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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39호> 누가 주님을 만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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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ecil 작성일12-12-11 00:00 조회3,7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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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뻬기(1873~1914). 당대 프랑스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시인이며 수필문학가였던 이 사람. 신앙에 별 관심이 없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아들이 갑자기 중병에 걸리자 이제는 어느 평범한 아버지나 다름없는 심정이 되어 1912년 6월 14일, 길을 떠나 유리화로 유명한 샤르트르 대성당을 향했다. 장장 150 킬로미터의 거리를 홀로 걸어가며 마음속에 품은 단 한 가지는 아들을 살려주시리라는 희망이었다. 평지에 있어서, 첨탑이 보이기 시작하는 지점에서도 오랜 시간을 더 걸어야 도달하는 점에서도 잘 알려진 샤르트르 대성당에 마침내 도착했을 때, 그는 일종의 신비체험을 한다. 그때의 심경을 그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대성당을 보았을 때, 나는 황홀경에 들어갔다네. 나의 더러움들이 한꺼번에 내게서 떨어져 나갔지.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거야. 그때 나는 전에 한 번도 드려 본 적이 없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지. 내가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리고 있지 않았겠나! 전에 그런 일은 결코 없었는데 말이지.”

그의 아들 삐에르는 건강을 되찾았다. 그 2년 뒤, 뻬기는 1차 대전에 나가 첫 희생자로 삶을 마감한다. 샤르트르 대성당을 향해 갔던 뻬기의 이 순례는 그 후 대학생들 사이에 놀라운 기세로 확산되어 새로운 순례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파리와 그 근교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 운동은 오늘날까지 젊은이들의 조직적이고 주제가 있는 순례로서는 세계에서도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부모가 된다는 것. 제 몸에서 나온 자식이 잘못되면 그 마음이 어떻게 되는지. 세상의 지위나 명예, 체면, 재산 등, 평소에 자신을 떠받쳐 주었던 것들이 그럴 때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를 사람들은 경험으로 안다.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애원하던 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복음에 소개되어 있다. 샤를르 뻬기는 현대에 나타난 그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렇게 애타는 마음으로 간절히 애원하는 순간 우리는 누구나 복음 속의 그 인물이 된다. 그 이야기를 보자.  

   - 그들이 군중에게 돌아오자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주님, 제 아들이 간질병으로 몹시 시달리고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아이는 가끔 불 속에 뛰어 들기도 하고 물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 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

참혹한 처지의 아들을 데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간청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표정이 눈에 선하다. 그와 함께, 자기네 실력으로는 고쳐지지 않는 것을 체험하고 열패감과 함께 군중에 둘러싸여 당황해하는 제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으니, 그 아버지나 제자들이 얼마나 큰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을까! 그때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의 간청을 듣고 하신 대꾸는 제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을까? 내가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이냐?” 이제 예수님의 삶도 얼마 남지 않았고,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제자들에게 물려주고 떠나야 할 때가 가까웠는데도, 제자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부터 보여주시는 장면은 제자들의 교육 과정에서 가장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아이를 나에게 데려 오너라’ 하시고는  마귀에게 호령하시자 마귀는 나가고 아이는 곧 나았다.”

이제 이 이야기의 결말이자 그것이 왜 성서에 기록되었는지를 밝혀주는 대목이 나온다.
“사람들이 없을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마태오복음(17,14-20; 그리고 마르 9,14-29; 루가 9,37-43)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믿음의 해’에 들어와 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의 문』 등, 이때에 맞춰 나온 모든 문건들이 믿음이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분을 만날 수 있는가? 복음서를 보면 샤를르 뻬기같이, 간질병에 시달리는 아들을 둔 아버지 같이 하면 그분을 만날 수 있다. 이 밖에도 복음에는 그분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들에게서 예수님 만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예리고의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소경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예수와 제자들이 예리고에 들렀다가 다시 길을 떠날 때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 가고 있었다. 그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앞 못 보는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눈을 뜬 사람들에게는 그분이 단지 “나자렛 예수”에 불과했지만, 눈이 먼 바르티매오에게는 오히려 그분이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였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여기서도 현실로 나타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늘 그런 것처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반발을 산다. “그러면 우리들도 눈이 멀었단 말이오?” 하고 대드는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0-41).

다시 바르티매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여러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 오너라’ 하셨다. 그들이 소경을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그분이 너를 부르신다’ 하고 일러 주자 소경은 겉옷을 벗어 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 다가 왔다. 예수께서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예수의 말씀이 떨어지자 곧 소경은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마르 10, 46-52).

바르티매오에게 조용히 하라는 주위의 꾸지람은 한가한 사람들의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예수님을 만나느냐 아니냐가, 계속 “어둠 속을 헤매는” 처지에 그대로 묶여 있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빛의 세계로 나갈 것인가가 걸린 문제다. 그러니 사람들의 제지에 아랑곳없이 그는 더욱 크게 소리지를 수밖에 없다. 그가 첫 번째 “소리지른” 데 이어, 조용히 하라는 사람들의 꾸중을 듣고 오히려 더 큰 소리를 질렀다고 했는데, 원문에는 이 두 번의 “소리질렀다”는 표현이 각각 다른 단어로 나타난다. 두 번째는 보통 소리가 아니라 맹수가 “포효했다”는 경우에나 사용되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일상적 예의나 체면을 벗어던지고 어떤 의미에서 “동물적”인 기세로 달려든 것이다. 그가 내지른 그토록 간절한 외침은 과연  효력이 있어서,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 오게 하신다. 자신을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그는 실제로 체면의 상징인 겉옷마저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 다가간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루가 11,11-13) 보통 부모의 심정으로만 미루어 보아도, 받고 싶어 하는 자녀 쪽보다 주고 싶어 하는 부모 쪽의 마음이 더 간절하다. 하물며 모든 부모 중의 부모이신 하느님께서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때로는 하느님께서 이토록 악을 쓰다시피 부르짖어야만 움직이시는 것일까?

이 거지 소경과 예수님 사이의 이 만남을 대하면서, 우리는 “심연은 심연을 부른다”(최민순 역,시편 42,7)는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 인간은 보통 감각 세계라는 파도에 휘말려 거기 함께 떠다니기 쉽기 때문에, 그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잊은 채 살 수 있다. 그러다가 지진이 발생하면 잔잔하던 바다가 뒤집혀 큰 해일을 일으키는 것처럼, 삶에서 무슨 큰 어려움을 당하면 평소에 보이지 않던 하느님이 갑자기 의식 속에 뚜렷이 나타날 수 있다. 이처럼, 하느님을 만나는 일은 흔히 일상적 의식 너머, 마음속 깊은 곳, 그 심연 속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깊은 마음, 그 양심이야말로 “하느님을 만나는 지성소”(사목헌장 16)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소경은 말한다.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눈먼 거지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이것이 전부다. 소경의 그 말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신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기적은 요술이 아니다. 요술은 상대방의 태도나 자세와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지만, 기적은 예수님께서도 상대방이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만 베풀어주실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예수님을 겉으로 스쳐간 사람은 수없이 많지만, 그분을 정말로 만나서 삶이 완전히 바뀌는 체험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극소수다.

예수님께서 예리고를 방문하셨을 때 그분을 에워싸고 따라간 사람들은 군중을 이루었지만, 그날 그분을 정말로 만나서 새사람으로 바뀐 이는 키가 작아서 그분을 볼 수 없는, 자신의 육체적 조건을 의식하고 간절한 심정으로 어떻게든지 그분을 만나고 싶어 길가의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갔던 세리뿐이었다. 침략세력에 빌붙어서 그 쪽에 부역하는 반역자에다가 동족을 착취하는 도둑으로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 낙인찍혀 살던 자캐오가 키가 작았다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조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인간의 품위를 이미 잃어버린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루가 19,10) 하느님의 아들에게는 그날 군중 속에서 그 사람만이 유난히 돋보였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이사 55,8-9).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눈으로 보신다. 이 둘의 눈이 얼마나 다른가?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들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루가 15,1-2).

세리와 죄인들. 당시에 이스라엘 사회에서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되고 당연히 하느님의 구원에서 제외된 이들로 낙인찍혀 그들을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크게 부정을 탈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어울려 음식까지 나누시는 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속이 뒤틀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다르게 보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루가복음 15장의 잃었다가 다시 찾아낸 것들에 대한 비유는 복음 중의 복음이라는 말 그대로, 인류에게 전해진 기쁜 소식의 진수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 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결국 같은 내용을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반복하신다. 잃었던 양의 비유가 주로 남자들의 일인 목축업에다가 양이라는 동물을 내세운 이야기라면, 두 번째는 주로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여자의 삶을 배경으로 하여 무생물인 은전을 내세우는 이야기이다. “또 어떤 여자에게 은전 열 닢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닢을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다 뒤져 볼 것이다. 그러다가 돈을 찾게 되면 자기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이 두 이야기에서 공통점은 주인이 잃었던 것들을 찾아 끝까지 추적하여 기어이 찾아내고야 만다는 점이다. 그것을 찾아낼 때까지 목자가 온 들판과 골짜기, 구덩이와 낭떠러지를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또 여인이 등불을 켜들고 컴컴한 방을 구석구석 쓸면서 바늘 하나 놓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찾아다니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G.K. 체스터톤이 말한 대로 하느님은 과연 “천국의 사냥개”라고 할 만하다. 사냥개가 먹이를 한 번 보았으면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 결국 잡아내고 마는 모습은 영혼을 찾아 끈질기게 추적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그림이다.

그런데 세 번째 이야기는 앞의 둘과는 다르다. 단조로운 아버지 집을 버리고 도시의 자유와 쾌락을 찾아 떠나는 아들을 아버지는 막지 않는다. 떠난 아들이 어떤 신세가 되었으며, 그가 몸 붙여 살고 있는 지역이 얼마나 심한 흉년이 들었는지를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을 터이지만, 아버지는 그를 찾아 떠나지도 않는다. 아들은 자유가 없는 양이나,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은전과는 다르다. 그는 자유를 가진 인간이요 아버지인 자신과 똑같은 인격체다. 아들이 제 스스로의 결단으로 집을 떠났듯이, 제 마음이 바뀌어 돌아오지 않는 한, 그것은 참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는 잘 안다. 그런데 그가 돌아오자, 그 알거지가 아들임을 먼저 알아보고 아버지는 창자가 뒤집히는 심정이 되어 달려 나가 아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춘다. 아들이 제 발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는 아버지가 먼저 알아보고 달려 나간 것이다. 그리고는 아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사랑과 용서의 몸짓을 보이고 이전의 영광스럽던 모습을 회복시켜준다.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샤를르 뻬기는 말한다. “죄인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에 있다. 성인 말고는,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죄인만큼 잘 아는 인간은 없다.” 큰아들의 불행은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를 몰랐다는 사실에 있다.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이해하기에는 스스로의 생각에 너무나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니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하시는 분과 인연이 멀었던 것이다.

믿음의 해를 맞아, 우리는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 씻어내야 할 죄가 얼마나 큰지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부족한지, 고치고 개선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 앞에 내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주실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는 일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관해서 제일 의미 있는 예의 하나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그분을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요한 4,1-42)이다. 물을 길으러 나갔다가 우연히 만난 인물을 점진적으로 깨달아 감에 따라 그 여자의 입에서 나가는 호칭이 달라진다. “유다인”, “랍비”, “예언자”, “그리스도”, 그리고 그 여자의 말을 듣고 그분을 만난 동네 사람들이 불러준 “구원자”라는 호칭에서 이야기는 끝난다. 인간이면 누구나 영적 목마름, 사랑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다. 우물물에 대한 목마름은 그것을 넌지시 가리키는 상징일 뿐이다. 그 목마름이 인간관계의 전형인 남녀 사이의 관계를 거쳐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목마름으로 건너가고, 그것이 충족되었을 때, 그 여자는 우물물을 길어 가려고 가져왔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돌아가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린다. 동네 사람들에게 한 그 여자의 말에서 우리는 무엇이 그 만남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나의 지난 일을 다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도 너무나 부끄러워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어둡고 망가져버린 지금까지의 삶을 정면으로 보게 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분의 시선이 가 닿은 것만으로도 그 여자는 자신의 뒤틀린 삶이 비로소 제 방향을 잡아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하고 말한 바오로 사도와 똑같은 체험을 했던 것이다. 이제 그 여자에게 죄 많은 과거는 “복된 탓”(부활 찬송가 중에서)이 되어, 그리스도를 만나는 계기로 바뀌었다.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면, 모든 것이 새로운 빛깔을 띠고 나타난다. 그래서 자신의 죄에서 벗어나게 된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바오로 사도와 함께 외친다.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로마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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