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51호(겨울)찬미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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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1-26 14:19 조회3,98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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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받으소서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 손수 하신 일을 알려 주도다”(시편 19,1). 맨 눈으로 대자연을 보며 사람들이 느낀 놀라움은 어느 시대에나 인간을 무한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창세기도 그 표현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창세기가 기록된 이후, 과학의 발전을 통해, 오늘날처럼 우주의 기원과 인간의 출현 이야기가 사람의 상상력을 심하게 뒤흔들어 놓은 일은 없었습니다.
블레즈 빠스칼(1623-1662)은 하늘을 보며 극대의 세계를 생각했고, 당시 알려진 원자를 생각하며 극소의 세계를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세계 사이에 있는 인간의 위치를 묵상하며, 사람이 극대의 세계에 비해서는 무에 가깝고, 극미의 세계에 비해서는 우주만큼이나 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빠스칼이 알고 있던 하늘과 우주는 그 후 발전한 과학이 펼쳐 보이는 우주에 비하면, 바다 전체와 해변에 깔린 모래 한 알에나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최근 들어 미국 항공우주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첨단 과학 장비들이 동원되어 매일 일반인들에게까지 알려주는 세계는 우리에게 현기증을 느끼게 합니다.
우선 극대의 세계에 관해서, 현대 과학계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아인쉬타인(1879-1955)이 시간과 공간은 같은 실체의 두 차원일 뿐이라고 한 말부터 시작하여, 현대 과학자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들은 인간이 옛날부터 가지고 있던 궁극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 절대자, 신에게만 써왔던 ‘무한’이라는 말이 과학에서도 흔히 쓰이고 있습니다. 교황청 과학 아카데미의 책임자였던 러 메트르 신부님이 계산해서 증명한 빅뱅이론에 따르면, 138억 년 전에 빵! 하고 폭발해서 생긴 우주는 지금도 그 기세로 계속 팽창하고 있고, 그 속도가 우리에게서 먼 곳에서는 빛보다 빠르다고 합니다. 그렇다는 말은 우주의 끝이 어디인지는 인간이 영원히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120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온 빛을 보며 연구하고 있는 은하나 다른 천체가 그 동안에 수명을 다하고 사라졌는지도 전혀 알 길이 없으며, 오늘 당장 그 천체가 사라진다 해도, 앞으로 120억 년 동안은 마치 거기 있는 듯이 천체 망원경을 통해서 우리 눈에 계속 보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거대세계에서는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휘어진 공간을 통과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 눈에 서쪽에서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동쪽에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렇게 거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크기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바닷가의 모래 한 알도 못되는데, 미국의 항공우주국이 쏘아 올린 아폴로 8호 덕분에, 1969년 12월 24일 인류는 처음으로 이 광대하고 깜깜한 우주 속에서 온갖 살아있는 것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파란 색 옷을 입고 외롭게 떠가는 지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실은 이 물질 세계와 그 일부인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과 함께 우리를 끝없는 신비감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눈을 작은 세계로 돌리고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자에서 전자, 전자에서 다시 양자의 세계에 이르면 상식적인 시간과 공간 개념이 허물어지고, 도대체 물질이란 무엇인지가 불분명해진다고 합니다. 최근에 알려진 ‘힉스’라는 입자는 작은 세계 역시 거대 세계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신비롭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 입자의 특성을 분석하여 내린 결론에 따르면, 글자 그대로 ‘진공’ 곧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야말로 잠재 상태의 물질로 꽉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1) 그래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용감한 왕자를 만나면 깨어나듯이, 수십 혹은 수백 억 년 동안 휴면 상태에 있던 예비 혹은 잠재적 물질이 외부에서 오는 큰 에너지를 만나면, 비로소 깨어나 물질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극미 입자를 검출한 것은, 역설적이지만, 지금 인류가 보유한 과학 실험장비 중 가장 거대한 것입니다. 프랑스와 스위스 접경지대에 설치된 ‘거대 입자가속기’가 그것인데, 그 둘레가 27km에 이른다고 합니다. 고리 모양의 이 장치를 무한히 작은 입자 뭉치가 초당 11,245 회, 곧 빛과 거의 같은 속도로 회전하다가 반대 방향에서 오는 같은 입자를 정면으로 충돌하게 함으로써, 이 극미 입자의 특성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것을 예측한 과학자의 이름을 따서 힉스 입자로 명명된 이 입자가 검출된 것은 2012년 7월이었는데, 그 후 이 입자 가속기는 2년 동안의 정비와 보강 과정을 거쳐서, 에너지 생산 능력이 두 배로 보강된 채 2015년 3월에 재가동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둘레가 100km에 이르는 초거대 입자 가속기를 구상 중에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오늘날 과학 장비들은 인간이 타고 난 감각을 거의 무한대로 확장해서 몇 세대 전까지만 해도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맨 눈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던 시절에 비해, 오늘날에는 자연의 신비스런 모습이 우리를 훨씬 더 압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과거에는 신과의 관계에서만 주로 사용하던 ‘신비’라는 말이 과학에서도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사람들은 우주가 만들어지는 창세의 현장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과학이 펼쳐주는 물질세계를 보며 사람들은 저마다 궁극적 질문을 하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답을 찾아내려 애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현상이나 사실을 앞에 두고도 사람들이 거기서 보는 것은 각기 다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이 물질세계를 만드셨다고 믿는가 아닌가에 따라 사람들이 거기서 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고, 종교 없는 과학은 불구”라고 한 아인쉬타인과 같은 과학자가 있는가 하면, 정 반대의 말을 하는 생물학자 도킨스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왜 우리 시대에 인간 앞에 이런 장면이 펼쳐지고 우리의 의식이 이렇게 확장되는가? 지구와 인류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우리 시대’에 지구와 생물, 그리고 인간의 운명이 우리 정신과 자유를 가진 인간의 결정에 크게 달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종교 없는 과학은 불구라고 했는데, 종교라는 말로 대표되는 인간의 정신활동, 그 윤리의식,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과학기술은 우리에게 더 없는 축복이 될 수도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오늘날 우리 눈앞에서 점점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구를 여러 번 파멸시키고도 남을 만한 핵무기가 러시아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비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쳐두고도, 지구 온난화와 그에 따른 빙하의 소멸, 오존층의 파괴, 하천과 바다의 오염, 바다 한 가운데 큰 섬을 만들고 있는 쓰레기 더미, 산성비, 생명의 고리에서 가장 약한 층의 대규모 멸종, 벌이 사라지는 현상 등, 우리가 서둘러 손을 쓰지 않으면, 지구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시대에 살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거기에 걸맞은 책임 의식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행동하고 삶의 방식을 조정함으로써, 지구를 언제까지나 살기 좋은 곳으로 가꿀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지구의 이런 현상은 어제오늘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19세기 산업혁명 이래 줄곧 지속되어 온 문제가 최근 들어 가속이 붙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아인쉬타인과 같은 시대에 살며 현대 과학이 나아가는 방향을 큰 선에서 함께 보면서, 과학과 신앙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한 삶을 바친 떼이야르 샤르댕(1881-1955)은 지구를 건강하게 보존하는 일에 관해서도 특유의 직관과 혜안을 가지고 선구자적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런 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5년 5월 24일에 ‘우리 모두의 집’인 지구를 잘 관리하고 지키자는 취지에서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하셨고, 누구보다도 신앙인인 우리가 이 일에 앞장 설 사명이 있음을 새삼 일깨워 주셨습니다. 교황님은 하느님께서 “우주 안에 수많은 창조물이라고 하는 글자로 쓰인”(85항) 귀중한 책을 주셨다는 가톨릭 교리서의 한 대목을 인용하시면서, 우리가 그 책을 잘 읽고 하느님의 뜻을 깨달을 것을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 이웃, 지구가 뗄 수 없이 서로 묶여있음을 강조하시면서(66항), 이 가운데 어느 하나에만 몰두해 있으면 착각에 빠지는 것임을 일깨워주십니다.
하느님, 이웃, 지구, 그리고 만물이 뗄 수 없이 서로 묶여있다는 말은 교황님의 이번 칙서에서 후렴같이 반복되는 상념입니다.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가 다른 것 없이 있을 수 없으며, 원자나 소립자조차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측면과 같은 이 지구의 다양한 측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살아있는 생물종들은 우리가 완전히는 탐색하거나 다 이해할 수 없는 거대 그물망의 일부를 이루고 있습니다”(138항).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자물리학이 힉스 입자 실험을 통해서 ‘진공’조차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말하자면 예비물질로 가득 차 있다가 그런 입자가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와서 그것을 치면, 거기에서 가능태에만 있던 것들이 물질이 되어 나타나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양자 물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는 동화를 비유로 해석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 이야기 속의 공주는 왕자가 나타날 때까지 잠들어 있다가 왕자가 사랑의 키스를 해줄 때 비로소 깨어나듯이, 물질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층은 비물질의 상태로 있다가 적절한 상대가 나타나 흔들어줄 때 비로소 물질로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공주와 왕자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자연과 실재 전체는 이런 식으로 짝지어질 때에만 존재하고, 더 높은 단계를 향해서 발전·진화한다는 것입니다. 소립자, 전자, 원자, 분자, 세포, 단세포 생물, 다세포 생물, 동물, 인간. 이렇게 복잡성을 축으로 하여 진행되는 진화는 정신을 지닌 인간을 향해 움직여 왔는데, 이 과정의 어떤 단계를 잘라놓고 보아도 짝을 이룰 때만이 존재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삶의 모든 과정, 영역에서 그것을 체험합니다.
그 대표적인 계기의 하나가 자연과 나,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맺는 관계입니다. 어머니처럼 모든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서 온갖 열매를 맺어 내 생명을 기르고 풍요롭게 하는 땅을 존중하지 않고 마구 훼손하면, 땅은 중병에 걸린 어머니처럼 더 이상 나를 길러줄 능력을 잃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열병에 걸려 쓰러져 있던 시몬의 장모가 주님의 손길로 치유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봉사했던 것처럼(루가 5,38-39), 우리의 손길로 땅의 건강을 되찾아주면, 그것은 다시 일어나 우리에게 자신의 온갖 풍요를 우리에게 베풀어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지구 환경이 급속도로 파괴되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생태 위기의 규모와 크기를 감안하면, 이것은 개인이나 크고 작은 단체들만 노력해서 건강을 되찾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어떤 국가도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이 협력해야만 풀 수 있는 과제입니다. 하지만, 당장 눈앞의 이익과 단기적 결과에 집착하여 표를 던지기 쉬운 사람들의 성향과 거기에 바탕을 두고 당선된 정치인들은 표를 의식하여 장기적 안목으로 정책을 입안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또 각종 부패에 연루되기 쉬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회와 같은 비정부기구가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고 비판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국민들이 국가적으로, 지역적으로, 또 지자체 단위로, 정치 세력에 통제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환경에 끼치는 손괴를 통제하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179항).
하지만 다른 한 편, 우리 하나하나가 일상생활에서 작은 행위를 통해 지구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구체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정치인들의 노력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플리스틱이나 종이의 사용을 삼가고, 물 사용을 줄이며,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정당히 먹을 만큼만 요리하고, 생명체를 사랑으로 돌보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승용차 함께 타기를 실천하고, 나무를 심고, 불필요한 전등을 끄는 것입니다. 이 모든 행위들은 인간의 넓은 아량과 품위를 드러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 안에 숨어있는 최상의 선이 밖으로 나오게 합니다. 우리가 좋은 마음으로 물건을 한 번 쓰고 바로 버리는 대신 그것을 재활용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존엄성을 표현하는 사랑의 행위가 됩니다”(211항).
그러나 이런 정신이 우리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어있지 않으면, 이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다 해도,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 내가 나서기는 싫어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같은 하느님에게서 나온 존재들이며, 따라서 태양과 달, 별과 땅이 내 형제며 자매요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사신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지은 “피조물의 찬미가”, 우리에게는 “태양의 찬가”로 더 잘 알려진 노래를 천천히 묵상하며 부르는 것은 ‘피조물의 수호자’ 이신 그분의 정신이 내 마음속에 스며들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 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과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 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
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사랑의 내 주님을 노래 부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