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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47호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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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12-03 00:00 조회3,8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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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함께 느끼는 사람,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 프란치스코,
그는 누구인가?(1)

 

사도 프란치스코
베드로 사도의 266대 후계자 프란치스코는 하나의 현상을 이루며 온 인류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여기에는 눈동자나 표정의 미세한 변화,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까지 정확히 포착하여 온 세상에 전할 수 있게 된 현대 통신 기술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한 예로, 지난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꽃동네 방문 중 한 장면을 지켜 본 한 기자의 소감을 들어보자.
   “생애를 통틀어 온몸이 무너질 것처럼 이보다 강렬하게 무엇인가에 짓눌린 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나뿐이 아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아’ 하며 탄식했다. 혹은 한숨 같기도 했다. 특히 ?사랑의 연수원’에서 대형 스크린을 통해 교황을 지켜보던 4000여 명의 수녀들은 일제히 얼어붙은 표정이었다. ?아이는 서너 살쯤 됐을까?’ 교황이 다가가서 눈을 맞추려는데도 흐릿한 눈빛으로 손가락을 빨며 딴 곳을 응시했다. 아마도 다음날 ?교황의 굴욕’으로 언론에 대서특필이라도 될 법한 장면이다. 헌데 교황이 한 손으로 손가락을 빠는 아이의 손목을 잡는 듯하더니 검지 손가락을 입속으로 쏙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그리곤 한동안 아이가 손가락을 빨도록 지켜봤다. (정말로) 모든 이들이 경악했다. 충북 음성 꽃동네 아이들은 두 번 버려진 아이들이다. 엄마에게 버려지고, 사회에서도 버려져 더 이상 갈 곳 없는 아이들이다. 그 아이도 엄마의 젖을 제대로 빨지 못했을 터다. 교황은 그렇게 아이에게 엄마의 젖꼭지 대신 자신의 손가락을 물려 주고는 한동안 은은한 미소를 날리며 그윽한 눈길로 아이를 바라봤다. 그제사 아이는 ?비바! 파파!’의 마음을 읽은 듯 교황과 눈을 마주쳤다. 이어 교황은 침 묻은 손가락을 닦지도 않은 채 한동안 아이 앞을 지켰다. 연출된 행동이라기에는 몸에 밴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러웠다.”[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2014.8.17.)]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이런 행동이 “연출된 것이라기에는 몸에 밴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되기까지의 역사, 이런 인간이 만들어진 과정에 눈길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회가 발행하는 정기간행물의 편집자 대표와 가진 이분의 대담(2013년 8월)은 프란치스코를 이해하는 데에 큰 빛을 준다. 하루 2시간씩 3일 동안 진행된 그 대담의 한 장면을 보자.

   - 구체적으로 나는 이냐시오 성인이 영성 훈련에서 언급한 “교회와 함께 느낀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다. 그분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하나의 이미지를 써가며 대답했다.
   “제가 교회의 이미지로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거룩하고 충실한 하느님 백성’입니다. 저는 이런 정의를 자주 사용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12항)에서 바로 이 이미지를 썼지요. 하나의 백성에 소속된다는 것은 대단히 강력한 신학적 가치를 지닙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하느님은 하나의 백성을 구하셨습니다. 한 백성에 소속되지 않으면, 자기를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구도 따로 떨어진 개인으로 혼자서 구원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는 복잡한 관계망을 바라보시며 우리를 당신께 끌어당기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관계의 그물망 속으로 들어와 거기 참여하십니다. 백성 자체가 하나의 주체를 이룹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기쁨과 슬픔을 맛보며 역사를 뚫고 걸어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함께 느낀다는 것은 제가 이 백성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제 나름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모든 신앙인들은 하나의 전체로서 믿음에 관한 일에 있어서 틀리지 않는다는 확실성 곧 무류성을 지닙니다. 백성들이 신앙을 실제로 살아냄으로써 무류성을 나타냅니다.
모든 백성이 함께 걸을 때 그 믿음의 초자연적 감각을 통해서 이 무류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냐시오 성인께서 말씀하신 ‘교회와 함께 느끼기’를 제가 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백성들, 주교들, 교황이 이 길을 함께 걸어 내려가면서 나누는 대화가 진정성을 띨 때, 성령께서 그들을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함께 느끼기는 신학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마리아께서 택하신 방법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면 신학자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분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알고 싶으면 백성들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마리아께서는 백성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성모찬가를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함께 느끼기’라는 말이 교회의(사제, 주교, 교황 등) 위계질서를 이루는 이들과만 함께하는 뜻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간 숨을 돌린 다음,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다음의 사실을 대단히 직설적으로 강조하셨다.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비추어 제가 여기서 말하는 모든 신자들의 무류성이 민중영합주의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냐시오 성인이 말씀하신 대로, ‘위계질서를 지닌 거룩한 어머니’의 경험입니다. 목자와 백성을 포함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쌓아온 경험인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 백성의 인내에서 거룩함을 봅니다. 아이들을 기르는 여자, 빵을 벌어오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남자, 병자, 그렇게 많은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도 주님을 섬긴다는 사실 때문에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는 노사제, 힘들게 일하면서 거룩함을 감추고 사는 수녀님들. 이것이 저에게는 보통의 일상적 거룩함입니다. 저는 자주 거룩함을 인내와 연결시킵니다. 삶에서 겪는 큰 어려움 속에서 의연하게 견디어내는 태도, 그날그날의 삶을 앞으로 끌어나가는 항구함도 여기에 속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이 말씀하신, 싸우는 교회의 거룩함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부모에게서 볼 수 있는 거룩함이었습니다. 저의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로사, 이분들이 저를 그렇게나 사랑해 주셨지요. 저는 지금도 로사 할머니께서 남겨주신 유언을 기도책에 꽂아두고 자주 읽곤 합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기도인 셈이지요. 그분은 참으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많이 겪으신 성녀이셨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용기를 가지고 앞으로 나가셨지요.”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이 교회가 우리 모두의 가정입니다. 몇몇 선택된 사람들만 수용할 수 있는 경당이 우리의 가정은 아닙니다. 우리는 보편교회의 넓은 가슴을 우리의 미지근함을 보호해 주는 작은 은신처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많이 두고 생산성이 풍부합니다. 그래야만 하지요. 아시지요? 교회의 직무 수행자들이나 남녀 봉헌자들에게서 좋지 않은 태도나 몸가짐을 보게 되면, 머리에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아하, 여기 생산성이 말라버린 노총각이 있구나’, ‘여기 또 그런 노처녀가 있구나.’ 그들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닙니다. 영적 생명을 북돋아 주고 새롭게 일어설 수 있게 해 주는 능력이 없는 것이지요. 그와는 대조적으로, 예를 들자면, 파타고니아 지역으로 파견된 살레시오 선교사들의 삶에 관해서 읽어보면, 생기 넘치고 생산성 풍부한 분들의 이야기를 알게 됩니다.”
   “제가 최근에 알게 된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신문에 크게 소개되기도 했지요. 저에게 편지를 쓴 젊은이에게 제가 건 전화 이야기입니다. 제가 전화를 건 것은 그 편지가 정말 아름답고 단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생산 활동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한창 자라나고 있었고, 내게서 아버지를 찾고 있었지요. 그의 편지를 보면 아버지에게 자신의 삶 한 면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로서 ‘그래서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하고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이런 식으로 생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저에게 아주 좋은 일입니다.”

사람이 된 새 복음화
한 신학자는 프란치스코 교황 자신이 “사람이 된 새 복음화”라고 말했다.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현대의 가장 드러난 문제아로 지목되었던 부류 가운데 동성애자에 관한 프란치스코의 말에서 이 사실을 확인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 오랫동안 교회 자신이 거기 잡혀 있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바로 그 문제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처럼 또 하나의 질문으로 대답했다. “하느님이 동성애자를 바라보실 때, 그 사람의 존재를 사랑 가득 찬 눈으로 인정하실까? 아니면, 그 사람을 내치고 단죄하실까? 한 번 대답해 보십시오.” 복음서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한 예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를 보면, 우리는 이런 대답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바로 알 수 있다.
   한 예로, 루가복음 7장(36-50)에 소개된 장면을 우리는 기억한다. 예수께서 어떤 바리사이파 사람의 초대를 받아 음식을 잡수실 때 벌어진 일이다. 행실 나쁘기로 소문난 여자가,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그 자리에 나타나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부어 드렸다. 예수를 초대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속으로 “저 사람이 정말 예언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며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는 것인데, 그의 이런 반응을 보고 예수께서 돈놀이꾼에게 각각 5백만 원과 5천만 원을 빚졌다가 모두 탕감받은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난 다음, 이 둘 중에 누가 그 돈놀이꾼을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시고, 그가 옳게 대답하자, 이런 결론을 내리셨다. “잘 들어 두어라. 이 여자가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인 것은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네 죄는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죄를 용서한다는 말씀에 사람들이 수군거리자 예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여자에게 덧붙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교회와 함께 느끼게 되기까지
우리는 여기서 프란치스코가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 훈련을 통해서 예수님처럼 느끼게 되었음을 확인한다. 바오로 사도의 당부가 그대로 오늘의 사도에게서 실현된 것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 2,5). 예수님의 마음은 곧 성령으로 충만하여 부드럽게 된 마음이다.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에제 36,26).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에제키엘의 이 예언이 완전히 이루어졌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분의 마음은 언제나 부드러웠고,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린 그분의 심장으로부터 흘러나온 피와 물은 그분의 그런 마음을 인간에게 건네주심을 상징한다. 죽음의 때에 이르러 “이제 다 이루었다”는 말씀과 함께, 숨을 “거두시는” 대신 숨, 곧 영을 “건네주셨다”(요한 19,30)고 한 요한 복음사가는 바로 그것을 증언한다. “거룩하고 충실한 하느님 백성”이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건네주신 성령을 받아 새로운 마음을 지니게 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교회와 함께 느낀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확실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느낀다’는 말을 살펴보자. ‘느낀다’는 말은 특히 서양에서 ‘생각한다’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생각하는 일이 ‘머리’ 혹은 두뇌의 활동이라면 느낀다는 일은 ‘마음’의 활동이다. 서양이 이성-두뇌-생각-이해-지식-이론에 치중한 문화를 이루었다면 동양은 전통적으로 정서-마음-느낌-직관-사랑-실천에 무게 중심을 둔 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편향성 때문에, 서양에서는 이냐시오의 영성에서 바탕을 이루다시피 하는 Sentire cum Ecclesia(센티레 쿰 에클레시아), 글자 그대로 옮기자면, “교회와 함께 ‘느낀다’”는 말이 되는데, 이상하게도 많은 경우에 이것을 “교회와 함께 ‘생각한다’”로 번역하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머리와 마음, 지성과 사랑, 나아가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힘이신 성령 사이의 차이와 그 사이의 보완관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블레즈 파스칼은 이 둘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마음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성들(그 특유의 작동원리 혹 이치들)을 가지고 있다.” 어린이는 온몸에 퍼져 있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귀, 눈, 입, 코, 피부)을 통해 엄마의 사랑, 체온, 목소리 등을 먼저 느낀다. 머리로 하는 생각은 성장하면서 차츰 나타난다. 생각을 하게 되고 철이 든 뒤에도 인간은 죽을 때까지  다섯 가지 감각으로 느끼는 일을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감각으로 얻은 정보를 동물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고 소화한다. 그 차이가 동물과 인간을 가른다고 할 수 있다. 그 처리 과정에 특유의 이성이 작동하는데, 다만 이때의 이성은 파스칼의 표현대로 논리의 고리를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꿰어 맞추는 식의 이성이 아니다. 이때의 이성이란 두뇌를 통해서 작용하는 그런 이성으로서는 전혀 모르는 종류, 직관적이고 통합적인 이성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 특유의 감각 기관은 성서가 말하는 ‘마음’, 심장이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성령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마음’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두뇌를 앞세운 보통 의미의 지식과는 전혀 다른 특유의 앎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성서는 자주 이 세상의 지혜와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를 대조시켜 말한다. 그 가장 대표적인 대목 가운데 하나가 아무 장비 없이 파견되었던 일흔두 제자가 악령들까지 굴복시키고 돌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루가 10,21) 외치신 말씀이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이 아시고 또 아버지가 누구신지는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루가 10,21-22).
   바오로 사도 역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외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성서에도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 버리고 똑똑하다 는 자들의 식견을 물리치리라’ 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1고린 1,17-21).
   사도들의 증언과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계속 확인되는 이 정신을 이어받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신다. “분명히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진실로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밖으로 나아가 그 사랑을 선포하는 데에 오랜 준비나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120항). 교황님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곧바로 동네로 돌아가 그분을 알리는 사도로 활동한 것, 사울이 주님을 만나 열렬한 사도로 바뀐 사실 등을 예로 들어 이 점을 강조하신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복음의 증인-선교사-사도로 세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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