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45호>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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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7-01 00:00 조회3,91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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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힌 배
476명이라던 승선인 숫자마저 오락가락인 채, 배 밑을 위로 드러내고 있는 세월호는 이제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세상 사람들의 머리에 지울 수 없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리고 이 사태의 직·간접적 원인들이 밝혀지면서, 이것은 단순히 세월호가 아니라, 2014년 4월 16일 현재 대한민국호의 현실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뒤집혀 물에 잠기고 있는 배에서 맨 먼저 빠져나오는 선장과 선박직 승무원들의 모습은 지금 대한민국호를 운전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물었다. 인간 사회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을까? 어떤 분의 표현대로, 우리가 어쩌다가 짐승만도 못하게 되어버렸나?
신자유주의
많은 이들은 이런 사태의 궁극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지목한다. 유명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신자유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1970년대에 등장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근간 논리는 경제 및 사회 모든 영역에서 시장원리의 도입, 교육·의료·복지 등 사회 공공서비스 재정의 감축, 자유시장 질서를 가로막는 모든 규제의 철폐, 공공부문의 민영화, 공공재 또는 공동체 이념의 배제, 감세를 통한 기업경쟁력 제고, 산업의 구조조정, 권력의 지방이양, 자본의 자유로운 이윤추구를 보장하는 세계화 등이다.”
한 마디로, 돈을 주면 무엇이든지 살 수 있는 시장을 가치서열의 최상에 두어 사회와 나라 전체를 장사하는 집으로 바꾸고, 거기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두 없애자는 것이 신자유주의인 셈이다. 그것이 세계화라는 물결을 타고 온 세상을 휩쓸고 다니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을 비인간적 상황 속으로 몰아넣고 그 인간성을 파괴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인간상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그 정책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영국의 대처 수상이 극명하게 증언한다. “사회 공동체라는 것은 없다. 오직 남자, 여자라는 개인, 그리고 가족 단위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이렇게 해서 ‘돈 버는 일과는 상관없는 공동체적 유대 및 결속이 점점 느슨해져갔고 그에 따라 윤리 도덕도 허물어져,’ 마지막에는 ‘돈 버는 관계’만 남게 되었다.”
이번 사태에서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된 모든 이들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대표적 인물들이다. 큰 사태가 벌어졌을 때, 승무원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제일 먼저 거기에서 도망친 선장, 자신의 구명대까지 승객들에게 건네주며 끝까지 그들의 구조를 위해 남아 있다가 순직한 박지영씨, 이 둘 중 하나의 줄에 서게 된다.
이제 우리는 세월호 바깥의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본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학교 바로 옆에까지 호텔 건축을 허용하는 풍조, 규제를 암 덩어리라며 철폐하는 바람, 사회·복지 분야의 대폭적 예산 삭감, 철도·공항 등 공공부문의 민영화, 의료 민영화, 감세정책, 산업 구조조정, 권력의 지방이양이라는 이름의 지역 간 경제 불균형 가속화, 국제 투기 자본까지 들어와 금융질서를 망쳐 놓고 도망가도 손을 쓸 수 없게 만드는 세계화 등의 파도가 거세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85%의 국민이 세월호와 같은 사건이 또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래서 이상하지도 않다. 이제 와서 새로운 기구를 만들고 사고가 났을 때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체제를 갖춘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국민들의 불안한 예측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불과 두 주 후인 2014년 5월 2일에는 지하철 추돌 사건이 일어나 17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번에도 내구연한이 1990년대 초 15년이던 것을 20년으로 늘리고, 그 후 다시 25년으로 연장하여 무리하게 사용한 것이 사고의 궁극 원인으로 지목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신자유주의의 물결 자체를 없애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의 눈, 생각, 가치관이 뒤집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흔히 하는 말대로 “죽었다가 깨어나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은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면 포기하고 말 것인가? 아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길은 있다. 인간은 실제로 죽었다가 깨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그래서 위대하다.
스마트폰의 발명가로 알려진 스티브 잡스는 철든 이후, 하루도 죽음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나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는 것이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고 계획했던 일을 그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일을 할 것인가?” 이렇게 매 순간 자기 삶의 방향타를 조정하고 하루하루를 최대의 열정으로 불살랐기 때문에, 그는 한 인간으로서도 보통 사람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위업을 달성했다. 그 발명가가 말했다. “창조자가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죽음이다.”
죽음을 생각하며 삶의 방향을 조정하자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미리 내다보며 삶의 방향을 조정해 가는 사람만 삶의 항해에 성공한다. 죽고 난 다음에는 아무리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었다.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이야기가(루가 16,19-31) 그것을 잘 말해준다.
죽음을 사이에 두고, 부자와 거지의 처지는 세부에 이르기까지 정반대로 바뀐다. 사후세계에서 부자가 발견한 자신과 거지 사이의 “큰 구렁텅이”는 생전에 그 자신이 파놓은 것이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는 한 번도 거지에게 가까이 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 주십시오.” 하는 애원도, 생전에 자신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하던”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자기 소행의 복사판이다. 정상적이라면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혀를 축이는 일은 없다.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는 일도 없다. 그런데 그 부자는 생전에 거지 라자로를 그렇게 대했다. 거지는 부자에게서 ‘낙수효과’(복음의 기쁨, 54항)마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주인공들의 처지를 정반대로 만드는 계기가 “죽음”이지만, 그것은 호흡이 멈춘 다음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의 삶 속에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인간만이 그것을 의식하고 거기에 어울리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처럼, 앞에 있는 죽음 때문에 삶을 최대한 성실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반대도 가능하다. 누가 물질적 환경은 모자람이 없는데, 마음이 삭막하고, 우울하며, 외롭고, 공허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면, 그는 죽음의 “검은 구름과 암흑”(히브 12,18)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삶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미래에 다가올 죽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다가오는 시간을 잘 대비한다는 것은 지나간 과거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재를 참으로 잘 사는 사람은 과거를 불러와 현재를 풍요롭게 하는 ‘기억’으로 만들고, 미래를 불러와 ‘희망’으로 바꾼다. 기억을 상실한 사람에게는 희망도 없다. 기억과 희망은 크기가 정비례한다. 그리고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이 능력 때문에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복음의 기쁨, 222-225항). 공간은 바로 앞의 순간만을 보여줄 뿐인데 비해, 시간은 과거와 미래를 불러와 현재에 살아있게 하기 때문이다. 벌어진 일을 공간 안에서 보며 즉각적으로 말할 수 없는 절망과 고통을 느꼈던 일이, 일정한 시간이 지난 다음 뒤돌아보았을 때 거기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찾아내고 희망과 기쁨의 원천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삶에서 흔히 겪는 일이다.
국민의 물질생활을 보장해 주어야 할 정치는 “그것이 공동선을 추구하는 한, 드높은 성소이며 사랑의 가장 고귀한 형태 가운데 하나이다”(복음의 기쁨, 205항). 반대로, “자기의 재화를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계수단을 빼앗는 것이다.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복음의 기쁨, 58항). 금구 성인의 이 말씀처럼, 정치는 세상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데에 그 사명이 있다.
그럴 때 교회는 정치의 소명을 받은 이들과 오늘날의 세상이 제기하는 도전에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하여,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에 나타난 대로, 인간생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경쟁의 논리와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 놓인 힘없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배척의 경제’에 대해 “아니다!”(복음의 기쁨, 53-54항) 하고 외칠 것이다. 또 금송아지에 대한 우상숭배가 돈에 대한 물신주의의 모습을 하고 새롭게 등장하여, 한계를 모르고 날뛰는 권력욕과 소유욕에 대해 “아니다!”(복음의 기쁨, 55-56항) 하고 외칠 것이다. 마찬가지로, 봉사하는 대신 지배하는 금융제도(57-58항), 폭력을 낳는 불평등(59-60항)에 대해서도 “아니다!” 하고 외칠 것이다.
우리 안의 우상을
신앙인들과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 앞에 놓인 도전은 결코 만만치 않다. 세계화의 시대에, 신자유주의에 휘말려 들어가는 상황에서 탈출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금 인류가 빠져 있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오늘날 인류는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진보현상에서 목격하듯이, 역사에서 큰 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 대다수가 비참한 환경 속에서 그날그날 겨우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흔히 삶의 기쁨이 시들어가고,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풍조가 사라져가며, 폭력과 불평등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나이 많은 노숙자가 추위에 노출되어 죽어 가는 것은 뉴스거리도 안 되고, 증권시장에서 주가가 조금만 내려가도 뉴스가 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인간 인격이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냈습니다. 고대의 금송아지 숭배가 돈의 숭배라는 새롭고 무자비한 모습을 하고 다시 나타났습니다”(복음의 기쁨, 52-56항 참조).
대한민국호를 가라앉힐 수도 있는 핵발전소
이런 추세는 현대생활의 모든 분야에까지 뻗쳐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핵발전소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동 중인 핵발전소 가운데 고리 1호기는 2007년에 수명이 다했는데, 가동 시한을 10년 연장하여 계속 사용 중이다. 그리고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던 지난 4월 16일, 노후한 고리 원전의 재가동을 승인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두 끼만 먹더라도 안전한 나라에 살고 싶다.”는 외침은 지금 많은 사람들의 심정을 잘 대변한다. 물질이란 인간으로서 품위를 유지하고 살기 위한 정도까지는 필수이지만, 그 이상은 탐욕이 되어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오히려 해치고 그 노예가 되게 한다. 가난한 사람은 몸이 굶어서 죽고, 부자는 마음이 굶어서 죽는다.
‘1대 99’는 아무도 행복할 수 없는 세상의 이름이다. 자살률은 그 구체적 표현이다. 한때 자살률 세계 1위는 일본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 서서히 중국으로 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살이라는 검은 망령은 무엇을 따라다니는가?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는 우리 모두를 우울증, 공허감, 외로움으로 몰고 가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기억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런 방향으로 우리를 끌고가는 상황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최근 미국에서 있었던 가톨릭-유다교 사이의 대화를 위한 모임을 떠올리게 된다. 이 모임의 계획 중에는 워싱턴에 있는 국립 홀로코스트 기념관 방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곳은 유대인 6백만을 학살한 히틀러의 나치 만행(보통 ‘홀로코스트’라고 불리는)과 같은 일이 다시는 인류 역사에 일어나지 않도록,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록·보존하고 교육하기 위해 세운 기념관이다. 그곳은 1993년 개관 이래 지금까지 약 3천만 명이 방문했고, 그 가운데 9백만 명이 학생과 국가 원수들이었다고 한다.
유다-그리스도교가 인류에게 끼친 가장 큰 공헌의 하나가 역사의식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기념관의 당시 책임자였던 미카엘 베렌바움이 소장품들을 소개하는 책자의 서문에서 쓴 말이 새삼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 홀로코스트의 어두운 시절, 유대인들은 절망과 맞서 싸웠다. 바르샤와 게토의 회당 벽에 이런 문구가 낙서처럼 휘갈겨 있었다. ‘유대인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독일 쾰른에 있는 한 회당에는 이런 문구가 걸려 있었다. ‘나는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에도 그것을 믿는다. 나는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에도 그것을 믿는다. 나는 하느님이 아무 말 없을 때에도 그분을 믿는다.’ 위대한 유대인 역사가 시몬 두브노프가 1940년에 리가의 게토에서 죽었을 때,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써라. 기록해라.’ 그는 끝까지 역사의 힘, 기억의 승리를 믿었던 것이다.”
기념관
국가 개조를 말할 만큼 나라의 운영 체계를 전면적으로 다시 짜야 한다는 생각이 절대 다수의 국민들 사이에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 지금, 제일 중요한 일은 이 사건만큼은 ‘세월호’와 함께 ‘세월’의 물밑으로 가라앉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일이다.
그러려면 기념관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기념관은 우리가 그동안 너무나 자주 보아온 것들과는 전혀 달라야 한다. 우리가 경험한 기념관은 흔히 박제된 과거를 보여줄 뿐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념관은 그 재원부터가 국민과 뜻있는 이들의 성금으로 충당되고 역시 그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 미국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처럼, 과거의 역사를 언제까지나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희생된 이들의 사진, 글, 편지, 낙서, 신발, 옷, 일상용품, 한 때 행복했던 시절의 환한 얼굴, 공포에 질린 표정, 그리고 이번의 사태를 당하여 각계각층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좋은 의견들이 언제까지나 우리 앞에 생생하게 살아서 빛을 비추어 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두가 우리를 향해 “지금 있는 자리에서 빨리 뛰쳐나가라!” 하고 계속 외칠 것이다.
뒤집어진 배를 다시 뒤집어야
그렇게 해서 우리는 뒤집어진 배를 다시 뒤집는 일에 힘을 모으게 될 것이다. 거꾸로 선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이 일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조금씩, 그러나 착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절망에 빠졌다가 뜻밖에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발견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여인들은 사랑하는 스승의 장례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안식일 다음날 아직 동이 채 트기도 전에 준비해 두었던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런데 이때부터 뜻밖의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먼저,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굴러나 있었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 보니 무덤은 비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한동안 마음속에서 물음들이 소용돌이쳤다.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눈부시게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여자들은 질겁해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는데, 말이 저쪽에서 들려왔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루가 24,5-6).
그 순간부터 그들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애벌레가 번데기를 벗고 나비가 될 때처럼, 이제까지의 삶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꿈도 꿀 수 없었던 삶이 시작된다. 그 여인들뿐 아니라, 그들의 증언을 듣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도들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그분을 만난 모든 사람들의 삶도 그렇게 변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인류의 역사도 그렇다. 예수는 죽지 않았다. 그분은 부활하셨고, 지금 살아 계시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찾는” 시대를 벗어났다. 여러 가지 고통이라는 모습으로 자기 안에 깃들어 있는 죽음까지도 생명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으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렇게 살아가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길 잃은 양처럼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1베드 2,20-25).
혁명가인 그리스도인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삶이 뒤집어졌다. ‘혁명revolution’이란 바로 뒤집는다는 뜻이 아니던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가 뒤집어지니 그 삶도 그렇게 되었다. 진정한 혁명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수없이 많은 혁명이 있었지만 그것은 사회·정치·경제적 구조에만 일어나는 뒤집기에 불과했다. 그 어떤 것도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참된 혁명은 오직 예수께서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이루어내셨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씀하신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이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은총, 성령의 힘으로 혁명을 이루어내는 사람들이다.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리라”(에제 36,26). 살기를 띠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던 바오로에게 일어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바꾸어주시자, 그는 뼛속까지 달라져 그리스도의 박해자에서 물불 가리지 않고 그분을 선포하는 사도로 바뀌었다. 베드로, 토마, 막달라 여자 마리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던 로마 군인, 우도 등, 그분을 깊이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같은 변화를 체험했다.
우리는 모두 허물과 약점이 많고 실수를 거듭하는 나약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께 마음을 열어드리기만 하면, 그분께서 용서 못하실 죄는 없다. 그분께서 바꾸지 못할 상황도 없다”(프란치스코 교황, 2013. 3. 30. 부활성야 미사 강론).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태 앞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며 현재를 완전히 불사를 수 있다. 지금 당장이 아무리 한밤중처럼 어둡게 보여도 이미 “희망으로 구원받았다”(로마 8,24). 그리고 유명한 비그리스도인(로제 가로디)의 표현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희망을 장물臟物처럼 자기 안에만 숨겨둘 권리가 없다. 그것을 이웃에게 내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