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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41호> 예언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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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ecil 작성일13-09-16 00:00 조회3,7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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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1)


종교인으로서 나는 지금 내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몸담고 있는 종교라는 세계는 본래 가야하는 길을 잘 가고 있는 것일까? 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내가 하는 말, 내가 살아가는 방식, 그것을 새삼 되돌아보며, 어떤 것은 이유와 타당성을 두고 따로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해오던 것이니까 그냥 타성에 젖어 습관적으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애초의 정신에 비해 무언가 나사가 풀린 것은 아닐까? 이런 의구심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자기 종교의 신념을 내세워 폭력을 휘두르고 전쟁까지 서슴지 않는가 하면, 개인구원만을 강조하며 이웃과 사회에 대한 관심은 그만큼 소홀히 한다든지,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신심으로 사람들을 유도하여 종교를 개인의 물질적 풍요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듯한 행태에 이르러서는 이 세상에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를 두고 바탕에서부터 다시 묻게 된다. 과연 현대에 와서 인류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로 종교적 광신주의를 지목하는 경우가 많은 것만 보아도, 이런 걱정은 몇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닌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마태오 복음 23장을 새롭게 발견할 기회가 있었다. 몇 년 전, 한 국제 모임에서 유럽 출신 한 주교로부터 들은 발언이 그 계기였다. 


- 그 때에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 23,1-4).-

이런 말로 시작하는 마태오 복음을 상기시키며, 그분은 우리가 이 마태오 복음 23장을 주일미사에서는 왜 읽고 묵상하지 않는가? 그것이 주일미사 독서집에 왜 채택되지 않았는가? 혹시 우리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대목이 주일미사 독서집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말씀을 듣고 찾아보니 과연 그것이 평일미사에는 나오지만 주일미사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대목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야말로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이 종교인으로서 자칫 빠져들기 쉬운 위험이 어디에 있는지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짚어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혹은 바리사이파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 특히 종교 세계에서 이른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반면교사로 제시해 주신 인간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학자들을 그토록 원색적으로 비판하시는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떤 유형의 인간에 속하는 것일까? 마태오 복음의 다음 대목에서 우리는 그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이었다”(마태 7,28-29).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그분의 ‘권위’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란 무엇인가? 그것은 힘, 능력이다. 권위가 없는 사람의 말은 입에서 나와 귓전만 스치고 바람처럼 사라지지만, 권위가 있는 이의 말은 곧 실체가 되고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이 된다. 하느님의 말씀은 창조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능력, 힘은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루가 복음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은 이것이었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가 24,49).

위에서 오는 능력, 그 힘은 성령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제자들은 바로 그 힘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 부활의 증인, 그분께서 가지셨던 똑같은 힘으로 그분께서 하시던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그렇게 제자들 안에서 믿음이 성령의 불길을 통해 생생한 힘으로 바뀌면 예수님께서 미리 들려주셨던 말씀이 실재가 된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 아버지께 가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주겠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주겠다”(요한 14,12-14).

증인. 그것은 ‘본’ 사람이다. ‘본’ 사람은 예언자다. 성서에서 예언자를 뜻하는 말은 기본적으로 ‘본다’는 동사에서 나왔다. 거기에 비해, 율법학자는 ‘들은’ 사람이다. 율법학자는 앞선 세대, 스승으로부터 듣고 배워서 그것을 다음 세대로 넘겨주는 사람이다. 듣는 것과 보는 것, 매개를 통한 간접 경험과 직접적 체험, 남에게 들어서 아는 것과 직접 보고 겪어서 아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百聞백문이 不如불여 一見일견 이라는 말은 그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구약 시대와 다른 것은 하느님에 대해서 주로 ‘듣기’만 하는 시대에서 그분을 직접 ‘보는’ 시대로 넘어왔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1요한 1-2).
욥이 온갖 모양의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하느님과 벌였던 기나긴 입씨름은 마침내 이런 고백으로 끝난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으로부터 듣고 그분을 찾아갔던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도 결국에는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우리는 당신의 말만 ‘듣고’ 믿었지만 이제는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요한 4,42).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이 시간과 공간의 벽을 뛰어넘어 하느님과 친교관계에 들어가는 일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를 이런 말씀으로 표현하셨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권위가 있는 말을 하는 사람, 명과 실이 같은 사람, 이름값을 하는 사람, 진리를 위해 참으로 몸 바치는 사람, 증인, 예언자 - 가뭄이 심하면 그만큼 더 큰 갈증을 느끼며 단비를 갈망하듯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잘 보이지 않고 모든 언어가 내용 없는 빈 껍질같이만 느껴질수록 우리는 그런 사람을 찾는다. 율법학자와는 달리 권위가 있는 사람, 자기가 하는 말에 스스로 깊게 휩쓸리는 사람, 한 마디로, 예언자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우리 사회가 겪어온 지난 한 세대가 생각나고, 민주주의와 정의, 평화와 인권을 위해 몸 바친 수많은 인사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 가운데에서도 조영래, 전태일, 이소선 이런 분들의 이름이 생각나고, 그 중에서도 조영래 변호사가 빛바랜 사진과 함께 내 기억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조영래. 나는 그분을 만난 적이 없다. 이력도 잘 몰랐다. 1980년대 후반 어떤 신문에 그분의 글과 함께 실렸던 사진이 기억의 전부다. 그 사진에서 그분은 담배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무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그분에 관해서 알고 있던 것은 독재 치하에서 쫓기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변론해 주신다는 것 정도였다.

갑자기 그분이 생각나서 나는 조 변호사님이 쓰신 책 두 권을 급히 구해서 읽었다.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창작과 비평사)와 「?전태일 평전」?(전태일기념사업회)이 그것이다. 나는 당시 도하 신문에 크게 보도되던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을 접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큰 충격에 빠져 있다가, 그 사건의 주인공이던 처녀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 1986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아버지의 심경’이란 글을 읽고 나름의 소회를 적어 1986년 11월호 경향잡지에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조영래 변호사의 책에서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변론 요지’를 발견하고 나는 오랜만에 눈물을 억제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며 그것을 읽었다. 그리고 조영래 변호사가 어떤 분인지를 더욱 깊이 알게 되었다.

   - 변호인들은 먼저 이 법정의 피고인석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권 양 ─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을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에게 무엇을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눈물 없이는 상기할 수 없는 ‘권 양의 투쟁’ — 저 처참하고 쓰라린, 그러면서도 더없이 숭고하고 위대한 인간성에의 투쟁에 대하여, 그리하여 마침내 다가올 ‘권 양의 승리’, 우리 모두의 승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해맑은 연꽃처럼 오늘 이 법정을 가득히 비추고 있는 눈부신 아름다움, 그 백설 같은 순결, 어떤 오욕과 탄압으로도 끝내 꺾을 수 없었던 그 불굴의 용기와 진실을 위한 눈물겨운 헌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지금 이 법정에서 이룩되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          

이런 말로 시작되는 변론은 당시 정의감에 불타던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운동권학생’, ‘위장취업자’ 등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이 어둡고 부패한 사회를 어떻게 밝혀주고 건강을 되찾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관해서 명쾌한 논설을 펴고 있다. 그리고 경찰, 검찰, 언론 등이 그 이름에 걸맞은 역할을 하는 대신 얼마나 철저히 통치자의 의도에 따라 사안을 구부리고 뒤틀었는지를 소상히 논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언론에는 ‘보도지침’이라는 것이 하달되어 사안의 객관적 진실과는 상관없이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여 국민들에게 알렸는지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우리는 국가와 권력의 존립근거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란 그 구성원인 국민의 인간적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만 존재할 정당한 이유를 지니는 것입니다. 만약 국가의 공권력이 거꾸로 국민의 인간적 존엄성을 훼손하고 인간적 가치의 실현을 제약하는 파괴적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면, 그 같은 공권력은 더 이상 존재하여야 할 의의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권 양은 우리에게 ‘진실에의 비밀은 용기뿐’이라는 교훈을 온 몸으로 가르쳐주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미 혼탁하고 타락한 세대의 신화가 되어버린 권 양의 투쟁에서, 일찍이 김수영 시인이 노래하였듯이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흐르는가’를 배웠습니다. 권 양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는 슬픔과 절망으로 왔으나, 이제 우리는 가슴 가득한 기쁨과 희망으로 권 양의 승리에 대하여 증언하고자 합니다.”


“이제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우리는 국가와 권력의 존립근거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국가나 국가기관만이겠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제도나 단체 혹은 공적 기관들에게도 똑같은 물음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속한 종교세계만 해도 그렇다. 조영래 변호사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 내심의 사상·양심·신조는 신과 인간의 교섭의 영역이므로 국가권력은 이 聖所성소에 출입할 권리가 없다”(「?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97쪽). 종교는 바로 이 근거로 한 사회에서 특수한 역할을 인정받고 개인과 사회에 기여한다. 그런데 종교세계에서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이들이 종교 특유의 이 역할을 살려 사람들을 진리와 사랑 쪽으로 인도하는 대신, 소속 종파의 세력 확장이나 재화의 축적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면, 그 종교 역시 존립근거를 잃는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신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겨우 한 사람을 개종시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개종시킨 다음에는 그 사람을 너희보다 갑절이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고 있다”(마태 23,13-15). 그런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의 관심이 주로 어디로 기울어지는지에 관해서도 말씀하신다. “너희 같은 눈먼 인도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 하니, 이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황금이냐? 아니면 그 황금을 거룩하게 만드는 성전이냐?”(마태 23,16-17).


한 나라, 한 사회에서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이른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이들은 성서의 이 대목과 조영래 변호사에게서 큰 빛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법조인은 물론이고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할 직분을 맡은 모든 사람들은 조 변호사가 쓴 책을 읽고 그가 사회적 약자들을 얼마나 뜨거운 가슴으로 껴안고 함께 아파하며 그들의 편이 되어 온 세상의 질서와 권력을 상대로 변호해 주었는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권인숙 씨는 조 변호사의 장례식 추도사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조 변호사님은 변론을 하시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변론을 마치신 후에도 내리 울고 계셨습니다. 그때서야 저는 처음으로 조 변호사님이 제가 당한 성고문사건을 얼마나 깊게 아파하고 계셨는지, 그리고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이 사회에 얼마나 크게 분노하고 통탄하고 계셨는지를 알 수 있었고, 그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위의 책, 351쪽).
“아버지,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17). 예수님께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제자들을 위해 하느님께 바친 이 기도 말씀의 참뜻을 우리는 조영래 변호사에게서 배운다. 권 양이라고만 알려졌던 한 짓밟힌 처녀를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수치심에서 자랑스런 모습으로 데려 내온 이는 바로 그였다.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한 한 이름 없는 청년을 한 시대의 어둠을 밝힌 횃불로 높이 들어 올린 이도 역시 조영래였다.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의 변론만이 아니라, 전태일 평전 역시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자신의 몸을 태운 불꽃으로 외칠 수밖에 없었던 한 노동자를 대신해서 온 세상을 향해 뜨거운 가슴으로 펼치는 변론이다. 조영래 —  그는 당대의 위대한 예언자, 진리의 증인, 억눌린 이들의 변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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