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44호> 이순이와 ‘복음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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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ecil 작성일14-03-12 00:00 조회4,59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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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 나타난 새로운 인간형 - 이순이
1. 새 인간
-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와 사상의 세례를 받은 이순이는 예전의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간이었다.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이었다. 당연히 그가 쓴 글도 종전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순이는 세상을 헌신짝처럼 보았다. 누구나 결국에는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죽을 때까지 연연하며 버리지 못하는 것이 삶이다. 그런 것을 이순이는 십대 어린 나이에 버리려고 결심했다. 물론 그 전에도 세상을 버리고 은둔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세상에 실망해서 은둔한 학자도 있고 세상은 원래 허망한 것이라서 버린 스님도 있었다. 하지만 이순이는 그런 은둔자와는 달랐다. 마음속으로는 세상을 버렸지만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세상살이를 잘 하려고 노력했다. 누구보다 성실한 삶을 살았다. 이순이에게 이 세상은 저 세상으로 잘 가기 위한 시험장에 불과했다. 저 세상으로 잘 가려면 이 세상의 시험을 잘 통과해야 하기에 누구보다 성실히 살았고 세상에 크게 이바지하고 잘 죽기를 바랐다. 이순이가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또 막대한 유산의 상당 부분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연스런 성욕과 재물욕 마저도 극복하면서 세상을 더 잘 살다 죽기를 바란 것이다. 이런 자기 극복의 종점에 있는 것이 순교였다.
옛날에도 충효의 덕목을 위해 육체적 고통을 기꺼이 감내한 충신과 효자가 있었지만, 이순이처럼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기뻐하고 감사한 인간은 없었다. 모든 일이 영광이고 은총이고 기쁨이고 감사인 사람은 없었다.(필자 추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면서도 그 아버지의 삶이나 얼굴에서 기쁨을 찾아볼 수 없어서 19세기 가장 극단적인 무신론자가 되어버린)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같은 사람의 눈에 바보로 보일 정도로 이순이와 같은 순교자의 목표의식은 뚜렷하고 강렬했다. 이처럼 강한 의지는 한국 역사에서 일찍이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1) -
어떤 공식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서울대학교 정병설 교수가 최근의 자기 저서에서 동정부부 가운데 여성 쪽인 이순이의 한 생을 두고 한 말이다. 한 종교인으로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한 인간으로서, 이순이가 보인 모습이 오늘날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한 지성인에게 이렇게 큰 감동과 빛을 주었다는 사실이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순이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 혹은 종교를 뛰어넘어 인류 보편적 가치를 일깨워주는 빛으로서 모든 사람의 삶을 밝혀주는 인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도 마지막 부분의 한 구절이 우리의 감각을 새삼 흔들어 깨운다. “옛날에도 충효의 덕목을 위해 육체적 고통을 기꺼이 감내한 충신과 효자가 있었지만, 이순이처럼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기뻐하고 감사한 인간은 없었다. 모든 일이 영광이고 은총이고 기쁨이고 감사인 사람은 없었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기뻐하고 감사한 인간.” 이순이와 같은 해에 순교하고 백서帛書의 저자로 잘 알려진 황사영은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해를 받아 죽었다고 해서 모두가 다 참 순교자는 아니다. 죽음에 임해서도 기쁨을 간직한 사람만이 참 순교자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당신의 첫 사도적 권고서 「?복음의 기쁨」?에서 그 출발점이자 토대로 설정하고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이런 기쁨을 체험한 신앙인은 그 자연스런 결과로 그 복음을 증언하게 된다. 보통은 그 증언이 살아가는 태도와 말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모양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과 물질을 나누는 것은 사도 시대(사도 2,42-46; 4,32-37) 이래 가장 자연스럽고 구체적인 행동이 된다.
그런데 이순이는 정병설 교수의 말대로, “막대한 유산의 상당 부분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겠다고 결심했다.” 사회정의나 사회복지 등은 관념조차 분명치 않았던 당시에 이순이는 복음의 기쁨을 체험하고 그 당연한 결과로 여기까지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오늘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복음의 사회적 차원’을 통찰하고 실천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비록 그런 생각을 실현하기 전에 재산뿐 아니라 목숨까지 바쳐 순교하는 바람에 그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이사악을 바치려고 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시고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창세 22,12)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처럼, 그런 생각을 실천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성서에서 ‘순교’라는 말과 ‘증거’, 혹은 ‘증언’이라는 말이 실제로는 같은 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가 이순이와 같은 정신으로 살면서 복음을 ‘증거’한다면 우리도 그분과 다름없는 길을 가는 셈이 되는 것이다.
2. 올해는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부부와 그 가족, 그리고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등 우리나라 교회 역사 초기의 순교자들이 복자위에 오르실 것이다. 그리고 동정부부를 비롯한 그 가족의 유해를 지금의 위치로 옮겨 모신 지 꼭 100년이 되는 올해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오셔서 시복식을 거행하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손길이 함께하여 이루어진 일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이번의 시복식으로 하여 치명자산에 누워계신 분들을 비롯한 우리나라 교회 역사 초기에 순교하신 분들이 세계적으로 새로운 각광을 받게 된 이때에, 당대 교회사의 대가이신 다블뤼 주교로부터 “한국 순교사에서 가장 찬란히 빛나는 진주”라는 칭송을 받았던 이순이 루갈다가 한국 교회사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 전체에서도 이전에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새로운 인간형”으로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이 가톨릭교회 역사에 혜성처럼 나타나, 복음의 빛에 비추어 교회의 삶 전반을 다시 돌아보고, 사도적 권고서의 제목 그대로 ‘복음의 기쁨’을 재발견하게 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과 맞물려, 우리는 이순이에게서 이 시대를 밝혀주는 찬란한 빛의 면모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이 기회에 이순이의 정신에 비추어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권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 대한 반향
3. 이 문헌은 2013년 11월 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신앙의 해’를 마감하면서 반포되었고, 우리말 번역본은 2014년 2월에 출판되었다. 이 문헌을 우선 형식적으로 볼 때, 맨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새로운 복음화’를 주제로 2012년에 열렸던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시노드)의 후속 문헌으로서, 그 제목에 ‘시노드 후속’이라는 관례적 표현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빠졌다는 점이다. 그 대신 교황님은 이 문헌 제16항에서 이렇게 밝힌다. “저는 시노드의 교부들이 이 권고서를 써달라고 요청하신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요청에 답하는 가운데 저는 시노드의 작업 결과를 많이 수용하였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저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조언을 구했으며, 교회의 복음화 작업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장을 숙고하는 일에 나 자신의 관심과 생각을 보태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많은 이들로부터의 조언과 자신의 생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2007년 5월 13일부터 31일까지 브라질 아빠레시다에서 열렸던 제5차 남미와 카리브 연안 지역 주교회의 연합 총회 문건이다.
4. 우선 「?복음의 기쁨」?이 가톨릭교회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특성을 좀 더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서 교회 안팎의 평가를 먼저 살펴본다.
1) 미국의 유명한 시사 주간지 <타임>은 2013년 12월 23일자 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면서 편집 주간의 논평과 몇몇 탐방 기사를 실었다. 그것을 간추리면 대략 이렇다.
“지나가고 말 것들을 숭상하는 문화”는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 “우리가 거의 의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 앞에서 마음 아파하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며 함께 울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그들을 도와야겠다는 감정을 상실한 채, 이 모든 것은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며 내 의식에서 이런 일을 몰아내고 있었습니다. … 번영과 풍요의 문화는 우리를 죽이고 있습니다.” 말도 많았던 이 한 해에 다른 모든 말들을 잠재우며 사람들의 의식에 뇌성처럼 크게 울려온 이 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 교황직을 수행한 지 한 해도 안되는 동안 그는 대단한 일을 해냈다. … 록 스타 못지않은 인기로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가운데, 그는 ‘돈이라는 우상숭배’을 맹렬히 공격했다. 대통령 후보였던 제씨 잭슨 목사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인물이라고 하는가 하면, 러시 림보 같은 사람은 프란치스코를 마르크시스트로 의심한다. … 그동안 지도급 인사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언짢게 하는 발언을 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간혹 그런 경우가 있으면 참신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보수주의자건 진보주의자건 간에 새 양심의 소리 앞에서 어느 쪽이건 분명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카리스마적 인물이 하는 말 앞에서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말임을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듣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말을 이 양반이 쏟아 놓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2) 미국 휴스턴 성토마스대학교 신학대학 랜들 스미스 교수는 말한다. “이 문헌을 읽는 사람은 이것이 교회의 사회교리 문헌 가운데 가장 최근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과연, 교황은 교회의 역할 ─ 곧,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 역할 ─ 을 사회 정의의 요구와 멋지게 통합하고 있다. 한 예를 들어보자. 이 문헌에서 교황은 가난한 이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오늘날의 경제체제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 이 점이 정말 전례가 없었던 것인데 - 제대로 된 강론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두 가지를 한데 묶어 놓았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복음화는 말과 행동, 이 둘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정의를 위해서 뛰어드는 것, 그리고 강론과 전례를 통한 복음선포는 두 가지 별도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3) 성 버나데트 성당의 주임 신부이며, <미국 가톨릭 목소리> 책임자인 로저 랜드리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 「?복음의 기쁨」?에는 세 가지 중심 주제가 있다.
첫째,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가 자기 보존 경향에서 탈피하여 언제나 선교mission 지향의 상태로 건너가는 쪽으로 근본적 개혁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선교 사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선교 사명 자체이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이 말씀에 따라 교회는 아버지로부터 보내심 받은 예수님처럼, 그분과 함께 보내심 받음 자체이다.
둘째, 가톨릭은 신자, 수도자, 성직자 할 것 없이 누구나 보내심 받음, 곧 ‘사명-파견’을 <받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바로 사명-파견<이다>’.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선교하는 제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신앙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일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분의 구원하는 사랑이 우리를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힘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그런 기쁨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지 않고서는 그들을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에게 촉구하는 복음화는 여러 요인을 지니고 있다. 먼저, 그것은 “큰 기쁨의 소식”이다. 복음선포자는 방금 초상집에서 나온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다음, 그것은 선포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살리려고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고,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주고, 온갖 속박으로부터 풀어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이 단순하고, 명확하며, 긍정적이고, 마음을 울리는 선언이어야 한다.
셋째, 참된 복음화는 사회의 변화를 겨냥한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가난을 함께 나누셨고,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으며, 가난한 이들이 당신 자신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고 그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셨다.
이것은 모든 가톨릭 신자들을 잠에서 흔들어 깨우는 기상나팔이다. 교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신앙생활을 그만 둔 지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는 대단히 시의적절하다. 하지만 신앙생활이 활기를 띠고 번창하고 있는 지역에서도, 교회가 지나치게 제도화 쪽으로 기울어져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방향으로 치달을 위험은 늘 존재한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본당으로 자리 잡고 학교, 병원, 각종 서비스 센터가 잘 돌아가는 데까지가 선교 단계이고, 그 이후에는 할 일이 별로 없는 것처럼 생각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의 모든 활동이 언제나 밖을 향해 나가는 선교적 동력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를 병들게 하는 근본 원인은 자기 안으로 폐쇄해 들어가는 것, 자기도취, 자기중심적 성향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교황제도, 교구 행정조직, 본당, 기타 모든 교회 활동과 사도직들이 전면적 자기 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그 모든 것들이 선교 사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결코 자기 보존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보시기에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개혁이며, 교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한 길이다. 새로운 복음화에 있어서 강론에 관한 부분에서 - 이것은 역사상 교황의 문헌 가운데 가장 자세하고 구체적인 강론 지침이다 - 예외적으로 “세심하고 소상하게” 언급하는 것 말고는, 이 사도적 권고의 나머지 부분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 자리에 선출된 이후, 그동안 강론, 알현, 삼종 기도 때의 묵상, 언론과의 대담 등 여러 기회에 누누이 강조한 것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권고서는 교황으로서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을 부각시켜 종합해 놓은 것인 동시에, 2007년의 아빠레시다 문헌을 교황의 가르침으로 격상시킨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각을 잘 요약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읽으면서, 그분이 지금까지 사용한 가장 강력한 이미지 가운데 두 가지가 빠진 것을 보고 놀랐다. 교회를 ‘야전병원’으로 묘사한 일이 그 하나이다. 교회는 상처 받고 쓰러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어야 하며, 이것이 새로운 복음화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교회의 복음화 활동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 이야기에 비유하여, ‘마음을 불타게 했던’ 예수님의 역할을 교회가 이어서 수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브라질 세계 청년대회 기간에 주교들에게 한 연설에서 사용했던 비유였다. 나는 이것이 새로운 복음화의 방법으로 제시한 다른 어떤 것보다 강력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이 권고서에서도 거기에 대해 좀 더 부연 설명을 해 주실 것으로 기대했다. -
4) 미국 개신교 복음주의파를 대변하는 펜실베니아의 메시아 대학 존 피 교수는 <「?복음의 기쁨」?이 가톨릭만을 위한 것이 아닌 10가지 이유>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 복음의 기쁨은 평신도, 성직자를 막론하고 모든 가톨릭인들을 흔들어 깨워서 세상을 복음화하는 일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교황의 말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었으나, 우리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새 문헌을 모르고 지낸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 안에는 복음주의자들이 가슴을 활짝 열고 환영해야 할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1) 복음의 기쁨은 성서 인용으로 가득 차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의 성서를 사랑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확실히 그렇다. 나는 이 문헌에서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성서 인용이 205회나 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실제로, 이 문헌은 마태오복음 28장의 대파견사大派遣辭가 함축하고 있는 것을 풀어놓은 설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2) 복음의 기쁨은 교회의 가르침을 본질적인 측면과 부차적인 측면으로 구분한다. 개신교 측의 그리스도 신앙 이해는 다른 모든 교리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속죄 사업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복음주의자들이 거의 성인으로 여기는 빌리 그레엄을 생각해 보자. 그레엄은 아마 교회의 몇 가지 교리에 관해서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차이를 초월한다는 복음 메시지를 내세워 이런 구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와 비슷하게 프란치스코는 복음주의 ─ 하느님이, 그리고 하느님만이 우리를 죄가 빚어낸 여러 가지 결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셨다. ─ 를 첫째 자리에 두고, 신앙의 “부차적인 측면들”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메시지의 핵심을 전달해 주지는 않는다”고 가르침으로써 자기 교회를 흔들어 깨운다.
(3) 복음의 기쁨은 본질상 반-문화적이다.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생활에서 언제나 특전적 위치를 향유해 왔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은 초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겪었던 것과 같은 박해를 받은 적이 없다. 흔히 복음주의자들은 교회가 참된 의미의 성장을 이룬 것은 박해 시기였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박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이교적 행태를 흔들어 깨우는 특유의 메시지를 개발하고 전파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소비주의, 자본주의, 탐욕 등 미국의 생활 방식을 규정하기에 이른 세력들에 맞서 싸우라고 외친다. 그런 물질주의의 거대한 물결은 하느님의 말씀을 수장시켜버리고, 참된 기쁨을 줄 수 없는 “쾌락들”을 주겠다고 떠들어댄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식의 생활방식을 그만두어야 한다. 이 문헌 속에는 미국 중산층 복음주의자들이 경청해야 할 교훈이 들어 있다.
(4) 복음의 기쁨은 인격의 존엄성을 크게 부각시킨다. “하느님의 모상” 관념, 혹은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믿음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가톨릭 사회 교리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사회, 정치, 문화 분야에 개입할 때, 하느님 모상 관념이 함축하는 의미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프란치스코는 소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돌아온다. 경쟁의 법칙과 적자생존의 원리는 그런 경제체제 아래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가치를 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대로, “그런 경제체제는 사람을 죽인다. 나이 든 무주택자가 추위에 떨다 죽으면 뉴스 거리도 안 되고, 주가가 2%만 올라도 뉴스가 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복음주의자들은 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5) 복음의 기쁨은 가족을 중시한다. 1970년대부터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계속해서 “가족 가치”에 관해서 말해왔다. 그런데 그들이 이런 표현을 쓸 때, 그들은 보통 낙태나 동성 결혼을 생각하고 전통적인 핵가족을 옹호한다. 프란치스코는 이런 식의 가족 가치에도 분명히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복음의 기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가족 옹호를 제시한다. 그는 “깊은 문화적 위기”가 가정을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더 이상 신앙을 전달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혼은 “부부가 삶을 총체적으로 함께하고 나누겠다고 결심하고 그런 삶을 받아들이는 의무”로써가 아니라, 서로 “감정을 만족시키고 일시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개인주의가 가정 안에서의 상호관계를 약화시키고 “가족의 유대를 뒤틀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주의자들도 믿을 수 있는 가족 옹호 메시지이다.
(6) 복음의 기쁨은 성령의 기운으로 가득 찬 복음주의를 요청한다. 때로 프란치스코는 자기 회중에게 “인격적 복음주의”의 기교를 설명하고 있는 복음주의 성직자와 비슷한 논조를 구사한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이들에게 이웃이나 전혀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말한다. 그는 복음에 관해 말할 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지에 관해서도 설명한다. 대화에 성서 말씀을 어떻게 끌어들일 것인지, 증언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어떻게 구할 것인지, 또는 “사람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고, 지금도 살아 계시며, 우리를 구원하기 바라시는 하느님의 인격적 사랑”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에 관해서도 가르친다. 빌리 그레엄도 그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프란치스코를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거리에서 진짜 경쟁자를 만난 셈이 될 것이다.
(7) 복음의 기쁨은 복음의 확산을 각자의 인격적 신심에 연결시킨다. 복음주의자들은 오래 전부터 기도, 단식, 성서 봉독 등 영적 훈련을 통한 인격적 신심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이런 훈련들은 길 잃고 헤매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필요한 영적 자산들이다. 가톨릭 신자들의 민중 신심은 복음주의자들이 영성을 실천하는 방식과는 크게 다르지만, 프란치스코는 “민중의 신비주의”가 “신앙을 삶으로 실천하는 방법으로써 정당한 것”이며, 세상에 “선교적 힘”의 원천이 된다는 점을 교회에 분명히 환기시킨다.
(8) 복음의 기쁨은 호교활동을 권장한다. 지난 50년 동안 복음주의자들은 무신론, 사이비 종교, 과학계의 유리주의적 사고 등에 맞서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기 위한 사역을 계속해 왔다. 복음주의 호교론자들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러러 모시고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하는 신약성서의 권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프란치스코는 이런 식의 호교 사역이 전문직, 과학, 학문 등 여러 분야에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그가 서술하듯이, “이것은 신앙, 이성, 과학이 만나서 가신성可信性의 문제를 두고 의론을 구축하는 가운데 새로운 접근 방법으로서 큰 의미가 있고,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게 하는 일에서 창의적인 호교 노력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 학문은 교회의 일차적 사명에 방향이 맞춰져야 한다.
(9) 복음의 기쁨은 주일의 강론이 마음을 움직이고 영감을 불어넣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가톨릭 미사에서는 하느님 말씀의 선포가 개신교 집회에서만큼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본당 사제들도 주간 미사 강론의 준비를 위해서 상당한 시간을 써야 한다. 프란치스코가 사제들에게 성서 대목을 분석하고, 성령의 비추심을 구하기 위해서 기도하며, 성서의 가르침을 신자들의 일상생활에 적용해야 한다고 가르칠 때 보면, 복음주의 신학교의 설교 담당 교수라도 되는 듯하다.
(10) 복음의 기쁨은 거룩한 삶을 살 것을 촉구한다. 프란치스코는 교회가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교리서는 깡마른 교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새로 신자가 된 사람들을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규정되는 그리스도인 양성 과정에 초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진리와 선이 마음속 깊이에서 발산하게 하면” 그들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게 될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이 이런 마음을 담은 주장에 어떻게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몇 가지 점에서 신학적 차이를 지니고 있고 그 차이는 - 지난 5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것이므로 - 앞으로도 유지되겠지만, 프란치스코의 말에서 우리는 몇 가지 분명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복음의 기쁨」?이 지니는 특성
5. 기쁨 : 그리스도인 개인과 공동체의 시금석試金石이며 반석盤石
이 문헌이 대전제로 삼고 끝까지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데서 오는 기쁨이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로 그리스도라고 불린다. 마찬가지로 한 자연인이었던 우리 하나하나도 같은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린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느끼셨던 그 기쁨을 옮겨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이 기쁨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을 식별할 수 있는 기준이며, 복음이 기쁜 소식인 이유이고, 그리스도처럼 이 세상의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뚫고 갈 수 있는 힘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액면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이다. 한마디로, 기쁨은 참된 그리스도인-복음선포자를 알아볼 수 있는 시금석이며, 그의 삶 전체를 떠받쳐주는 반석이다. 기쁨이 없으면,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공동체의 삶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여도, 신앙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 혹은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과 대세라는 홍수가 밀려오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복음선포자가 체험하는 특유의 기쁨에 관해서 가장 잘 말해주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루가복음 10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주께서 달리 일흔두 제자를 뽑아 앞으로 찾아가실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미리 둘씩 짝지어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 떠나라.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 것이며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마라’”(루가 10,1-4).
주님께서 특별히 뽑아서 당신 곁에 두고 오랫동안 가르치신 열두 제자들도 아니고, 따르는 이들 가운데 당시 알려진 모든 민족과 나라의 수에 해당하는 일흔두 사람을 골라 앞에 세워놓으셨을 때,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이 어설프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분께서도 그들을 파견하실 때 “마치 어린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루가 10,3) 심정이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게 파견된 당사자들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의 제자인 루가는 그것을 이렇게 증언한다.
“일흔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 와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 하고 아뢰었다”(루가 10,17).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요한 2,25)께서는 그 모든 결과를 이미 훤히 내다보고 계셨기 때문에 말씀하셨다.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 세상에서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다”(루가 10,18-19). 하지만, 여기서 제자들은 참 기쁨의 근거에 관해서 더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는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가 10,20).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것, 그들을 하늘의 시민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최종 목표이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필립 3,14). “우리는 하늘의 시민”(필립 3,20)이기 때문이다.
이 넘치는 기쁨, 인간이 제 힘으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이 희열을 제자들이 맛보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루가 10,21) 외치신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루가 10,21).
6. 이제까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세상, 하늘과 땅은 마귀, 악령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 악령의 손에서 사람들을 빼내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본 모습을 회복시켜주고 자유를 되돌려주기 위해서 메시아-그리스도께서 오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악령과의 한판 승부였고, 제자들은 똑같은 전쟁에 가담하여 그분이 이겨놓은 승리(요한 16,33 참조)에 참여할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당신의 영을 받아 그 힘으로 악마를 제압하고 돌아온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양식을 삼았던(요한 4,34 참조) 그리스도께 이보다 더 반갑고 기쁜 일은 없다.
그래서 말씀하신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이 아시고 또 아버지가 누구신지는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루가 10,21-22). 참된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그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것이 “영원한 생명”(요한 17,3)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그것은 삶의 궁극적 지향점, 목적지, 이루어내야 할 목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사실 많은 예언자들과 제왕들도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루가 10,23-24).
「?복음의 기쁨」?은, 앞서 본 복음주의파 존 피 교수의 말처럼,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 곧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인류와 교회 역사의 새로운 단계를 맞아 여러 마을과 고장, 세상 끝까지 떠나보내는 대파견사大派遣辭다.
7. 이 문헌은 모두 5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제1장에서는 교회가 복음의 기쁨을 다시 찾아내어 그것을 깊이 체험하고, 거기에서 얻은 확신과 열정을 가지고 밖으로 뛰쳐나가 사람들에게 선포할 것을 주문한다. 복음은 인간을 묶어 놓는 온갖 사슬에서 풀어내어 참된 자유와 행복을 주고, 안팎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글자 그대로 기쁨을 주는 소식임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 안에만 갇혀 있거나 온갖 자질구레한 업무에 발이 묶여 있으면, 교회는 자기모순에 빠져 차츰 속병이 들게 된다는 것이다. “저는 자신 안에 갇혀 자기 안보에만 집착하다가 내면의 건강을 잃어버린 교회보다, 밖에 나가 활동하다가 피부가 긁히고, 여기저기 살이 터지고, 옷은 남루하게 더렵혀진 교회를 천 배나 더 좋아합니다”(49항).
제2장에서는 복음선포의 역군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들어갈 때 맞부딪치게 될 여러 가지 어려움과 유혹들을 열거한다. 여기서 교황은 무엇보다도 세속주의, 특히 “영적 세속주의”(93항-98항, 207항)와 궁극적 가치를 세상의 가치와 적당히 타협시키려드는 상대주의를 경계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눈을 크게 뜨고 깨어있지 않으면, 사목자가 미지근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렇게 되면 얼빠진 사람처럼 되고, 현실을 망각하며, 조급증에 걸리고 맙니다. 그럴 경우, 관심은 엉뚱한 데로 기울어져 출세, 돈의 유혹, 세속정신과의 타협 쪽으로 쏠립니다. 그렇게 되면 사목자는 게으름에 빠져 교회 안에서 그저 하나의 공무원으로 전락하고, 하느님 백성의 참된 선익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자신, 조직, 구조에만 관심이 매몰되기에 이릅니다.”2)
제3장에서는 모든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 복음선포자-선교사임을 강조하고, 이 복음선포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에 관해서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필자를 비롯하여 제12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참석 주교들 가운데 몇이 제안했던 강론지침서 작성 요구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만한 내용이 여기에 나온다. 역대 교황의 문건 가운데 강론에 관해 가장 구체적이고 상세한 가르침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내용이다. 전례 중에 사제가 하는 강론뿐 아니라 복음선포 사명을 띠고 있는 모든 신앙인들이 그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참고할 내용들이 이 3장을 이루고 있다.
제4장에서는 복음과 인간의 전인적 발전을 연결시키면서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을 다룬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장 서두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저는 이제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에 관한 저의 관심을 여러분에게 밝히고 싶습니다. <이 차원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면, 복음화 사명의 진정하고 완전한 의미가 뒤틀리고 말 위험>이 늘 있기 때문입니다”(176항). 복음의 사회적 차원이야말로 이제까지의 모든 성찰이 가 닿는 목표였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사도적 권고가 사회 교리에 속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제5장에서는 복음화와 성령의 힘, 곧 복음화의 영성 혹은 “성령의 힘으로 수행하는 복음화”를 다룬다. 이 모든 요인들이 앞서 간단히 살펴 본 루가복음 10장의 일흔두 제자 파견 이야기에 함축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이 모든 복음화 과정 전체를 이끌어가며 거기에 필요한 빛과 힘을 제공하는 이는 성령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화가 사람들이 세상에서 보통 사용하는 그 어떤 수단이나 방법에 비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힘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은 “위에서 오는 능력”(루가 24,49) 곧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일인 것이다.
이제부터는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비추어 특별한 의미가 있는 대목을 중심으로 「?복음의 기쁨」?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세상의 병을 치료하는 약
8. 황사영은 복음을 구세지양약救世之良藥, 곧 세상의 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 특히 물질적 발전을 이루었다는 지역의 사람들이 걸린 중병은 우울증, 내적 공허, 외로움 등의 속병이다. 복음의 기쁨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며 그에 대한 처방을 제시한다.
제1항 :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참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기쁨에 차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미시는 구원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죄, 슬픔, 내적 공허, 외로움에서 벗어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기쁨은 끊임없이 새롭게 솟아납니다. 이 권고서에서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기쁨으로 참모습이 드러나는 복음화의 새로운 장에 몸을 싣도록 촉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저는 교회가 걸어갈 여정에서 계속 새로운 길을 가리켜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로 시작되는 이 문헌에서 ‘기쁨’이라는 단어는 109번이나 반복되어 나오면서 이 권고서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다른 기회에 하신 강론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주님을 만나서 제 길을 잘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시금석이 바로 기쁨이라고 하셨다. 여기서도 복음화의 진면목 혹은 특성은 기쁨으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런 뜻에서 이 문헌 전체는 그리스도를 만나서 비로소 얻게 된 진정한 기쁨을 체험한 이들을 세상에 보내어 참 행복의 길을 전하게 하기 위한 당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거나, 적어도 자신을 만나러 오시는 그분을 온 마음으로 모셔드릴 자세”(3항 참조)가 되어있지 않는 사람은, 이 글 읽기를 중단하고, 먼저 그 보물을 찾아 나서야 한다. 무엇보다 앞서 감실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성서를 깊이 묵상하며, 성령 속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께서 주시는 기쁨을 찾아낸 다음에, 돌아와 이 글을 계속 읽으며 묵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글이 마음에 부담만 주고,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삶에 무거운 짐을 또 하나 더 얹어놓는 형국이 될지도 모른다. 참 기쁨을 찾아낸 사람은 주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바로 깨닫게 될 것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 한 걸음을 떼면, 그분께서 먼저 거기에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3항).
9. 인간의 마음 : 천사와 악마 사이의 전쟁터
이렇게 해서 그분을 만나고 나면, 우리는 지금까지 몸담고 살아온 세상의 실상과 그 뿌리인 인간의 마음을 제대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는 천사도 있고 악마도 있다. 신의 흔적도 있고 동물의 자취도 있다. 그리고 이 양 극단 사이 어디쯤에 자리 잡은 수많은 것들이 우글거린다. 지금까지 인류가 남겨 놓은 기록물들, 종교 경전들, 그리고 근대에 발전한 심층심리학 계통의 서적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마음, 그 내면에서 펼쳐지는 신비스런 전쟁에 관해서 말한다. 로마서 7장과 8장은 그런 인간의 처지를 대단히 사실적으로 그린다. 7장에서는 머리로 하는 ‘생각’은 동쪽으로 이끄는데, 발이 데리고 다니는 ‘몸’은 서쪽으로 이끄는 가운데, 그 중간에 있는 ‘마음’이 이 둘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의 현장으로 묘사된다. 7장 마지막 부분에서 바오로는 모든 인간을 대변하며 절규한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로마 7,24) 우리나라에서도 노래로 불려 큰 호응을 얻었던 하덕규의 ‘가시나무 새’는 그런 인간의 처지를 잘 나타낸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이래서 인생은 투쟁이며, 우리 마음은 전쟁터다. 참 ‘나’와 허상의 ‘나들’ 사이의 이 싸움보다 더 치열한 전쟁은 없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온갖 갈등, 싸움, 전쟁은 마음속 전쟁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일 뿐이다. 내 마음은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와 같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자신의 힘만으로 이 전쟁을 이겨낸 사람은 없다. 예수를 따라다니던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스승이 죽음의 길에서 마지막 한 걸음을 앞에 두고 있을 때까지, 그들은 출세와 높은 자리 먼저 차지할 생각에 머리와 마음이 꽉 차 있었다(마르 10,32-45 참조).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는” 사람은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한다”(마태 13,14-15 참조). 그런 사람을 두고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열두 제자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유다였다. 그런데 베드로도 유다와 똑같이 주님을 배반했지만, 그 뒤의 태도가 달랐다.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주님께 달려가 용서를 받았지만, 유다는 적진으로 달려갔다가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러나 나머지 열한 제자는 어느 날 전혀 딴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을 몰아내고 이겨낸 것이다. 참 자유인, 참으로 행복하고, 기쁨에 찬 인간이 출현했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기뻐하고 감사한 인간”, “모든 일이 영광이고 은총이고 기쁨이고 감사인 사람”이 인류 역사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들에게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들”은 이제 과거로 사라졌다. 자기 속에 “수효가 많아” 스스로 “군대”(마르 5,9 참조)라고 하던 사람이 “옷을 바로 입고 멀쩡한 정신”(마르 5,15)이 되었던 것처럼, 그들에게 이제 내 속엔 ‘나’만 있는 날이 시작된 것이다.
무슨 힘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가시나무 관을 쓰고 나무 위에서 죽어간 한 사나이가 내려 준 힘이었다. 그 사나이는 십자가 나무에 오르기 전날 밤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했었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가 24,49).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그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다시 한 번 말했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며칠 후 그들은 실제로 그 힘을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나 우리와 똑같이 비겁하고 나약하여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던” 그들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당대의 권력자들 눈에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사람”으로만 보였던 갈릴래아의 촌 사람들이 의회에서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세력가들이 “깜짝 놀랐다”(사도 4,13). 그 투박하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은 또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다”(사도 5,41).
예수님 생전에 그분을 만난 적이 없고, 따라서 열두 사도에는 들지도 않았으면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을 받아 이교백성들을 위한 대사도가 되었던 바오로는 로마서 7장 끝 부분에서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로마 7,24) 하고 물은 다음, 바로 이어서 스스로 이렇게 대답한다.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주십니다”(로마 7,25). 이어지는 8장은 이런 말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받는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로마 8,12). 8장의 나머지 부분은 이 찬란한 선언의 해설인데 끝에 가서는 이런 말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이렇게 엄청난 힘을 얻을 방법이 지금도 있는가? 바로 그 “위에서 오는 능력”을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말씀하신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루가 11,9-13).
피카소 그림 한 장을 10억 원에 사서 누가 보고 훔쳐 갈세라 장롱 속에 잘 감춰놓고, 가끔 한 번씩 꺼내 볼 때마다 과연 거장의 솜씨는 다르다며 감탄한 사람이 있었다. 10년 동안을 그렇게 보아도 그 그림은 여전히 신비스럽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고 느꼈다. 그런데 어느 날 미술품 중에 가짜가 하도 많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럴 리 없다며 머리를 흔들었지만, 결국에는 감정을 받아보기로 했다. 결과는 걱정하던 대로였다. 가짜로 판명된 것이다. 그 순간 그 그림에서 신비, 깊이, 아름다움이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것은 한낱 종이 위에 사기꾼의 붓이 지나간 자취에 불과했다. 그림 자체는 털끝만큼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것은 <마음>이었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묘하고 신비로워서, 몸이 천당에 있어도 마음은 지옥에서 살 수 있고, 몸이 지옥에 있어도 마음은 천당에서 살 수도 있다.
10. 내가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운”(히브 4,12) 하느님의 말씀으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에제 36,26)을 갈아 끼우는 대大 심장수술을 하고 나서 그 새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어떤가? 오늘날 세상, 주변 세계는 소비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결에 휩싸인 채 ‘쾌락’만 알고 ‘기쁨’을 상실하여, 아무도 행복하지 못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복음의 기쁨」? 은 물질주의, 쾌락주의, 자유방임주의의 병폐를 지적한다. 이런 세상의 모습을 정확히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회상하게 된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또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날씨가 몹시 덥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가 12,54-5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교황님은 신앙인들이 “시대의 징표”(51항, 108항)를 정확히 읽을 것을 당부하신다.
제4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지금 세상의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 이웃과 사회에 관심을 돌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향해 과감하게 뛰어듦으로써, 개인과 공동체가 우리 시대의 고질적인 병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흔히 종교는 성전 경내에 머물고 신앙인들은 거기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의 어떤 종교들은 그 정도의 역할로 만족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삼위일체로서 각 위격이 서로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사랑 자체이시고, 인간은 그런 하느님을 본떠서 만들어진 존재이며, 삼위 가운데 한 분이신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천막을 치셨음”(요한 1,14)을 믿는 그리스도교는 전혀 다르다. 또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은 단순히 이 땅에 오신 것만이 아니라, “땅 끝”(사도 1,8)의 한 모습인 가난한 사람, 죄인, 버림받은 사람, 내쫓긴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사셨으며, 그런 이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셨음”(루가 15,2)을 믿고 따르는 교회는 다르고, 또 다를 수밖에 없다.
11. 도시
그런 의미에서 도시의 문제가 비상한 사목적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과연 현대생활의 휘황한 불빛에 이끌려 사람들이 대규모로 몰려듦에 따라 도시화 현상이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복음의 기쁨」?은 “도시 문화의 도전들”(71항-75항)을 특별히 다룬다. 그리고 구원의 역사에 따르면, 인류 전체가 걸어가고 있는 도정의 최후 목적지가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묵시 21,2-4 참조)임을 상기시킨다. 예수께서 인류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루카 9,51) 거기에 도착하시기까지(루가 19,28 참조) 긴 여정을 설정하고 있는 루가복음은 그런 점에서 볼 때 새삼스런 의미를 띤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이상적 수행의 장소, 절대자를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깊은 산속이나 사막을 그리워하며 실제로 거기로 갈 것을 종용하는데 비해 그리스도교는 정 반대 쪽을 향한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도시polis라 하고 거기에서 사람들이 서로 돕고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게 하는 기술을 정치학politics이라고 한다. 도시에는 인간생활의 빛과 그림자,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시대마다의 문제들이 한데 모여 있다.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도시에 “천막을 치셨고”, 도시에서도 변두리, 땅 끝이라 할 곳, 사람들의 버림을 받고 쓰레기 취급을 당하며 살던 사람들을 찾아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 새 삶을 전해 주셨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루카 4,18)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땅 끝은 저 바깥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음을 암시하신다.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도 늘 다니던 길을 한 발짝만 벗어나 골목길로 들어서면 거기서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던 땅 끝을 발견한다. 우리가 늘 대하던 사람을 떠나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고 살던 사람들에게 다가가 깊은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리는 짐작하던 세계와 전혀 다른 세상을 또 발견한다.
71항 : 새 예루살렘, 거룩한 도시(묵시 21,2-4 참조)는 인류 전체가 걸어가고 있는 도정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계시가 인류와 역사의 최종 완성이 도시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도시를 관상하는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도시의 집, 거리, 광장에 계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각 사람과 단체가 그들의 삶에서 의미와 힘을 얻으려고 성실히 노력할 때 하느님은 그들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고 나면 ‘복음선포의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울림’이라는 제목이 붙은 고찰이 선명한 의미를 띤다.
신앙과 사회적 관심
12. 더불어 사는 이들
178항 : 여기에서도 맨 먼저 고려할 점은 “신앙고백과 사회에 대한 헌신”이다. 모든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그들에게 무한한 존엄성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 인간 육체를 취하셨음을 믿는다는 것은 인격체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마음속 깊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믿으면,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를 더 할 수 없이 귀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의심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사회적 차원을 지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각 인격체를 개인적으로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으신다.” 하는 「?간추린 사회교리」? 52항을 그대로 인용한 다음, 복음의 사회적 차원에 관해 계속 주장하신다. “성령이 모든 사람 안에서 활동하심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모든 인간적 상황과 사회적 유대 속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가려고 기를 쓰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마음 특유의 무한한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사가 아무리 복잡하게 얽히고 실마리를 풀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어도, 어떻게든 매듭을 풀 방법을 찾아내시는 분이십니다.’ 복음화란 성령의 이런 해방노력에 우리가 힘을 보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삼위일체 신비 자체가 성삼 상호간의 친교를 본떠서 만들어진 우리의 본 모습을 깨닫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아를 실현하거나 구원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복음의 핵심에서부터 우리는 복음화와 인간 발전이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화의 모든 노력에서 이 둘 사이의 연결선을 찾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우리는, 그에 대한 우선적이고 근본적인 응답으로, 다른 사람들의 선익을 갈망하고 찾고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13.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179항 : 성서를 보면 이 사실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바로 그 명백성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거의 기계적 혹은 습관적으로 대하고는 지나쳐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매일 삶이나 공동체 생활에서 실제적인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말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형제애와 정의에 관한 복음을 대하고도 그 앞에서 놀라움이나 흥분 혹은 열정을 느끼지 못하고 맙니다. 우리에게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엄청난 손해를 끼치는 일입니까! 하느님 말씀은 우리 형제자매들이 하느님 아들의 육화 신비를 연장하고 확대한 이들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는가는 곧바로 초월적 차원과 연결됩니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가 6,38).
183항 : 이처럼 복음의 사회적 차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종교를 개인의 사생활 영역이라는 내적 지성소에 한정시켜놓고, 그것이 사회생활이나 국민생활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거나, 시민적 제도나 사회 문제에 관해 의견을 표명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주장은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나 마더 데레사의 메시지를 교회 안에 유폐시켜놓고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란 말입니까? 진정한 신앙이라면 누구에게도 결코 느긋한 편안함을 줄 수 없고 완전히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물 수도 없습니다. 신앙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깊은 열망을 수반합니다. 우리가 받은 훌륭한 가치들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고, 우리가 물려받은 지구를 좀 더 나은 땅으로 만들어 후세에 전해주겠다는 의지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점지해 주신 지구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또 비극과 투쟁, 희망과 갈망,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함께 여기 살고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