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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46호>부활한 이순이와 돌아온 유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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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ecil 작성일14-09-19 00:00 조회4,6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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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역사] 2014년 4월호에는 교회사가 하성래 선생의 <거제巨濟로 유배된 유항검의 딸 섬이暹伊(1793-1863)의 삶>이 소개되었다. 하성래 선생께 감사드리면서, 이 귀중한 문헌을 우리 모두 잊지 않고 언제까지나 기억할 수 있도록, 여기에 그 주요 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먼저, 유항검이 순교하시던 때, 그 가족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보자.

 


그 다음 하겸락河兼洛(1825-1904) 선생의 기록을 소개한다.
거제도호부사를 역임한 하겸락 선생의 ≪사헌유집≫ 권3, 잡저雜著, 서유록西遊錄 <부거제> 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돼 있다.

- 철종 임술(1862)년 2월에 외직으로 나가 거제부사巨濟府使에 제수되었다. 거제도는 남쪽 해변의 한 섬 고을이었다. 견내량見乃梁 나루 앞에는 무이루撫吏樓가 있다. 옛날에 우리 종선조從先朝 문효공 경재敬齋 선생이 누각에 올라 지은 제영題詠이 걸려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 돼 형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판각板刻하여 걸었다.
   거제부에는 71세 된 유 처녀柳 處女가 있었다. 정조는 사학邪學(=천주교)을 엄금하고, 범법자는 반드시 중벌에 처하고, 그 자녀는 관비로 보냈다. 조정의 유명한 벼슬아치 중에도 역시 죄를 범하여 불행을 당하는 자가 많았다. 유柳는 어느 집안인지는 모르나 역시 명족名族이라고 들었다. 아버지가 사학(천주교)을 범하여 딸이 관비에 속하게 된 것이다. 나이 7세(실제로는 9세: 필자)였다. 읍邑에 사는 노파가 수양딸로 삼아 기르며 바느질을 가르쳤다. 유는 평생 다른 사람과 더불어 말하거나 웃지 않고 발길이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날마다 바느질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관노官奴 무리가 감히 관비로 대하지 못했다. 나이 13, 14세 되어 시집보내고자 하는 자(중매쟁이)가 있었으나 유는 “나는 선비의 혈육으로 참혹하고 독한 화를 만나 지금 거제 관비가 되었다. 남편을 얻게 되면 반드시 관노로서 아들을 낳으면 종이 될 것이요, 딸을 낳으면 계집종婢이 될 것이니, 이 괴로움을 내 어찌 당하리오? 다시 시집가라고 내 귀를 더럽히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음으로써 갚으리라” 하였다. 수양모를 섬기며 그 뜻에 순종하였다. 어미 역시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사랑하며 보호하였다. 나이 16, 17세 됨에 그 어머니에게 “제 나이 점점 자라 강폭强暴한 남자의 손이 제 몸에 한 번 가해질까 두렵습니다. 몸을 더럽히면 그 욕됨이 크옵니다. 그러므로 바라건대 흙과 돌로 한 집을 굳게 지어 음식을 넣어 줄 수 있는 구멍과 대소변을 집 안에서 처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작은 창을 남향으로 내서 바느질하기에 편하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어머니가 그 말대로 하였다. 유는 이처럼 자신을 보호하며 나이 40여 세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와 예사 사람처럼 살았다. 그러나 몸을 보호하기 위해 한 자 길이의 칼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고을 안 사람들이 모두 그 정절을 알고 감히 더럽힐 마음을 갖지 못하고, 유 처녀라고 불렀다.
   1863년(계해, 철종 14) 7월, 내가 체임遞任하여 돌아가려 할 때 형리가 “유 처녀가 71세로 죽었습니다” 하고 보고하였다[국법에 역적죄를 범하여 노비가 된 사람이 죽으면 검시檢屍하여 순영巡營에 보고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에 와서 보고한 것이다]. 슬프다! 천지 만물이 음양陰陽의 짝이 있지 않음이 없거늘, 억울하도다! 유 처녀는 외로운 여인으로 짝을 만나지 못하고 그 몸을 정결히 하며 이 세상에서 71세를 살았도다. 그 곧고 깨끗한 정절, 원한 맺힌 기운이 구천에 사무친다. 만약 유 처녀가 남자가 되었더라면 입신출세立身出世하여 임금을 섬기는 충성스러움은 해와 달을 꿰뚫고 진실함은 쇠와 돌을 뚫을 것이다. 애석하도다! 여자의 몸이 되어 참화를 입은 집안에 태어남이여! 그 정과 그 절개, 차마 사라지는 것이 아까워 아전을 보내 그 장사할 기구에 무엇이 미비한가 물으니, “관棺을 만들 나무, 염殮할 포목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여 내가 장사치를 것을 마련하여 다시 아전으로 하여금 호상護喪이 되어 장사를 치르게 하고, 또 병교兵校와 함께 가서 묻을 자리를 물기가 없고 무너지지 않을 곳에 잡되, 암석이 있어 글자를 새길 수 있는 곳에 깊이 묻으라 하고, 특별히 “칠십일세유처녀지묘七十一歲柳處女之墓” 아홉 자를 묘 옆 바위에 묘표墓表로 새겼다. -

   그러면 여기 나오는 “71세 유 처녀”는 과연 누구일까? ≪사학징의≫에서 거제도로 유배된 사람을 찾아보면 윤지헌의 아들 종근鐘近, 황사영의 어머니 이윤혜李允惠, 유항검의 딸 섬이가 있다. 그 가운데 하겸락 선생의 기록을 충족시켜 주는 사람으로는 유항검의 딸 섬이뿐이다. 따라서 필자는 “71세 유 처녀”는 유항검의 딸 섬이라고 단정한다.

하겸락 선생은 또 <제거제유처자문祭巨濟柳處子文>을 지어 제사하였다.

       <거제 유 처자를 제사지낸 글>
영령이시여                惟靈유영
정결한 옥 같은 자태            貞玉之姿정옥지자
촌철 같은 마음                寸鐵之腸촌철지장
일찍이 국옥을 당하여            夙遭鞠?숙조국흉
이 지방에 노예로 와            ?于?邦예우자방
노부에 이름을 올리고            書名鹵簿서명노부
백찬이 되었기에                白粲爲伍백찬위오
결혼할 나이가 되어도              年及??연급쇄계
행동을 단속하며 깊이 고행했네        ?操?苦여조미고
저 봄 수풀을 보면            相波春林상파춘림
시절의 경물 기운이 얽히고 설켜        時物烟縕시물연(인)온
꿩꿩 꿩이 울고                角角鷄鳴각각계명
떼 지어 사슴이 달리며            俟俟鹿奔사사녹분   
각기 짝을 이루어                各爲匹?각위필우
새끼 낳아 기르니                ?育?生구육자생
나에게 형기 있고                我有形氣아유형기
음양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라        稟于陰陽품우음양
정원의 꽃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手攀園花수반원화
슬퍼하지 않은 적 없건만            非不永傷비불영상
새와 쥐가 한 보금자리에 살아        鳥鼠同穴조서동혈
사물의 병폐 만들고            爲物之疹위물지진
봉황과 올빼미가 무리지어            鳳與?群봉여치군
또 그 질서 어그러뜨리는 것보다        亦?基倫역려기륜
차라리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        無寧自潔무영자결
선조에게 의로운 뜻 바치는 게 낫지 않으랴    獻于先人헌우선인
나의 서릿발 같은 칼날 가니        視我霜刀여아상도
누가 감히 어긋난 마음으로 보랴        礪疇敢視여주감시
문을 에워싼 발광하던 자들        ??狂荒환궤광황
혀를 내두르며 숨죽였네            吐舌屛氣토설병기
어둑어둑한 작은 집에            闇闇圭竇암암규두
벌어진 틈새 하나로            ?然一隙아연일극
햇빛이 뚫고 들어와                      天一透光천일투광
내 마음 비추면                照我心曲조아심곡
바늘 잡고 밝음 향해            持針嚮明지침향명
밤낮 쉬지 않더니                晝夜不息주야불식
귀밑머리 반백이 되어서야            ?髮半華빈발반화
비로소 사람들과 어울렸네            始與人齒시여인치
두 눈썹에 쓸쓸함 맺히고             雙眉蕭颯쌍미소삽
백발이 온통 머리를 뒤덮더니         素?盈咫소계영지
옥녀의 이가 흔들리고            玉女齒搖옥녀치요
사선의 몸이 말라                謝仙形槁사선형고
고희의 나이에                及稀之年급희지년
초연히 세상을 떠났어라            ?然觀化소연관화   
뛰어나고 특별한 정절            孤貞特節고정특절
청사에 보기 드물기에            靑史?觀청사우관
접때 내가 고을에 부음하여        昔我?府석아이부
대략 기리고 가엾게 여겨            略加褒愍약가포민
상여 갖춰 정성스레 묻고            ??敦?비예(세,여)돈예
바위 다듬어 묘표 새겨             磨崖表鐫마애표전
온 고을 사람들 이목에 잘 보이게 하고    侈觀一方치관일방
무궁히 밝게 드러내 보였네            昭示無窮소시무궁
다만 지금 뒤이어                弟今繼?제금계종
추모하는 감회 더하여            增?曠想증자광상
제물을 갖추어 보내고            具送??구송전향
제문 바쳐 위로하거늘            ?文以慰삼문이위
곧은 혼령 어둡지 않으리니        貞魂不昧정혼불매
부디 위에서 굽어보소서            尙冀鑑右상기감우

하성래 선생의 분석
   제문을 언제 지었을까? 제문 가운데 “다만 지금 뒤이어 추모하는 감회 더하여 제물을 갖추어 보내고”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례를 치른 뒤 삼우제三虞祭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장례를 치른 뒤 곧 하겸락 선생이 체임하여 거제를 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겸락 선생의 향리가 진주(현재 산청군)이므로 1주기 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1주기 때 제문을 지어 보낸 것이라면 그 정성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부사가 유배 온 일개 노비의 생애를 자기 문집 속에 기록하고, 또 제문까지 지어 애도하였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만큼 유 처자의 삶이 고결하기 때문이었고 고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2014년 6월 10일, 총대리 유장훈 몬시뇰, 홍보국장 서석희 신부님, 치명자산 성지 담당 길성환 신부님, 호남교회사 연구소장 이영춘 신부님과 함께, 경남 거제에 있는 유섬이의 묘를 참배하였다. 마침 마산교구의 성지 담당이며 거제 옥포 본당 주임이신 허철수 신부님이 전문가적인 지식과 애정을 가지고 계셔서 큰 도움이 되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 묘를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허 신부님의 안내로 우리는 쉽게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묘는 참으로 초라했고, 그 앞이 비좁고 경사져 있어서 엎드려 예를 표하기에도 대단히 불편한 형편이었다.
   거제 부사로서의 임기를 마치고 떠나기 직전에 유섬이의 죽음에 관한 보고를 듣고 하겸락이 내린 지시가 충실하게 이행되지 않고 겨우 명색만을 갖춘 모양새라는 우리 중 누군가의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리는 정황이었다. 하겸락의 글에 나타난 지시는 분명히 이렇게 되어 있다. “아전으로 하여금 호상護喪이 되어 장사를 치르게 하고, 또 병교兵校와 함께 가서 묻을 자리를 물기가 없고 무너지지 않을 곳에 잡되, 암석이 있어 글자를 새길 수 있는 곳에 깊이 묻으라 하고, 특별히 ‘칠십일세유처녀지묘七十一歲柳處女之墓’ 아홉 자를 묘 옆 바위에 묘표墓表로 새겼다.”
   그러나 실제로 돌에 새겨진 글자는 아홉 자가 아닌 네 자로서 유처자묘柳處子墓일 뿐이었고, 그 글자가 새겨진 돌도 거기에 본래 있던 바위가 아니라 근처에서 주워온 듯 조그맣고 조잡한 돌일 뿐이었다. 그것을 보며, 하겸락 부사에게는 유섬이가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아전들에게는 일개 관노로밖에 보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거기 묻혀 있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기에는 충분한 글자를 새겨놓았다는 사실이 고맙고 다행스럽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네 개의 글자마저 돌에 새겨놓지 않았다면, 유섬이의 행방은 영원히 묻혀버릴 뻔했던 것이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섬이와 관련하여 아슬아슬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유섬이가 생을 마치던 바로 그때 그곳에 하겸락이라는 분이 현지 부사로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앙인이 아니면서도 유섬이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위에 소개한 글을 남길 만큼 그를 흠모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겸락의 정신세계와 가치관이 어떤 수준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달리 말하자면, 하겸락과 같은 인물이 거기 없었더라면 유섬이가 어떻게 살다 갔는지에 관해서 후세가 전혀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겸락의 증언은 밭에 묻힌 보화를 찾아내고, 수많은 가짜 가운데에서 참되고 값진 진주를 알아본 안목을 가졌던 그 자신에 관한 증언이기도 하다. 그래서 값진 진주와 그것을 알아 본 증인의 안목이 만나는 기적을 통해 유섬이는 우리의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진주로 남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겸락이 단 며칠만 일찍 거제를 떠났어도 유섬이는 그의 관심에서 차츰 사라졌을 것이고, 떠난 다음에 그 죽음의 소식을 들었어도 이미 자기의 관할이 아닌 지역에서 일어난 일에 관하여 묘비문을 새기게 하는 등의 구체적인 조치를 취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섬이를 둘러싸고 아슬아슬하게 이어온 이야기들은 여기에서도 끝나지 않는다.
   하겸락의 글이 150여 년이 지난 후, 가문의 문집을 정리·연구하던 후손 하성래 선생의 눈에 띈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또 그 후손의 눈에 띄었다 해도, 만일 하성래 선생이 한국 교회역사의 전문가가 아니었다면 그 글에 언급된 “유 처녀”를 유항검의 딸 유섬이로 알아보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유섬이에 관한 역사가 우리에게 밝혀지기까지 이어져 온 이야기의 고리 하나하나는 기적처럼 연결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유항검과 그 가족, 특히 동정부부로 알려진 유중철과 이순이를 비롯한 한국교회 역사 초기에 순교하신 분들이 시복되시는 2014년에 유섬이가 우리에게 돌아왔다는 것은 주님의 섭리를 느끼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섬이의 묘와 그 위치에 관해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분이 아직 생존하여 몇 차례의 실패 끝에 결국 찾아낸 것이 최근의 일이라는 점도 뜻 깊은 일이다.
   그 묘를 찾고 보니 바로 그 앞에 있는 집에 살고 계신 할머니가 젊었을 때 시어머님으로부터 배웠다는 노래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유섬이의 삶을 기리며 그 심정을 노래로 만든 것이었다. 섬이의 삶이 전설이 되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잊혀지지 않고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 노랫말은 이렇다.

    “서울이라 유柳 처녀가 거제 음재(음지에) 귀양 와서
    대구야 청청 일 년이야 봉에 구름아 둥실 높이 떴네
    나도 언제 평화로워져서 구름같이 떠나갈까!”

   여기에서 ‘서울’이라 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사람들이 귀양 갔던 거제도의 토착민들로서는, 외지에서 온 사람이 거의 모두 한때 명문거족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이 다 서울에서 온 것으로 보였고 실제로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곳 사람들은 유섬이도 서울에서 온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대구야 청청 일 년이야” 하는 말은 당시 우리나라 여러 지역의 민요에 흔히 등장하는 후렴구라고 한다. 높은 산이 첩첩 이어진 가운데, 제일 높은 봉우리 그 위로 자유롭게 떠다니는 구름을 보며, 고립된 섬에 묶인 듯이 움직일 수 없어 다만 고향을 그리워만 하는 마음을 “봉에 구름아 둥실 높이 떴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나도 언제 평화로워져서 구름같이 떠나갈까!”는 말은 설명이 필요 없이 귀양살이하는 사람의 마음을 잘 나타낸다.
  
   거제 사람들은 유섬이의 고결한 삶을 전해 들으면서 이런 노래를 불러 그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잊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150여 년 전에 다블뤼 주교(1818-1866: 한국 체류 1846-1866)로부터 “한국 순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진주”라는 칭송을 받고, 오늘에 와서는 비종교인인 한 지성인으로부터 “그 이전까지 한국 사회에 없던 새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순이가 복자로 선언됨으로써 우리의 의식 속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이순이에 이어, 이에 못지 않게 또 한 분의 감동적인 복음의 증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두 분은 서로를 보완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권고하는 [복음의 기쁨]을 지금 여기서 완벽하게 증언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교회의 전통적 표현을 빌자면, 피를 흘리고 죽음으로써 신앙을 증거하는 것을 ‘빨간 순교’라 하고, 그렇게 죽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듯이 보이는 삶에 따르는 온갖 어려움을 신앙 안에서 잘 견디어 내며, 믿음을 증거하는 것을 ‘하얀 순교’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순이는 빨간 순교자, 유섬이는 하얀 순교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참으로 믿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사람이 어떻게 변하고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빨간 순교든 하얀 순교든,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큰 감동을 준 이분들의 모습이, 인간이면 누구나 마음속 깊이에 간직하고 있는 무한에 대한 갈망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결국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씀하시는 복음의 기쁨을 증언하는 것이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납니다”(복음의 기쁨, 1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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