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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50호>윤지충 바오로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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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1-16 00:00 조회4,847회 댓글0건

본문

윤지충 바오로와 ‘아버지’

 

 

“본인은 사도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공경하올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을 앞으로 복자라 부르고, 법으로 정한 장소와 방식에 따라, 해마다 5월 29일에 그분의 축일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 한국 교회 역사 초기의 124위 순교자들을 복자 반열에 올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그분들의 모습이 담긴 대형 그림이 펼쳐지고 성가대가 부르는 환희의 찬가가 광화문 일대에 메아리쳤다.

이렇게 하여 복자로 선포되신 분들, 특히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서 첫 순교자로 공식 인정되고 이제는 복자로 선포된 윤지충 바오로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구체적이고 자세한 답은 끌로드 샤를르 달레(1829-1878)가 쓴 [한국천주교회사]1)다. 우리는 이분들 가운데 가장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윤지충 바오로 한 분에 초점을 맞춰 좀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윤지충은 옥중에서 [죄인 지충 일기]라는 수기를 썼고, 그것이 한때 이순이의 옥중서신 못지않은 감동을 일으키며 신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으나, 불행히도 모진 박해의 시대를 살아오는 동안 언제부터인가 소실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달레에게 한국천주교회사를 쓸 수 있도록 자료를 모아 보낸 다블뤼 주교는 이 귀중한 문헌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불어로 번역하여 보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달레의 저서에서 그 글을 비롯하여, 윤지충이 동료들이나 법정에서 한 말을, 그 자신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이분을 비롯한 여러 순교자들에 관해서 잘 모르고 있었고, 안다 해도, 이분들에 ‘대해서’ 쓴 어떤 누군가를 가운데 세워서만 간접적으로 듣는 정도에 머물렀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우리말 번역서에서 상·중·하 세 권으로 되어 있고, 각 권이 6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기 때문에, 전문가에게나 관심의 대상이 될 뿐, 일반 신자들에게는 엄두가 나지 않는 문헌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2)
   그러나 우리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등 124위의 시복이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역사적으로 첫 번째 순교자라는 점에서뿐 아니라, 사도 베드로와 요한처럼(사도 4,13 참조), 재판정에서 자신의 신앙을 그렇게 당당하고 자신있게 표명함으로써, 한국 교회 첫 법정 호교론자로서 우뚝 선 모습을 보여주고, 사형장을 향해 가는 길을 마치 잔칫집에 가는 듯이 기쁘게 걸어가며, 연도에 늘어선 사람들에게 복음을 외쳤던 이분의 진면목을 되찾아야 하겠다. 그렇게 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14년 8월에 우리나라에 오셔서 당부하신 대로, “기억의 지킴이가 되어” 이분들의 정신을 이 땅에서 언제까지나 되살려 실천해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제1부에서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관련 부분 몇 대목을 그대로 전재하기로 한다. 그런 다음, 제2부에서는 윤지충에게 천지개벽과도 같은 충격을 주어, 그때까지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꾸고 목숨까지 선선히 내어놓을 수 있게 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알아보고 묵상할 것이다.
            제1부 :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가 증언하는 윤지충 바오로

윤지충(1759-1791)과 권상연(1751-1791)은 명문가 출신으로 사촌 내외종 사이였고 나이는 권상연이 윤지충보다 8년이나 연장자였다. 그런데 신앙인으로서는,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이 흔히 그렇듯이, 순서가 바뀌어 동생이 형에게 복음을 전하고, 순교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앞장서 가는 인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두 분은 실과 바늘, 혹은 일심동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서 윤지충 바오로를 앞세워 하는 말은 그대로 권상연 야고보에게도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윤지충 바오로를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당국에서 이 두 사람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을 때, 지충은 경기도 광주로, 상연은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군수는 지충의 삼촌을 볼모로 잡아두었고, 그 소식을 들은 지충은 상연과 함께 군수 앞에 자수하였다. 다음은 관아에 도착하여 심문을 받으며 지충이 구술한 것을 한문으로 기록한 것을 불어로 번역하여 달레가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한 것 가운데 몇 대목만 가려 낸 것이다.

- 나는 10월 26일(1791년) 저녁때쯤 진산 관아에 도착하여, 곧 저녁을 먹은 후 군수 앞에 끌려 나갔다. 군수는 외쳤다. “너 그게 무슨 꼴이냐. 어쩌다가 그 꼴이 되었느냐?” “무엇을 물으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내가 대답하였다. “네게 대해서 아주 중대한 소문이 돌고 있는데, 그것이 근거 있는 말이냐? 네가 이단에 빠졌다는 것이 사실이냐?” “저는 이단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천주교를 믿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 그것이 이단異端이 아니란 말이냐.” “아닙니다. 그것은 바른 길입니다.” “그렇다면, 복희伏羲 때로부터 송조宋朝의 성현들에 이르기까지 실천한 것이 모두 거짓이란 말이냐.”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계명 중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저는 누구를 비판하거나 비교할 생각은 없고, 다만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 그러자 군수는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참 아깝구나. 네 집안의 명성은 여러 세대를 내려오며 네게 이르기까지 줄곧 높아왔는데, 그것이 이제 완전히 무너졌구나. 너 자신도 재주가 많은 학자의 명성을 가졌었는데, 네 정신이 미숙하고 경솔하여 네 조상들의 공경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구나. 네가 그렇게 하는 줄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내가 즉시 가서 권고하고 네 눈을 뜨게 하여 이런 극단에 이르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과거에 성현들도 불도佛道와 노자老子의 도道에 오랫동안 헤매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으면, 너는 아직도 그분들의 영광스런 자취를 따라 걸을 수가 있을 것이다.” “제가 지금에 와서 마음을 바꿀 수가 있다면 애초부터 그렇게 할 것이지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너를 더 나은 생각으로 끌어오기 위하여 아무것도 해 볼 것이 남지 않았구나. 나로서는 네 운명을 결정하기도 싫고 너를 자세히 신문하기도 싫다. 네가 감영에 가서 네 소행에 대하여 보고해야 할 것이다. 네가 부모에게서 받은 그 몸을 너는 어리석게도 형벌과 죽음을 당하게 하려느냐. 뿐만 아니라 너로 인하여 네 삼촌이 늘그막에 옥에 갇혔으니, 그것이 효도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냐?” “형벌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덕을 닦는 것이 효도를 어기는 것입니까? 제 삼촌이 옥에 갇히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저는 밤에도 쉬지 않고 달려와 사또께 자수하였습니다. 이것이 효도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랬더니 군수는 나를 법대로 다루라고 명령하여, 나는 이내 목에 무거운 칼이 씌워졌다. 그러고 나서 그는 탄식하며 내게 말하였다. “그게 무슨 꼴이냐.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여 죽는 것은 죄인으로 죽는 것이다.” 그러고는 나를 옥으로 데려가게 하였다.
  (두 사람은 결국 전주 감사에게 보내기로 결정되어, 긴 여행 끝에 전주에 도착하였고, 여기서 심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경서經書를 배웠느냐?” “배웠습니다.” “네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경서가 부족하단 말이냐? 어찌하여 미신에 빠지는 거냐?” “저는 결코 미신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래, 천주교라는 종교가 미신이 아니란 말이냐?” “천주는 가장 높으신 아버지시요, 하늘과 땅과 천신天神과 사람과 만물의 창조주이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미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그 도리를 간단하게 추려서 말해보라.” “우리가 있는 곳은 범죄 사실을 심의하는 데 적당한 자리이지 교리를 설명하는 데 적당한 자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것은 십계十誡와 칠극七克으로 요약됩니다.” (…)
   사건 심리를 맡은 임피 현령縣令도 내게 와서 조용한 말투로 충고하는 식으로 말하였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또께서 제게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다만 말로는 모든 것을 명백히 설명할 수가 없으니, 제게 아전 한 사람과 붓을 주시면 모든 것을 자세히 쓰게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나를 다른 방으로 들여보내며 공술供述을 써서 바치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앉아서 아래와 같이 불러주었다.

죄인罪人 윤지충 공供.
저는 어려서부터 공직에 나아갈 생각으로 과거 준비를 위하여 공부를 하였습니다. 제 오죽잖은 소망은 다만 임금님께 대한 충성의 의무와 부모님께 대한 효도와 형제에게 대한 우애의 의무를 다하기에 힘쓰는 데 있었습니다. 계묘(1783)년 봄에 저는 진사進仕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겨울 서울에 가서 명례방골에 사는 중인 김범우의 집에 우연히 들렀더니, 그 집에는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책과 칠극七克이라는 책, 이렇게 두 권이 있었습니다. 그 책을 대충 읽으니, 천주는 우리 공동의 아버지시요, 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과 만물을 창조하신 분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중국 책에서 상제上帝라고 부르는 분이십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이 태어났는데, 비록 살과 피는 부모에게서 받으나, 사실인즉 천주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육신과 결합하는데, 그것을 결합시키는 이도 천주이십니다. 임금께 대한 충성의 근본도 천주의 명령이요, 부모께 대한 효도의 근본도 역시 천주의 명령입니다. 이 모든 것을 두고, 중국의 경서에 실린 대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상제를 섬기라는 계율과 비교해 본 결과, 거기에는 같은 점이 많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실행할 것은 십계와 칠극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십계十誡는 이러합니다. 1. 하나이신 천주를 만유萬有 위에 공경하여 높이라. 2. 천주의 이름을 불러 헛맹세를 하지 말라. 3.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4. 부모를 효도하여 공경하라(이 계명의 해석에는 임금은 온 나라의 아버지요, 관장官長은 그 고을 백성들의 아버지이니, 그들도 역시 공경하여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5. 사람을 죽이지 말라. 6. 사음邪淫을 행하지 말라. 7. 도둑질을 하지 말라. 8. 거짓 증언證言을 하지 말라. 9.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10. 남의 재물을 부당하게 탐내지 말라. 이 십계는, 요컨대, 두 가지로 요약되니, 천주를 만유萬有 위에 사랑하라는 것과 모든 사람을 자기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칠극七克은 이러합니다. 1. 교만을 이기기 위한 겸손. 2. 질투를 이기기 위한 사랑. 3. 분노憤怒를 이기기 위한 인내. 4. 인색을 이기기 위한 희사喜捨와 너그러움. 5. 탐식貪食을 이기기 위한 절식節食. 6. 음란淫亂을 이기기 위한 금욕禁慾. 7. 게으름해태懈怠을 이기기 위한 근면. 이 모든 것이 덕을 닦는 데에 명백하고 정확하고 용이한 수단이 되므로 저는 그 두 책을 빌려서 소매에 넣고 시골집에 돌아와 베꼈습니다. 그리고 을사乙巳(1785)년 봄에 저는 그 책들을 주인에게 돌려보냈습니다.

3년 동안 그 책들을 연구하고 묵상하고 나서야, 비로소 저는 그것들을 진지하게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들을 연구하기 시작하고 2년 후에 이 교리가 엄금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책들을 불사르던가 물로 지우던가 하여 집에 보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천주교 교리를 아무에게서도 배우지 않았고, 누구에게 전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주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일단 깨닫고 나니, 그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양반 집에서 관례로 되어 있는 신주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므로, 제가 그 종교를 따르는 이상 거기서 명하는 것에 복종하지 않고 달리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 4계誡가 ‘우리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므로, 만일 실제로 우리 부모들이 그 신주 안에 계시다면 천주교를 믿는 사람도 누구나 신주를 공경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주들은 나무로 만든 것이고, 그것들은 살이나 피나 목숨으로 저와 관계를 맺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들은 저를 낳고 기르는 수고에 아무런 몫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영혼이 일단 이 세상에서 떠나가면 그런 물질적인 물건에 붙어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부모라는 명칭은 참으로 위대하고 존경받을 만한 것인데, 어떤 장인이 깎아 만든 물건을 제가 어떻게 제 부모로 삼고, 또 실제로 그렇게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바른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 양심은 그것을 승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로 인하여, 말씀하신 대로, 양반 신분을 잃는 한이 있어도 천주께 대하여 죄인이 되기는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신주들을 저희 집 땅 속에 묻었습니다. 제가 그것들을 불살랐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마는 우리 교敎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뚜렷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없으므로, 누가 그런 비난을 하였고 누가 그것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죽은 이들을 그들이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섬겨야 한다’고 말하였고, 사또께서도 이것이 우리나라 경서의 근본 원칙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들의 영혼이 술이나 어떤 다른 양식으로는 결코 양육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죽은 후에는 더욱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아무리 지극하다 해도, 주무시는 동안에는 그분들에게 음식을 드리지 않습니다. 잠자는 동안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그분들이 죽음이라는 긴 잠에 드셨을 때, 그분들에게 음식을 드리는 것은 헛된 일이요 거짓 행동일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돌아가신 부모를 헛되고 거짓된 행동으로 공경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에게는 아무런 참다운 향기도 없는 음식공양을 그만두고, 온 힘을 기울여 덕행을 닦는 데 전심하여, 그 결과를 그분들에게까지 미치게 하고, 동시에 우리 영혼도 기르는 것이 (효도의) 참된 길이요 바른 도리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천주교를 신봉함으로써 제 양반 신분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다 해도, 저는 천주께 죄를 짓기는 원치 않습니다. (…)

그런 다음 감사가 말하였다. “양반인 네가 이 형벌을 당하면서 괴롭지 않으냐?” “저도 순사또와 같이 육체를 가졌는데 어찌 괴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후회가 되지 않느냐?” “천주교에서는 신주를 불사르라고 명백히 명하지 않으므로 엄밀히 따지자면 경솔하게 한 것을 후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밖에는 후회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감사는 또 다른 형리에게 나를 치라고 명하여, 또 10대를 맞았다. 그런 다음 감사는 나에게 말하였다. “네가 매를 맞아 죽게 되어도 그 교를 버리지 못하겠느냐?”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만일 네 부모나 임금님이 너를 재촉한다면 그 말씀을 따르지 않겠느냐?” 이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는 부모도 모르고 임금도 모르는 놈이다.” “저는 부모님도 임금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윤지충 바오로의 수기手記는 끝난다. 그가 끝에서 두 번째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것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결코 망설여서가 아니고, 국왕이 화제에 올랐을 때에는 부정적인 대답을 용납지 않는 이 나라의 관습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관장들은 아주 잘 이해하였다. 그래서 감사는 그에게 또 10대를 때리게 하였으니, 법으로 정해진 30대가 다 차는 셈이었다. 그런 다음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다시 끌려가 옥에 갇혔다.(…)
  채제공 정승의 간청에 못 이겨 왕은 드디어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참수형斬首刑에 처하라는 명령을 승인하였다. 그들의 머리는 이웃 주민들에게 겁을 주어 이들로 하여금 새 종교를 따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5일간 효시梟示하기로 되어 있었다. 왕의 재가를 받은 명령은 전라 감사에게 발송되었다. 결안結案이 내려오자 두 신앙 증거자는 곧 감옥에서 끌려나와 형장으로 갔다. 외교인과 천주교인의 많은 무리가 그들을 따라 갔다. 많은 매를 맞아 쇠약해진 권상연 야고보는 다만 이따금씩 예수 마리아의 이름만 부르고 있었다. 그에 비해 몸이 더 튼튼한 윤지충 바오로는 기쁜 표정으로 나아가며,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을 마치 잔치에 나가듯 하였다. 그리고 (형장을 향해 가는 도중 연도에 늘어선 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의젓하고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설파하였든지, 천주교인들뿐 아니라 외교인들까지도 감탄하며 큰 감명을 받았다.

사형장에 이르자 형 집행을 주재하는 관리가 그들에게 ‘국왕에게 복종하고 조상의 신주에 상례적인 공경을 드리며 외국 종교를 버리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부정적으로 대답하자, 관리는 나라의 관습대로 목판에 쓰고 왕이 승인한 결안을 윤지충 바오로에게 읽으라고 하였다.
   윤지충 바오로는 곧 그것을 받아 큰 소리로 읽었다. 그런 다음 그는 머리를 커다란 나무 토막 위에 누이고, 여러 번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고는, 지극히 침착한 태도로, 망나니에게 치라는 신호를 보냈다. 망나니는 그의 머리를 단번에 잘랐다. 다음은 권상연 야고보의 차례였는데, 그 역시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의 머리도 사촌에 이어 곧바로 잘렸다. 때는 신해년 11월 13일(양력 1791년 12월 8일) 오후 3시였다. 윤지충 바오로는 33세였고, 권상연 야고보는 41세였다.

한편, 왕은 채제공 정승의 주장에 밀린 것을 후회하였다. 왕은 나라의 전통과 관습에 따라, 이 첫 번째 조치가 국법으로 굳어져, 그 뒤로는 새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계속 죽이는 구실이 되리라고 내다보았다. 그래서 왕은 사형집행을 유예시키기 위하여 전주의 감사에게 급히 특사를 보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특사가 도착한 때는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이미 순교의 영관榮冠을 얻은 뒤였던 것이다.
    왕이 예측한 대로, 천주교의 적들은 그때부터 늘 이 판결을 근거로 들어서 신자들에 대한 사형선고를 국법으로 여기게 하였다. 그리하여 첫 번째 공식 사형집행이 이루어진 다음부터는, 천주교인들에 대한 사형집행 중 대부분의 경우에, 이 판례가 주요 근거가 되거나 아니면 유일한 근거로 쓰였다. 천주교인들에게 겁을 주기 위하여 처형 현장에는 시체를 밤낮으로 지킬 포졸들을 배치하였다.

9일 만에 왕에게서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낼 허락을 받은 친척들과 그들의 장례식에 왔던 지인들은 두 시체가 조금도 부패된 흔적이 없고, 마치 그날 참수 당한 것처럼 붉고 선명한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그들의 머리를 놓고 자른 나무토막과 결안이 쓰였던 목판도 마치 방금 흘린 것과 같이 맑고 신선한 피에 젖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의 놀람은 한층 더 커졌다. 조선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12월(양력)에는 추위가 너무 심하여 그릇에 담은 물이 다 어는 때인 만큼, 이런 현상이 그들에게 더 놀라워 보였다. 외교인들은 매우 감탄하며 재판관들의 불공정에 항의하고, 두 증거자證據者들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직접 자세히 살펴보고 확인한 이 기적에 감동하여 입교까지 하였다. 천주교인들은 기쁨의 눈물을 쏟으며 주님을 찬미하였다.
   그들은 많은 손수건을 순교자들의 피에 담갔으며, 그 몇 조각을, 그동안 일어난 일에 대한 자세한 사연과 함께, 북경北京 주교에게 보냈다. 새로 교회에 들어온 교우들의 주장에 따르면, 의사들까지 손을 놓아 죽음만 기다리던 사람이 피에 젖은 목판을 담갔던 물을 마시고 곧바로 나았다고 한다. 그들은 또 죽어가는 사람 여럿에게 그 피가 묻은 손수건을 만지게 하였더니 당장 나았다고 한다.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모범은 조선의 초대 천주교인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명성은 널리 퍼졌으며, 특히 윤 바오로는 오늘까지도 신자들 사이에 크나큰 존경을 받고 있다.…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처형된 지 며칠 후에 조선 정부는 백성들에게 겁을 주어 입교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사형판결문과 사형 집행 소식을 전국의 모든 도시와 촌락에 붙이게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원수들의 계획을 역이용하신다. 이 공시는 두 증거자의 재판절차에 민중들이 비상한 관심을 집중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고, 천주교라고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이 교를 알게 하여, 복음 전파에 오히려 큰 기여를 하는 결과를 빚었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에서나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이 말은 항상 진리이다. “순교자들의 피는 수많은 신앙인들이 태어나게 하는 씨앗이다.” -
                 제2부 : 윤지충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

윤지충 바오로는 당대 명문가에 태어나 25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할 만치, 그 시대의 대표적 지성인 가운데 하나로서, 전통적 유교 사상으로 빚어진 인간이었다. 그런 분이 어떻게 간단한 교리와 복음 말씀 몇 마디를 접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목숨까지 선선히 내놓게 되었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교회사 연구가들에게도 늘 의문으로 남아 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단호하고 과감하게 유교 신앙에서 천주교 신앙으로 신념의 중심을 옮기게 했을까? 그것은 본 연구의 범주가 아니라, 이후의 연구들을 통해 좀 더 분명히 규명되리라고 본다.”3) 윤지충·권상연 순교 200주년 기념 연구 모임에서 교회사가 한 분이 제기한 질문 겸 과제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실증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겉에 드러나는 증거, 물증을 통해서만 말해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역사학이다. 그리고 역사학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그런데 교회사는 역사학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신학이다. 그래서 역사학으로서 추적할 수 없는 지점에서부터는 신학이 대답해야 한다. 과연 교회의 역사, 하느님 백성의 삶은 신의 개입이 아니고서는 해명할 수 없는 일들로 엮어져 있다. 교회사는 하느님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일들의 증언이다. 성서 자체가 하느님 백성의 역사로서 인간과 신이 함께, 아니 신이 언제나 주도권을 가지고 엮어가는 역사다. 윤지충의 이야기도 하느님 쪽의 역할, 성령의 개입을 고려해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쪽을 생각하면, 우리는 성서와 교회의 역사에서 유사한 이야기를 수없이 만나게 된다.

샤를르 달레는 자기의 저서에서 이순이 루갈다의 옥중 서간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믿음과 순결과 단순성,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이토록 아름다운 말로 표현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렇게 놀라운 글을 쓴 젊은 여인이 참으로 얼마 안 되는 신앙교육밖에 받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성체성사를 두세 번밖에 영하지 못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성령께서 이 아름다운 영혼에게 직접 해주신 일에 더욱 더 감탄하게 된다. 성령만이 이 동정녀의 마음속에 이토록 고상하고 섬세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셨고, 또 이 젊은 신입 교우의 붓끝에서, 초대교회의 가장 감격스런 이야기 속에서나 들어볼 수 있었던 말이 나오게 하실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4)

우리는 이 말을 윤지충의 구체적 상황에 맞추어 조금만 조정하면 한국 교회의 이 첫 순교자에 대해서도 그대로 할 수 있다. 그 역시 신앙 교육이라고는 아주 기초적인 교리서 몇 권 읽은 것이 전부였고, 성체성사는 접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그가 그때까지 최고의 가치로 여겨 익히고 실천하여 자신의 살과 뼈를 이룬 유교를 버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만큼 큰 변화를 일으켰던 것은 ‘성령께서 이 아름다운 영혼에게 직접 해주신 일’이라고밖에는 달리 해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달레도 자신의 저서 첫 권, 각 인물을 소개하는 부분의 시작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대목 가운데 윤지충의 삶을 소개하고 나서, 책의 맨 끝에서나 함 직한 말을 이미 결론삼아 하고 있다. “순교자들의 피는 많은 신앙인들이 태어나게 하는 씨앗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께서 그에게 해 주신 일의 비밀을 조금이라도 엿보기 위해서 윤지충이 지인들에게서 빌려온 ‘천주실의’와 ‘칠극’을 앞에 두고, 글자 그대로, ‘눈빛이 종이를 뚫는다眼光紙背徹’고 할 만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파고들고 묵상한 3년 동안의 세월에 주목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가 권고한 방법이기도 하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 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2베드 1,19). 이렇게 절대 진리와 맞붙어 씨름하며 보내는 시간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2베드 3,8; 시편 90,4). 안락의자에 앉아 찻잔을 앞에 두고 신학 문제를 논하는 분위기에서는 천 년을 들여도 가 닿을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아니, 하느님께서 그를 이끌어 그 경지로 들어 올려 주신다. 윤지충이 새로운 진리를 만나서 연구하고 묵상한 지 2년 후, 왕명에 의해 그것이 엄하게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부터 그 공부는 생명을 걸지 않고서는 계속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윤지충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재판정에서 한 변론은, 그때 이후 목숨으로 진리를 증언할 수밖에 없는 때가 올 것을 예상하며, 그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정리해 둔 신념의 표현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성서에서 윤지충과 가장 유사한 체험을 한 인물 가운데 하나는 사울이다.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삶의 어느 단계에까지, 마음과 목숨과 생각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섬겼고,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필립 3,6) 그 사람이, 성령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부터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사도행전 9장은 그 극적인 순간을 자세히 전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처단하기 위해, 살기 띤 기세로 다마스쿠스를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다. 땅바닥에 나뒹굴어진 그의 귀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는 질문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부터 그는 눈이 멀어 사흘 동안이나 앞을 못 보게 되었다. 그 동안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갑자기 깊은 구렁 속에 빠진 혼란스런 처지가 되어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두고 일생일대의 씨름을 했다. 야뽁강 가에서 밤이 샐 때까지 야훼와 싸웠던 야곱의 경험에나 비유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딛고 있던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믿어온 하느님, 열성을 다해 따랐던 율법, 그 모든 것은 과연 무엇이었더란 말인가? 앞을 못 보고 지낸 3일은 그에게 태초의 혼돈만큼이나 어두운 영혼의 밤이었다.
   마침내 날이 새고 빛이 비쳐온 것은 주님께서 보내신 아나니아가 찾아와 사울에게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할 때였다. “사울 형제, 나는 주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여기 오는 길에 나타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보내시며 당신의 눈을 뜨게 하고 성령을 가득히 받게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고 사도행전은 증언한다. 옛 세계가 가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사울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회복하였다”. 이렇게 해서 사울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잡으러 가던 길에서 도리어 예수의 손아귀에 철저하게 잡힌 몸이 되었고, “여러 회당에서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혼돈-카오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거나 아무 데도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질서-코스모스는 본래 어두운 혼돈 속에 이미 있었던 것들을 밝은 빛 아래에서 각기 자기 자리를 잡게 해 주면 따라오는 결과다. 바오로에게도 율법에 충실했던 세월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눈을 뜨고 새로운 빛 아래에서 보니 그것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것은 ‘장차 올 더 좋은 것을 예고하고 넌지시 보여주는 그림자’(히브 10, 1 참조)일 뿐 실체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실체의 시대를 맞이하여, 메시아-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 보니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윤지충에게도 그랬다. 효충孝忠. 부모에게 효도하고 왕에게 충성한다.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 나라의 아버지인 왕, 특히 부모에 대한 효도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도리의 근본이었다. 몸, 털끝 하나, 피부 한 조각까지 모두 부모에게서 받았으니, 그 점을 늘 명심하고, 감히 함부로 하거나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이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은, 윤지충이 그리스도교를 만나기 전까지 뼈와 살 속에 깊이 박혀 그를 만들어준 진리의 요체요 정신세계 그 자체였다. 그랬던 그가 아버지 하느님을 만났을 때, 그것은 이 젊은 유학자에게 하늘과 땅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사건이었다. 우주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사울을 쓰러뜨렸던 그 빛이 윤지충도 쓰러뜨렸고, 사울의 눈을 뜨게 한 그 힘이 윤지충의 눈도 뜨게 해 주었다.

‘아버지!’
그렇다. 영원한 아버지를 비로소 찾아냈고 이제 만났다. 그래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가 중국에서 전해온 [천주실의]와 [칠극]을 읽고 연구하는 데에 쏟은 3년의 세월은 바오로가 앞을 못 본 채 보낸 3일, 그 후 아라비아(갈라 1,17)와 다르소(사도 11,25)로 물러가서, 지금까지 몸바쳐 왔던 세계와 새로 발견한 세계를 두고 깊이 묵상하며 보낸 몇 년 간의 세월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혼돈에서 질서로,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건너가는 시간이었으며,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신비 속으로 빨려들어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진통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거쳐 새로 태어나고 보니 ‘아버지’는 온 우주와 인간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되었고, 자신이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사도 17,28)는 사실을 통절히 깨달았다.   
    이제 윤지충은 그런 아버지를 알려주신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알려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루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맨 처음 말(루가 2,49)과 맨 마지막 말(23,46)은 ‘아버지’다. 먼저, 맨 처음 예수의 입에서 아버지라는 말이 나온 정황을 보자.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는데 예수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루가 2,41-42). 이스라엘 백성의 관례에 따르면 12살은 성년이 되는 나이다. 성서의 이 표현으로 보아, 그 해에 소년 예수가 예루살렘에 가던 시점에는 아직 만 12세를 온전히 채우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을 따라 성전에 올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법적으로 성년이 될 기한이 차서, 돌아올 때에는 이제 성년으로서 부모의 권위에서 벗어나 따로 행동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것은 상징적인 행동이지만 그 의미는 크다.
   하룻 길을 걸은 다음에야 아들이 일행 속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흘 길을 되짚어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을 때 어머니가 옆에 있는 ‘아버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들아,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그러자 루가복음에 따른 예수의 첫 번째 말이 튀어나온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예수에게 있어서 철이 들고 성년이 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이 세상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다.
  
이제 예수의 입에서 마지막으로 ‘아버지’라는 말이 나온 정황을 보자.
- 해골산이라는 곳에 이르러 사람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죄수 두 사람도 십자가형에 처하여 좌우편에 한 사람씩 세워 놓았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고 기원하셨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사람들이 곁에 서서 쳐다보고 있는 동안 그들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보고 “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 보라지!” 하며 조롱하였다. 군인들도 또한 예수를 희롱하면서 가까이 가서 신 포도주를 권하고 “네가 유다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살려 보아라.” 하며 빈정거렸다.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 사람은 유다인의 왕’ 이라는 죄목이 적혀 있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하나도 예수를 모욕하면서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다른 죄수는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하고 꾸짖고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을 덮어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태양마저 빛을 잃었던 것이다. 그 때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지며 두 폭으로 갈라졌다.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루가 23, 33-46).

메시아로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류의 구원자로서, 그 위대한 사명이 완성점에 이르며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그분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겪었던 모든 일들이 축소판으로 나타나고, 그것을 배경으로하여, 구원자로서의 그분 모습은 그만큼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빛은 어느 시절에나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어둠이 빛을 삼켜버릴 것 같은 때가 너무나 많다. 사람들은 빛과 어둠 사이에서 자주 혼란에 빠지고 헷갈린다. 그들의 눈에는, 두 강도와 그 가운데 끼어 있는 하느님의 아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래서 진리는 언제나 박해와 모욕의 대상이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빛이신 그분의 눈에는, 헷갈리는 사람들이 불쌍하다.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핑계가 보인다. ‘모르면’ 사람이 생명의 근원을 죽일 수도 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께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끝까지 모든 것을 맡겼다는 말 속에 비밀이 다 들어 있다.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수난을 앞두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마르 14,36)라고 부르셨다. 어린애가 부모의 품에 안겨서 절대적 신뢰를 담아 부르는 호칭을 그대로 쓰신 것이다.

구원자에게서 최초로 나온 아버지라는 말, 그리고 최후로 나온 아버지라는 말. 이 두 아버지라는 말 사이에 예수의 삶 전체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이분의 가르침은 이 한 마디로 요약된다. “너희는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마태 23, 9). 아버지를 빼면 예수님에게서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아버지의 것은 다 나의 것이고 나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요한 17,10)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한 10,30)이며,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 9).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그분 안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다.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요한 14,10).
   그렇다고 해서, 그분에게는 우리가 삶에서 겪는 온갖 어려움이 없었던가? 아니다. 그분은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큰 공포를 느끼시며 기도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지만 그분의 기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도 아버지께 대한 그분의 신뢰와 순종은 한결같았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 14,36).
교회 역사 초기부터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이런 자세와 태도는 성가로 만들어져 신앙인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그대로 인용한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필립 2,6-11).
   우리는 모두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지정해 주신 시대와 영토, 시간과 공간’(사도 17,26 참조)에서 그분이 지정해 주신 역할을 하다가 때가 되면 그분께로 돌아간다. 바오로 사도에게는 그분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이 있었다. 윤지충 바오로에게도 그랬다. 이 두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지정해 주신 역할을 다하고 아버지께 돌아갔다. 
 
사도 바오로에게 주님을 만난 이후 상당한 시간이 주어졌듯이, 윤지충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더라면, 이 땅의 첫 순교자도 똑같은 진리를 증언했을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우리로 하여금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이 향기는 구원받을 사람에게나 멸망당할 사람에게나 다 같이 풍겨 나가지만, 멸망당할 사람에게는 역겨운 죽음의 악취가 되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감미로운 생명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향기의 구실을 아무나 할 수 있겠습니까?”(2고린 2,14-16) 그리고 사도 바오로처럼, 자신의 연약한 인간성 속에 하느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보화를 담아주셨는지에 관해서도 같은 말로 증언했을 것이다. “‘어둠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 속에서는 죽음이 설치고 여러분 속에서는 생명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라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똑같은 믿음의 정신을 가지고 믿고 또 말합니다. 이것은 모두 여러분을 위한 것으로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서 하느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2고린 6-13.15).

20세기 가장 위대한 역사가 중의 하나로 인정되는 아놀드 토인비(1889-1975)는 지구가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이 되어 외계로 떠나야 한다면, 가지고 가고 싶은 것이 딱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한국의 가족제도라고 말했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부모에 대한 효를 바탕으로 하는 가족의 인연과 사랑이 남다르다. 윤지충도 뼛속 깊이 새겨지고 핏속에 흐르고 있는 이 효, 그 근원인 ‘아버지’에 대한 관념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깨달은 이후 전 우주적인 폭과 깊이를 얻게 되었다. 그의 그런 믿음은 법정에서 한 그의 말 한 마디에 그대로 녹아있다.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뒤집으면, 이제 그 아버지를 끝까지 믿고 따랐으니, 죽어도 갈 곳이 분명하다는 뜻이 된다. 예수님의 정신이 그에게 전달된 것이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 돌아간다”(요한 16,28). 그래서 그는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을 마치 잔칫집에라도 가는 듯이 얼굴 가득히 기쁨이 넘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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