서려 있다. 그 곡을 연주할 때 흔히 사용하는 대나무 악기 특유의 음색이 더해져서 청아하면서도 구슬픈 정서가 더욱 물씬 풍긴다. 나는 엘 파쏘 지역을 둘러보며 가지게 된 이런저런 생각을 펼칠 때, 배경음악으로 이 곡이 깔려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느낌은 국경지대 멕시코 쪽 도시인 후아레스의 한 지역을 돌아보며 한층 더 짙어지는 것이었다. 우선, 인구 백오십만의 이 거대 도시가 사막 한가운데에 조성되었다는 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은 어디에서 끌어다 이 많은 사람들을 살려준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런데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사막에도 여기저기에 지하수가 있어서 그것을 찾아내고 개발하면 샘이 된다는데, 문제는 거의 대부분의 샘을 부자 한 사람이 독점하고 그 물을 팔아 돈을 번다는 것이었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이야기는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일 뿐이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지역의 부자는 군부대를 연상할 만큼 거대한 땅에 집을 짓고 높은 담을 쌓아 외부 세계를 완벽하게 차단시킨 채 살아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스스로 높은 담을 쳐놓고 그 안에 갇힌 수인처럼 사는 형국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까마득하게 이어진 높은 담을 보며, 언뜻 루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 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 얼마 뒤에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 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하자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고 대답하였다”(루가 16,19-26). -
필름의 음화가 양화에 비해 정반대여서, 흰 부분은 검게 검은 부분은 희게 나타나듯이, 죽음을 사이에 두고 운명이 정확히 반대로 갈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 지역은 사막이었고 부자는 물을 끌어다 자기의 집 정원만은 낙원처럼 꾸미고 살기 때문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가 눈에 극적으로 대조를 이루어 나타난다. 그런 세상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거기에 사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여 날카롭게 느껴지지 않는 광경이 여행자의 눈에는 더 선명하게 나타나는 법이어서, 길손이었던 내 눈에 그만큼 더 두드러져 보였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최근 십여 년 동안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적 차이가 빠른 속도로 커지고,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세상 어디에서나 이런 추세가 확산된다고 하니, 거기에서 내가 본 것은 요즈음 돌아가는 세상의 상징일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골롬반 신부님들과 함께한 여정에서 첫날을 보내고 다음날 새벽 네 시쯤에 김봉희 신부님의 서거 소식이 전해져 왔고, 그 여정의 마지막 밤을 지낸 다음 역시 새벽 네 시경에 또 다른 분의 죽음을 통보받았으며, 귀국하던 날에는 안동 교구 소속 동창인 정호경 신부님의 서거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이번 여행은 유난히 죽음을 깊이 생각하게 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런 생각에 잡혀 있다시피 한 처지에서 지난 여정을 돌아보며 가난의 한가운데 철옹성 같이 세워진 부자의 집을 생각하니, 그 부자가 앞으로 살아갈 햇수가 얼마나 될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얼마 못 가서 정반대의 처지로 “건너가게 될” 것이 그 사람의 정신에 떠오르기나 할까? 그걸 깨달았다면, 높이 쳐진 담장으로 세상을 밀어낸 것이 얼마 못 가서는 세상이 자기를 밀어낼 장치로 변하기 전에, 그 담장을 헐고 그 대신 서로 쉽게 오가는 건널목, 진정한 엘 파쏘를 만들었을 텐데 하는 상념과 함께였다.
여행은 언제나 모험이다. 떠나기 전에 가졌던 기대나 생각과는 거의 무관하게 내 눈앞에 나타나는 뜻밖의 광경과 일어나는 사건, 특히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혹 알았던 것이라 해도, 내가 나이가 들고 변한 만큼, 보이는 세계도 같은 것이 아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씻을 수 없다고 했던가? 그것이 어찌 강물만의 이야기이겠는가? 세월이라는 강물은 훨씬 더 그렇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실히 느끼지 않는가? 그래서 출발 전에 기도했었다. 이 모든 모험 길이 당신의 목소리를 좀 더 분명히 듣고 그 뜻을 좀 더 확실히 깨닫는 기회가 되게 해 주십사고.
뒤돌아보니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방향에서 주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보고 느낀 것을 한 줄로 이어주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엘 파쏘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우선,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이번 여행 중에 동창 신부님들이 너무나도 뜻밖에 돌아가셨고,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신 분들의 소식은 가장 궁극적인 엘 파쏘를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와 사막을 건너면서 겪고 깨달은 것이 하느님 백성으로서 자신을 발견하는 근본체험이었고, 그것이 다시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건너가신 예수님의 길을 이해하는 데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건너가는 문”일 뿐이어서, 이 모든 것을 빠스카 곧 건너감이라고 하지 않는가?
과연,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일이야말로 가장 궁극적인 엘 파쏘다.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어린 시절은 끝난다는 말이 있다. 다른 면에서 보자면, 사람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삶 속에서 그것을 감안하면 할수록 사람은 더 성숙하고 인간답게 살게 된다는 의미가 담긴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을 사이에 두고 극적으로 달라지는 사람의 운명을 우리 앞에 그림처럼 들려주셨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어떤가? 많은 사람들이 “천 년 만 년 살 듯이” 살고 있다. 죽음을 잊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삶이 천박해지고, 나이가 들어도 철은 잘 들지 않는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잊어버리면, 부자가 사는 세상과 가난한 이가 사는 세상 사이에 담은 점점 더 높아지고 그 사이의 거리는 갈수록 멀어진다. 그래서 부자는 가난한 이들이 사는 세계에 들어가지 않는다.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상황을 이용해서 돈을 벌겠다는 사람이나 좋은 일로 들어간다 해도 일시적으로 머무는 정도다.
이런 세상에 예외가 있다. 선교사들이다. 피부색, 생김새가 전혀 다른 이들이 그들 사이에 끼어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점점 그들을 닮아간다. 피부는 검어지고 옷차림도 비슷하게 된다. 우리 교구 한정현 신부님이 활동하고 계신 멕시코 북단의 사막 도시 후아레스의 주임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케빈이라는 신부님이었다. 아버지는 판사고 가족 중에 의사도 많았기 때문에, 별일이 없었다면 자연스럽게 판사나 의사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청소년기에는 그런 길을 꿈꾸며, 또래의 다른 친구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17세 때 우연히 읽게 된 한 교회 잡지를 통해 전쟁 중인 어떤 나라에서 특히 어린이들이 너무나 불쌍한 처지에 놓여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는 충격을 받아 그들을 돕기 위해 사제의 길을 꿈꾸게 되었고, 선교사가 되어 거기에서 살고 계셨다. 태어나 자란 나라와 지금 와 있는 나라는 상상만 해도 너무나 다르다. 푸른 평원과 나무가 우거진 산을 배경으로 하는 고향, 그리고 사막 한 가운데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모래벌판에 가까스로 돋아난 덤불과 민둥산밖에 없는 나라는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고 믿기가 어려울 정도로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그분뿐 아니라 모든 선교사 신부님들은 하나같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을 골라 찾아 가신다. 그분들을 보며, 지금부터 불과 50년 전, 아니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그 지역 못지않게 가난했던 우리나라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던 외국 선교회 소속 신부님들의 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우리 교구는 전국 최초의 자치교구로서 설립 초기부터 외국 신부님들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다른 교구에서 일하시는 선교사 신부님을 더러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 모든 교구 중에서 맨 처음으로 남미 페루에 선교사 신부님들을 파견한 교구이기 때문에, 자주 그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골롬반 선교회 미국 지부의 초청을 받아 그분들이 활동하시는 곳들을 찾아 현장에서 직접 보니, 선교사의 존재가 새롭게 다가오고 그분들의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가까이서 느낄 수가 있었다. 오마하에 있는 미국 지부에는 한국에 오셔서 6·25 전쟁 중에 희생되신 신부님 여섯 분의 사진이 있었고, 지금 그 공동체에 함께 사시는 분들 가운데에는 우리나라에서 선교하시다가 은퇴하신 신부님들이 여러 분이 계셨다.
지금 활동 중이든 은퇴하셨든 간에, 어려운 지역에 가서 현지인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가 한 무리가 되어 살아가시는 그 선교사 신부님들의 모습을 보며, 사람이 되신 하느님, “인간이 사는 곳에 당신의 천막을 치신”(요한 1,14 참조) 하느님의 아들, 한 마디로, 강생의 신비가 계속되고 있는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선교사 신부님들은 국경이나 문화 또는 경제 여건 등, 세상에서 흔히 사람들을 갈라놓는 일체의 경계를 넘어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의 정신과 꿈을 가지고 사시는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요한 8,23) 하신 주님의 정체를 깊이 깨닫고, 그분의 눈을 제일 많이 닮은 복음사가 요한도 독수리로 상징되지 않는가? 한정현 신부님도 인간적 상식으로는 새로운 언어를 배워서 선교활동을 하실 연세는 지났다고 할 수 있지만, 일체의 장애를 극복하고 유창한 스페인어로 미사를 드리고 강론하시는 모습을 보며 같은 정신을 보는 듯했다.
덧붙여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나에게는, 평소 마음속에 화두처럼 늘 깔려 있던 한 가지 질문이 더욱 절실하게 떠올랐다.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마태 4,4) 밤낮 40일을 굶고 난 뒤에 돌로 빵을 만들어 문제를 쉽게 해결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것을 재빨리 악마의 유혹으로 알아채시고 예수께서 하신 이 단호한 말씀은 언제 어디서나 인류가 잊어서는 안 될 진리를 담고 있다. 교회, 특히 선교사들에게는 더욱 더 물러설 수 없는 진리이며 선포해야 할 복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참혹하리만치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정말 복음으로 선포할 수 있을까? 주일에 성당을 가득 메운 가난한 사람들을 보며 나는 마치 어떤 시험대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보통의 상식, 인간의 즉흥적인 반응은 정반대 방향으로 가기가 십상일 것 같았고, 나로서도 같은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기가 너무나 어려울 것 같았다. 우선, 빵 문제부터 해결해 주고, 그 다음에 가서 하느님 말씀을 들려주는 것이 순서라는 생각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주제로 2008년에 로마에서 열렸던 세계 주교대의원회의에 참석한 남미 주교님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는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뜻밖이었다. 가톨릭 인구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 대륙에서 하루에도 수천 명의 신자들이 다른 교파로 건너가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을 더욱 진지하게 찾고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 말씀을 깊이 받아들였을 때 그 삶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가난한 지역에 갔을 때 사람의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사람들의 물질적 가난과 거기에서 오는 비참한 모습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느낌일 뿐, 그들이 정말로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은, 다른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그 영혼의 기근과 갈증을 풀어줄 영원한 진리,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며, 복음선포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4월 19일에는 골롬반 선교회 미국 지부가 있는 오마하에서 직원 및 지부 신부님들을 상대로 간담회식 이야기를 하고 오후에는 지부장 아르투로 신부님과 면담 시간을 가졌다. 의례적인 것으로 간단히 끝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지난 시노드에서 선교와 직접적 관계가 있는 하느님 말씀에 관해서 많은 주교님들에게서 들은 것,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평소에 생각했던 것들을 중심으로 얘기를 하다 보니, 오후 2시 반에 시작된 이야기가 저녁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선교사로서 경험이 많은 지부장 신부님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양쪽에 절실한 주제를 두고 이해가 비슷한 가운데 오고 간 이야기는 주님의 밭에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서의 동료의식까지 곁들여져서인지 참으로 진지하면서도 뜻 깊은 것이었다.
그렇다. 세상 어디에서 일하든 모든 신앙인들은 주님의 밭에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각자는 주님께서 보내 주신 그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면, 다른 동료들이 다른 곳에서 하는 일에 보태져서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하느님 사업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주로 유다인들을 상대로 <안>에서 일했다면, 바오로 사도는 주로 이교인들을 상대로 <밖>에서 활동했던 것은, 그런 뜻에서, 이후 교회 역사를 걸쳐서 나타날 모습의 씨앗이었던 것이다.
골롬반 신부님들과 함께한 여정이 끝나고부터는 우리 교구에서 미국으로 파견한 신부님들과 그분들이 담당하시는 공동체를 방문하였다. 그 중에 로스앤잴레스로 파견되신 박대덕 신부님이 계신 성 바실 성당에서는 여정의 끝이 아니고 맨 처음인, 미국에 도착하던 4월 16일 저녁에 특별 강론이 있었는데, 월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모여서 하느님 말씀을 함께 묵상했다. 그리고 4월 24일에는 뉴욕 지역에 있는 스태튼 아일랜드에 계신 성현상 신부님과 공동체를 방문했는데, 신자 150여 명에 불과한 작은 공동체인데도, 그 동안에 큰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아주 활기차고 굳게 뭉친 공동체로 변화되었고, 전용 건물까지 매입하여 금년 7월에 맞이할 공동체 설립 35주년을 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4월 26일에는 헤리스버그의 양재식 신부님과 공동체를 방문하였는데, 거기에서도 역대 신부님들을 중심으로 노력한 것이 결실을 맺어 개신교 건물을 매입하여 성당으로 개조하는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있었고, 신자들도 하나가 되어 의욕에 차 있었다.
이처럼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들과 그분들의 신앙생활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나라가 최근 몇 십 년 동안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잃어버린 소박하고 신심 깊은 모습을 오히려 멀리 떨어진 외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십 년째 미국에서 살아오신 한 교우님의 말씀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한국에 가서 살아보니까 처음에는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화려하고 활기찼습니다. 그런데 한 달 반이 되니까,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고 가슴 깊은 데에서 공허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대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세상이 포도주에서 시작해서 맹물로 끝난다면, 그리스도교는 맹물에서 시작해서 아무도 맛보지 못했던 포도주로 끝난다는 사실은 언제나 변함 없는 진리이다.
이번 쌍백합의 주제는 홍보 매체다. 홍보란 커뮤니케이션의 번역어이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은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일, 말하자면 건널목의 역할을 의미한다. 사람 사이, 계층 사이, 나라 사이, 그 어떤 사이든 그것을 이어서 서로 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홍보의 본 사명이다. 여기서도 엘 파쏘의 본 뜻이 확인되는 셈이다. 매체들이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하면 그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는 셈이고, 특정한 계층이나 일부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그것을 지키는 쪽으로 기능을 하면 그 소명을 저버리는 셈이 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모든 매체들이 일체의 벽을 헐고 참된 소통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큰 기여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