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호-2004년 가을 늙어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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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12-26 00:00 조회3,08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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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9,12)
“젊은이의 자랑은 힘이요 늙은이의 영광은 백발이다”(잠언 17,6).
1. 이런말을 대하면 근래에와서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아직도 젊은이의 자랑은 힘일수 있겠으나, 백발이 늙은이의 영광으로 남아있지는 않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백발이 정말 자랑스럽다면 왜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하는 새치를 뽑아버리고, 온통 하얗게 변한 머리를 염색해서 그것을 숨기려 하겠는가? 내가 어렸을때만해도 노인은 집안에서는 물론이고 동네고삿에서도 버릇없이 구는 젊은이들에게 호통을치며 기율을 바로잡는 서슬퍼런 실세였다.
그런데 일을 얼마나 잘하고 돈을 얼마나 버느냐하는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풍조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오늘날, 백발이 부끄러워 염색으로 숨기고 싶어하는 마음만큼이나, 노인에 대한 당사자 자신과 다른사람들의 생각이 크게달라졌다. 많은 노인들은 뼈가 휘게일을해서 “조국근대화의 위업”(?)을 직접 이루었거나 그 주역을 길러놓고도, 화려해진 물질문명의 그늘속으로 밀려나 쓸쓸하게 시간을 죽이고있다. 언젠가 그시간과 함께 사라질때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공원의 긴의자, 다리밑, 시장바닥의 후미진 구석에 모여 앉아 장기를 두고있는 노인들의 모습도 이미 어떤슬픔을 느끼게 하지만, 집에서 나오지도못하고 하루종일 외롭게 누워있는 노인들은 얼마후의 자기모습과 겹쳐보여 더욱 사람의 마음을 우울하게 한다.
2.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다. 이과정은 한줄로 연결되어 있어서,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결국 죽음으로 끝날 늙어감의 시작일뿐이다. 이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참으로 깊이아는 사람도 흔치않다. 죽음자체를 모르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앎이 삶 속에 깊이들어가 사람답게 살도록 이끌어 주는 힘으로 바꿔지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것이다. 석가모니는 이 사실, 이 깨달음에서 출발해서 도를 깨우쳤다. 시편작가역시 두눈크게뜨고 이빤한 사실을 똑바로 대한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 가고 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듯 가버리나이다”(시편 89,10). 그리고는 이 슬픈현실이 우리를 얼마나 큰 깨달음과 구원으로 이끌어줄 수있는지를 알려준다. “날 수 셀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 우리들 마음이 슬기를 얻게하소서”(시편 89,12).
그렇다. 늙어 아무도 알아 주지않고 검버섯이끼어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얼굴에 드리웠어도, 이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팔팔하던 시절에는 주로 먹고사는일에 온통정신을 빼앗기며 살던사람도, 어차피 날수가 얼마남지않았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되면, 보통으로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못한다는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깨닫고, 인간으로서의 참된 슬기가 피어오른다. 삶은 단순해지고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자신의 능력, 재력, 권력을 믿으며 아무리 떵떵거리던 사람도, 세월을 이길장사는 없어서,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은 죽음이 가까워옴에 따라 철이 들게 마련이다. “날 수 셀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 우리들 마음이 슬기를 얻게 하소서.”
3. 자연인으로서도 이미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을 주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관문일 뿐이라면, 죽음의 전조인 늙음역시 저무는 해가 남기는 긴그림자가 아니라 떠오르는 생명의 태양을 향한 희망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하여 “눈으로 본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고린 2,9)는 말씀대로, 인간의 상식이나 기대를 무한히 뛰어넘은 희망이 우리를 지켜준다. 희망이 분명할 때 사람은 누구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평범한 여인이 자식이라는 희망을 잉태하여 자라게 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놀라운 힘은 하나의 기적이다. “우리는 이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따름입니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할 수 없을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4-28).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삶의 황혼이 허섭쓰레기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건져내어, 볼 것을 더욱 분명히 보고 들을 것을 더 확실하게 들을 수 있는데로 이끌어 준다면, 늙어 간다는 것은 희망이요 축복이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을 향한 발걸음이요, 거기서 겪는 고통은 새생명을 위한 진통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해산할 즈음에는 걱정이 태산같다. 진통을 겪어야 할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와같이 지금은 너희도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와 만나게 될 때에는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