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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49호>세월호 … 그 후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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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08 00:00 조회3,8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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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49호(2015.6)

세월호 … 그 후 1년*

 

“인간만이 죽는다. 짐승은 엄밀히 말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소멸할 뿐이다.”
어떤 철학자(하이데거)의 이 말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 걸맞게 살 줄 아는 지상 유일의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극히 인간적인 사태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상황마다 모두 다릅니다.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죽음을 두고는 심지어 ‘호상好喪’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복되게 잘 살다 복되게 삶을 잘 마쳤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경우 가족이나 친지들은 돌아가신 분을 장지에 잘 모시고 나면 바로 마음을 정리하고 일상생활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와는 정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죽음을 두고는 ‘원혼이 구천을 떠돈다’고 말합니다. 억울하게 혹은 인간들의 잘못으로 죽음을 당했을 때에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돌아가신 분의 입장에서뿐 아니라, 가족이나 친지들 편에서도 가지게 되는 심정을 나타냅니다.  
 
“세월호”
이 말은 우리나라 최근 역사에서 우리 모두에게 정리되지 못하고 원혼처럼 구천을 떠도는 주검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유가족이나 친지들뿐 아니라 온 국민이 자신의 일로 느끼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고 물결이 거세게 흘러도, 우리 마음의 시간은 2014년 4월 16일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 때에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에게 보여주신 따뜻한 눈길과 배려, 그리고 돌아가시는 비행기 안에서 하신 말씀은 우리나라 많은 국민과 세계인들의 기억에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고통 앞에서 중립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번 한국 주교단의 교황청 정기방문 때에도, 자리에 앉자마자 물으시는 첫 질문이 세월호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가 1년이 되었는데, 세월호를 둘러싼 일이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생생히 살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정리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특히 어린 자녀를 잃은 부모님들, 그분들의 눈물과 아픔에 동참하는 이들, 많은 국민들의 가슴이 여전히 답답하고 세월이 갈수록 오히려 의혹과 원한의 강도만 높아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동조 서명한 이들이 700만에 가깝다는데, 이 사고의 원인을 찾아낼 목적으로 제정된 ‘세월호 특별법’이, 정작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입법 예고된 ‘시행령 안’을 보면, 진상을 규명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덮어버리려는 의도가 너무나 분명해 보입니다.
   이렇게 세월호 관련 의혹은 세월이 가도 전혀 풀리지 않은 채, 오히려 국민을 더욱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유가족과 함께 울고, 어떤 이들은 그들을 향해 종북세력의 사주를 받는다는 등 온갖 극단적인 표현을 써가며 살아있는 사람에게마저 또 하나의 죽음을 안기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만 했으면 됐다. 이제는 좀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고, 또 돌아가야 합니다. 허구한 날 이 일에만 매달려 일상의 생활이 불가능한 사태는 빨리 끝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누가 그것을 막고 있습니까? 이 모든 의문들은 단 하나, 진상을 밝히고 원인을 규명해서 하루 속히 이 일을 마음에서 정리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요구로 모아집니다.
   우리가 마음속 깊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잘못, 정치세력의 비뚤어진 행태, 마피아라는 말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속속들이 파고 들어와 있는 비리가, 그 뿌리에서 청산되지 못하고, 계속 덮어져버리는 방식으로 처리된다면, 앞으로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반복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끈질기게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태의 원인이 밝혀지고 진실이 드러나서, 다시는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마련될 때에만, 세월호 희생자들의 죽음이, 좀 더 밝고 희망찬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쓰이는 값진 희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그분들과 유가족, 그리고 많은 국민들의 마음도 더 이상 구천을 떠돌지 않고 마침내 안식을 찾을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나 오늘 가톨릭교회 미사에서 듣게 되어 있는 복음은 말합니다.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요한 3,20-21). 그리고 제1 독서에서 들은 사도행전 5장에는 경비원들이 감옥에 가서 확인한 것을 당대의 권력자들에게 보고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감옥 문은 아주 단단히 잠겨 있었고, 문마다 간수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문을 열어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사도 5, 23).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와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던 사도들을 잡아다가 다시 의회에 세워놓고 대사제가 심문했다는 이야기가 그 다음에 이어집니다. 그 때 사도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사도 5,29)
   ‘사랑’, ‘길’, ‘진리’, ‘생명’, ‘정의’, ‘빛’, ‘절대’ 등은 모두 하느님의 다른 이름들입니다. 이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지금 특별히 진리를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진리 혹은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심지어 무덤에 묻어둘 수도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덮어버릴 수 없습니다. 무덤에 묻고 큰 돌을 굴려 막아놓았어도 사흘 만에 그 모든 것을 헤치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감추어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마르4, 22)입니다.

1년 전 세월호가 맹골수도에 표류하다 304명을 실은 채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바닷속으로 서서히 침몰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국민들이 대한민국의 총체적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한민국호의 선장되시는 분도 그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국가를 대개조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라를 완전히 해체했다가 다시 만들지 않으면 세월호처럼 침몰할 수 밖에 없겠다는 절박감의 표현입니다. 그분은 “세월호 이전의 대한민국과 이후 대한민국은 전혀 다른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도 약속했습니다. 또 국가의 실상을 암에 걸린 사람에 비유하면서 “암 덩어리를 들어내야 한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난 1년 동안 수술은 말할 것도 없고, 정확한 진단절차에조차 손도 대지 못한 채 세월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9일에 일어난 한 기업인의 죽음을 계기로, 이제는 세월호가 아니라 정말 대한민국호가 맹골수도보다 더 거센 물결에 휩쓸려 표류하고 있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요즈음 홍보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국정책임자들의 행태에 세월호의 장면이 다시 한 번 선명하게 겹쳐 보입니다. 그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지금도, 선장이나 선원들 가운데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는 태도나 기울어져가는 배, 그리고 거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국민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근래 역사에서 계속 보아왔고 최근에 와서 더욱 심해지는 진흙탕 싸움뿐입니다. 내가 하던 좋은 일도 남이 하면 나쁜 일이 되기라도 한다는 듯이 상대방을 비난하고, 궁지에 몰리면 엉뚱한 사람을 붙잡고 늘어지는 물귀신의 모습만 계속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호의 선장과 선원 여러분! 이제 보니 여러분도 무엇인가에 속고 휘둘린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멀쩡했던 사람까지 조타실 언저리에만 가도 갑자기 정신을 잃고 이상한 증세를 나타내는 것을 보면, 거기에 사람의 정신을 헷갈리게 하는 어떤 맹독성 공기가 흐르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누군들 거기에서 정신을 차리고 양심을 지키며 신념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한 때 대한민국 재계서열 몇 번째였고 생전에 여러분이 아쉬울 때 얼굴을 맞대고 도움을 청했던 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부메랑’이라는 말이 요즈음 부쩍 많이 들립니다. 내가 휘두른 칼이 한 바퀴 돌아서 내 목에 꽂힐 수도 있는 세상입니다. 섬뜩한 일입니다. 실제의 칼이 아니더라도,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원혼이 되어 꿈속에 계속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권력으로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에 갇혀 살던 삶에서 완전히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절대”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상대적 세계와의 인연을 끊은 처지, 혹은 ‘시공의 제약에서 풀려난’(absolute) 세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 세계에서는 이 세상에서 잠깐 출연했던 연극과 맡은 역할에 맞추어 입었던 옷, 그리고 칭호를 다 벗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 장관, 교황, 주교, 지도자, 학자, 스승 등 그 어떤 칭호도 사라지고 우리는 모두 우리의 영원한 칭호인 ‘사람’으로서 절대자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인간은 그 때를 미리 예상하며 거기에 맞추어 사는 만큼만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세월-시간은 절대자의 손이며, 인간은 아무도 그 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옛 현자는 말했습니다. “날 수 셀 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 우리 마음이 슬기를 얻게 하소서”(최민순역 시편 90,12). 그래서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것만 보여주는 공간보다 먼 미래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이 위대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222-225 참조).
   공간과 시간을 헤치며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에 자주 비유되는 우리의 삶은 개인에게나 공동체 모두에게 모험이고, 폭풍과 암초에다 때로는 해적의 위험까지 겪을 수 있는 험난한 항해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를 확실히 아는 일, 그리고 그 쪽 방향을 정확히 잡게 해주는 나침판입니다. 

사람인 우리가 가는 곳은 짐승들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짐승은 ‘배’만 가지고 있어서 본능을 나침판 삼아 먹고 마시고 새끼 낳고 하다가 소멸하면 그뿐 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머리를 가지고 있어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머리’로 인간은 최근 들어 과학을 크게 발전시켰고, 우리는 한 세대 전까지 꿈도 꿀 수 없었던 세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머리를 써서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인간의 모습이 다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의 역사만 돌아보아도 머리 좋고 공부 많이 했다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게 됩니다.
   사람을 참으로 사람답게 해 주는 것은 머리와 배 사이에 위치해 있으면서 이 둘을 참으로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가슴’ 곧 ‘마음’입니다. 그런데 배만 채우면 잘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앞뒤 돌아볼 여지도 없이 달려온 지난 반세기 동안, 그리고 최근 들어 더욱 더, 우리는 교육제도마저 경제논리에만 초점을 맞추어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의식도 못 하는 사이에 머리와 배만 있고, 가슴이 없는 사람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어떤 분의 표현대로 ‘바지 입은 원숭이’만 양산해 온 것입니다. 그래놓고는 세월호 같은 사태가 일어나면, 관련자들이 양심과 인격을 갖춘 사람답게 행동하지 못했다며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습니다. 대한민국호가 표류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조타실에 있는 이들 역시 같은 시대, 같은 물과 공기를 먹고 마시며 살아온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양심을 묻고 인격자로서 처신해 주기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원숭이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스스로 만들어놓은 로봇에게 사랑을 기대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라 살림을 맡을 실무 책임자 하나를 뽑는 일이 후보자의 과거 비리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은 더욱 확실해집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서 어떤 형태의 권력이나 금력을 가진 이 치고, 같은 검증 기준을 무사히 통과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새삼,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짐승은 소멸하면 그뿐이지만 인간은 죽은 다음에도 가야 할 길이 또 있습니다. 사람이 정의, 진리, 절대, 도, 혹은 진선미를 추구하는 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향수 때문입니다. 사람은 극단적인 경우,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것을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온 세상을 준다 해도 바꿀 수 없을 만큼(마태 16,26 참조)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돈 몇 푼과 바꾸려 들면, 인간은 더 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요즈음 날만 새면 듣는 소리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먹고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국민들의 물질생활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 재화를 다 긁어모은다고 해도, 그것이 서민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경제성장이라면 보통의 국민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대기업의 총수가 한 해 동안 버는 돈이 최저 임금 노동자로서는 1,540년 동안 일하며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얻을 수 있는 돈에 해당한다니 말입니다. 또 그렇게 많은 돈을 버는 당사자들은 정말 행복합니까? 그런 분들 가운데서도 삶을 스스로 포기한 이들이 이전에도 있었던 것을 보면,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는 없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아래 가지에 있는 새를 잡으려면 윗 가지에 있는 새를 겨누라고 했습니다. 돈만을 지상의 가치로 여기고 달리면 돈마저 제대로 벌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나 깨나 경제 성장, 눈만 뜨면 돈, 교육제도를 포함한 우리 삶의 모든 분야를 물질생활 수준의 향상에만 초점을 맞춰놓고 살아온 결과, 우리 대한민국호는 지금 방향감각을 잃고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세상, 죽음의 맹골수도에 갇혀 표류하고 있습니다. 돈 앞에서는 국가와 민족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일도 서슴없이 하고, 사람 사이의 의리도 쉽게 저버립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삶의 최고 가치로 여기게 하는 사회 분위기는 결국 인간을 동물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말았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빨리 탈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함께 침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한 배를 타고 있는 공동 운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끼리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주선을 타고 대기권을 조금만 벗어나도, 칠흑처럼 깜깜하고 광대한 우주 공간에 외롭게 떠가는 지구가 거친 파도를 헤치며 아슬아슬하게 까딱이는 작은 돛단배처럼 가냘프게 보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보면 국경도 없고 민족이나 언어의 경계선도 없습니다. 같은 배에 몸을 싣고 가는 공동운명체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눈과 정신을 가진 사람만이 우주 시대라고들 하는 오늘의 세계에 살 자격이 있습니다. 한 나라, 같은 민족 안에서조차 이렇게 심한 담벼락이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처럼 거리를 느끼게 하는 현실은 이제 끝내야 합니다. 침몰해가는 세월호처럼, 이런 상황에서 급히 탈출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진리의 빛을 찾아내고 삶의 올바른 방향을 잡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는 죽음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일입니다.

그 빛을 찾으려면, 주변의 거센 조류 그 너머, 언제나 변하지 않고 고요한 심해, 아니면, 저 위 무한의 공간에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바다의 표면에 이는 거센 파도, 아니면 굳은 땅에 발을 딛고 살다가, 물속으로 가라앉고, 자신이 딛고 서 있던 땅이 꺼지는 실패와 좌절을 수없이 거쳐서, 간신히 그 빛을 찾아낸 어떤 이가 우리에게 조언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을 뚫어지게 바라보아야 합니다”(2베드 1,19 참조). 글이 적힌 종이를 우리의 눈빛이 꿰뚫는다고 할 만큼 眼光紙背徹, 정신을 거기에 집중하면, 글자는 ‘살아있는 말이 되고 위에서 내려오는 힘인 영으로 바뀌어’(요한 6,63 참조), 우리는 비로소 절대의 세계를 보고, 본 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자리에 있든, 어떤 역할을 하든,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어떤 대가, 어떤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우리는 이 세상을 좀 더 사람 냄새가 나는 곳으로 바꾸고, 운명공동체다운 사회로 변화시키기 위해, 각자의 몫을 다해야 합니다.
   여기서 세월호 사태에 딸을 잃은 한 어머니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지난 1년 동안 제가 깨달은 건 사회 안에 진정한 어른이 많지 않다는 거였어요. 저도 우리 수현이, 내 가정만 챙겼던 거죠. 이렇게 생각하게 되기까지 정말 힘들었어요. 제가 나이만 먹은 어른이지 진정한 어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아이를 잃고 나서야 사회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됐어요… 이렇게 활동하면서 알게 된 게, ‘내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진짜 시민으로서 행동한 적은 없었구나’, ‘잘못 된 일에 대해서 침묵하고 비겁하게 산 대가가 정말 혹독하게 왔구나’ 이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젊은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해요. 이런 사회를 물려주면서, 그들에게 싸워 달라고 하는 자체가 어른으로서 철면피 같고요. 나처럼 부끄러운 어른이 되지 말라고.” - 박수현 어머니 이영옥(한겨레 2015.4.23. 29면 : <세월호 유가족의 성장과 국가의 퇴행>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도적 권고서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나라의 국민은 지배 권력에 휘둘리는 군중으로서가 아니라,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지닌 국민으로서 활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각자는 자기 삶의 사회적 차원을 위로 끌어올립니다. 책임감 있는 시민 의식은 하나의 덕이고, 정치 생활에 참여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입니다”(복음의 기쁨, 220항).

 

*1) 2015.4.15.19:30. 중앙성당에서 했던 강론. 그 강론은 본래의 원고를 요약한 것이었는데, 여기에서는 본래의 원고를 참고하여 약간 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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