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42호> 예언자(2)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열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09-16 00:00 조회4,016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예언자(2)-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열기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면 내 일을 마친다.’하고 전하여라.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루가 13,32-33)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첩보와 함께, 어서 그 자리를 떠나 몸을 피하시라고 권고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왕직(혹은 목자직), 그들의 삶 전체를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물로 변화시킴으로써 이 세상의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게 하는 사제직,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여 참 삶의 길을 밝혀주는 예언직을 수행하셨고, 이 세 가지 직무는 서로 긴밀히 얽혀 있어서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놓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모든 신앙인들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이 세 가지 직무를 수행한다. 그런데 예수님 스스로 명백히 표현하신 직무는 이 가운데에서도 예언직이 가장 대표적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예언자로 의식하시고 앞서 간 예언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당신의 사명을 깨닫고 그 길을 충실히 가셨던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예언자이셨다. 그분 앞에서는 과거의 모든 예언자들도 진정한 예언자이신 그분의 어떤 한 면만을, 그것도 희미하게 보여주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한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천사의 칭호보다 더 높은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으심으로써 천사들보다 더 높은 분이 되셨습니다”(히브 1,1-4).
죽음. 예수님의 생각에 예언자는 언제나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사람이다. 진리는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너희는 미워할 수 없지만 나는 미워하고 있다. 세상이 하는 짓이 악해서 내가 그것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요한 7,7). 예언자가 칭송을 받을 때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죽어 그의 목소리가 아득한 과거로 흘러가서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을 향해 동대문 시장 공장 노동자들의 인권을 주장하며 불꽃 속에서 사라진 전태일의 기념비 앞에서는, 그때나 별로 다를 것 없는 노선을 계속 가고 있는 정치인들도 머리를 조아려 경의를 표한다. 전태일의 가족과 친구들의 표현대로 “살아 있는” 전태일들은 여전히 외면한 채, “죽은” 전태일은 아무 부담 없이 칭송하며 오히려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 인심은 언제나 마찬가지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성자들의 기념비를 장식해 놓고는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 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떠들어댄다. 이것은 너희가 예언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 나는 예언자들과 현인들과 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그러나 너희는 그들을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매달고 또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며 이 동네 저 동네로 잡으러 다닐 것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낸 이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마태 23,29-32.34.37).
그래서 예언자 가운데 예언자, 곧 <그> 예언자 예수께서는 당신 말씀의 진정성을 목숨으로 증언하셨다. 그런데 그분의 죽음은 적대세력의 음모와 악의에 찬 술수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분은 다른 모든 예언자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분의 말씀 그대로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요한 10,18). 예수님께는 당신의 죽음이 “사랑이신”(1요한 4,8.16) 하느님의 모습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계기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에서 맞으신 참혹한 죽음이야말로 그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모습, 가장 찬란한 영광의 순간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바로 앞두고 아버지께 드린 기도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주십시오”(요한 17,1).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요한 3,10)이라고 말씀하신 니고데모는 유다교뿐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 모든 종교를 대변하는 인물로도 볼 수 있다. 그런 니고데모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하신 것을 표현하는 데에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입에서 귀로 전해지는 말만으로는 부족하고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본> 사람이 하는 <증언>을 통해서만 사람이 비로소 믿을 수 있는 것이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너희는 내가 이 세상 일을 말하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요한 3,11-21).
인류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재능을 타고 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수학자, 물리학자, 발명가, 철학자, 신학자로서 이 각 분야에서 모두 독창적이고 놀라운 업적을 남기고 39세의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한 블레스 파스칼(1623-1662)은 가장 극적으로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죽어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윗저고리 안쪽에 실로 꿰매어 늘 간직하고 살았던 글 한 조각이 발견되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글에서 파스칼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하늘의 불을 체험한 날짜와 그 시간까지 정확히 기록하며 이렇게 적고 있다.
- 1654년 성년. 11월 23일 월요일. 교황이며 순교자인 성 클레멘스와 다른 순교자들의 축일. 성 크리소고노 순교자와 다른 성인들의 축일 전야. 대략 밤 10시 반에서 12시 반까지.
불.
철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
당신의 하느님이 나의 하느님이 되시다.
오직 하느님 이외에는 세상과 다른 모든 것을 다 잊다.
복음에 제시된 길 밖에서는 그분을 찾을 수가 없다.
인간 영혼의 위대함이여.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당신을 알지 못했지만 저는 당신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나는 그것을 잃고 살았었구나.
그들은 생수가 솟는 샘인 나를 버렸도다.
나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저를 버리시겠나이까?
영원히 당신을 떠나지 않기를.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이신 당신을 알고,
당신께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나는 그분을 떠났고, 그분에게서 도망쳤으며,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었다.
이제 다시는 그분을 떠나지 않기를.
복음에 제시된 방법만이 그분을 간직하게 해 준다.
일체의 것을 완전히 떠남의 달콤하고 후련함이여.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 지도자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맡김.
세상에서 하루 동안 훈련을 하고 얻게 되는 영원한 기쁨.
당신의 말씀을 결코 잊지 않으리이다. 아멘. -
이런 파스칼의 마음속에 가장 깊이 꽂힌 성서 대목 가운데 하나가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이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성서에도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버리고 똑똑하다는 자들의 식견을 물리치리라’ 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고린 1,17-25).
예언자는 증인이고, 증인은 <본 사람>, 자기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다. 상대방이 믿건 말건 본 것은 본 것이고, 본 것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말의 진정성을 보통 언어로 설득력 있게 전달할 길은 없다. 유일하게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는 수단은 다른 데에 있다. 증인이 스스로 한 말을 입증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 목숨을 내놓는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을 걸어갈 때, 모세의 손에 높이 들린 구리뱀이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주었다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는(민수 21,4-9) 예수께서 당신이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죽으심으로써만 사람들을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구해주실 수 있음을 암시하는 사건으로 이해되었다. 십자가에서 드러날 그분의 본 모습, 그 영광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바라봄>의 대상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람이 그 모습을 참으로 볼 수 있는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지적 능력이 아니라, 그의 생활방식이 선이나 악 가운데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가이다.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요한 3,20-21).
삶의 깊은 의미를 두고 멀찍이 서서 싸늘한 머리로 탐구해서 도달하는 “이해”, 그리고 삶에 따른 빛과 그림자, 행복과 불행, 희망과 절망을 밑바닥까지 온 몸으로 맛봄으로써만 터득할 수 있는 “깨달음”. 이 둘 사이의 거리를 체험한 사람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욥이다. 그가 당한 불행을 두고 그의 친구들로 대표되는 합리주의적 해석과 거기에 맞서 같은 수준에서 진행된 말씨름이 위로는커녕 도리어 쓰라린 상처를 더욱 헤집는 효과만을 통절히 맛보게 한 다음,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욥 42,4). 그 때 비로소 욥이 대답한다.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린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욥기 42,2-3.5-6).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루가 12,49-50). 물속에 잠기는 방식으로 요한의 세례를 이미 받으신 예수님께서, 또 하나의 세례를 받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번에는 물이 아니라 온 몸에서 쏟아져 나온 피를 뒤집어쓰시는 일, 곧 십자가의 수난을 가리켜 그분은 세례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그분은 이 세상에 불을 지르실 것임을 암시하신다.
과연,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죽음, 부활, 승천을 거쳐서 비로소 보내주실 수 있게 되어 마침내 오순절에 파견하신 성령은 하늘의 불이었다. 그리고 그 불은 혀의 모양으로 나타남으로써, 사람이 이 하늘의 불을 받을 때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는 사람, 곧 예언자로 변화될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열두 제자들은 그 불을 받고 비로소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사도 9,27;9,28;13,46;18,26;19,8;28,30;로마 10,20;에페 6,19;6,20;1데살 2,2;로마 10,20)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가 이미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성서을 새롭게 보는 눈이 뜨이면서 하늘의 불이 그들의 가슴에 얼마나 뜨겁게 타오르게 되었는지를 잘 말해 준다. 그 두 제자는 본래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어디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나 보자. 그렇게만 한다면 우린들 안 믿을 수 있겠느냐?”(마르 15,32).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내뱉은 이 말이 별 수 없이 자신들의 가슴속에서도 메아리치고 있음을 의식한 그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같이 길을 걷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그분이 하신 말씀이 그들의 식은 가슴에 불을 일으켰다.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루가 24,25-27). 이때를 회상하며 제자들은 조금 후에 이렇게 말한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새번역 성경』 루카 24,32). 이렇게 성서의 말씀을 새롭게 깨달은 다음, 빵을 떼는 성찬 전례를 거행하면서 제자들의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깊이 만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 지혜를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1고린 2,9-10ㄱ).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증언하는 대로, 그리스도교는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 주신 일, 곧 하느님 아들이 인간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일을 믿고 선포한다. 그리고 이 증언은 냉랭한 어조로 이치를 따져가며 제시하는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먼저 보고 만나고 체험한 사람의 증언이다. 증언에는 불기가 있게 마련이다. 목소리가 크든 작든, 증언하는 사람의 말씨와 태도에는 성령이 보장하는 확신이 스며 있어서 그것이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행사한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마태 10,20).
사제의 강론에서 신자들의 신앙체험 발표를 거쳐서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나간 신자들의 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앙언어는 무엇보다도 우선 자기가 먼저 겪고 경험하고 본 사람으로서의 증언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전하는 말이 상대방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뼈와 영혼 속 깊이를 휘젓고 돌아, 그 사람 자신을 먼저 살려주고 새로운 빛과 희망을 주었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본 것을 남에게 증언하는 사도의 소명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복음화에서 강조하는 열정은, 이처럼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인 성령 안에서 내 안으로 들어오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 복음의 증언은 언제나 불타는 말씀이며, 그것이 타고 있음은 말하는 이의 억양, 눈빛, 표정 등 종이에 적어 읽을 수 있는 내용보다 거기에 덧붙여진 인격적 특성에서 온다. 무표정한 얼굴로 남 이야기 하듯이 말한다거나 습관적 혹은 기계적으로 힘없이 말하는 것보다 복음선포와 증언에 더 어울리지 않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당신들이 입으로 말하는 그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 당신들의 얼굴과 눈빛에서도 확인될 수 있었다면, 내가 이처럼 무신론자가 되어있지는 않을 것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가장 극렬한 무신론자가 되어 버린 니체의 이 말은 복음을 말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비수처럼 꽂혀 언제나 우리의 의식이 습관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어야 한다. 불타는 말 앞에서 우리는 함께 불타든지, 아니면 돌아서서 얼음을 향해 가든지,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 중간 입장이란 실제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차라리 네가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 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
그러나 진정한 예언자는 말한다.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습니다. 서로 때려잡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주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예레 20,7-9). 며칠 전까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벌벌 떨었던 열두 제자도 하늘에서 내려온 불을 받고는 최고의회 앞에서 서슴없이 외친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겠는지 한번 판단해 보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사도 4,1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