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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52호(봄)“1923년 오르도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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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3-29 16:46 조회3,9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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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오르도스에서”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를 쓰고 나서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님은 글 끝에 “1923년  오르도스에서”라고 적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오르도스라는 지명이 서양말처럼 들려서 그쪽 어디쯤인 줄 알았다. 나중에 그것이 지금의 내몽고에 속하는 한 지역임을 알았을 때, 동양의 지명 치고 아주 생소한 그 명칭 때문에도 다시 한 번 신비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 말이 몽고어로 천막을 뜻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물론이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신학자, 과학자, 신비가, 시인을 한 몸에 지닌 이 위대한 인물의 정신 속에 그 거대하고 깊은 상념을 불러 일으켰을까?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를 본래의 뜻에 따라 옮기면 [땅덩이를 제단 삼아 드리는 미사]가 된다는 사실을 여기서 다시 한 번 기억하자. 그렇다. 땅덩이, 지구, 세상, 나아가 우주 전체를 제단으로 삼고 우주의 활동, 그 용틀임, 특히 정신, 육체 할 것 없이 인간의 모든 움직임-활동- 노작, 그리고 그런 <활동>을 하자면 반드시 겪게 되어있는 <수고>를 각각 미사 때의 빵과 포도주 삼아 우주의 창조주께 봉헌한다는 상념을 글 속에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적극적인 활동은 빵으로 대표되어 성반 속에 담겨 예수님의 몸으로 변하게 하고, 빛에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는 그림자처럼, 어떤 종류의 활동에나 피할 수 없이 붙어 다니는 피로와 수고는 붉은 포도주의 형태로 성작에 담겨 그리스도의 피가 되게 한다는 상념이다.

현지에 가까이 가는 길에서 보이는 광경이 우선 강한 인상을 준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대초원의 잡초와 작은 관목들만 보이는 광경이 낯설다. 그런데 갑자기 지층이 내려앉은 듯이 상당히 깊은 골짜기가 보이더니 점점 더 넓어지며 다른 세상처럼 초목이 무성하고 제법 큰 나무도 보이는 경치가 펼쳐진다. 마침내 떼이야르 신부님이 머물며 발굴하고 글을 쓰셨다는 현장에 도착하니 계곡과 양쪽 민둥산에서 기적처럼 흘러나온 물이 상당한 크기의 호수를 이루고 있다. 이 호수는 후에 인공 댐을 지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떼이야르 시대에는 그냥 흐르는 물이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발굴 현장에서 바로 보이지는 않지만 거기에서 조금만 돌아가면 볼 수 있는 뜻밖의 장면이다. 붉은 흙으로만 되어 있는 양쪽 산 밑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이 상당한 양이어서 두 줄기가 모여 사막 속의 오아시스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고대인들도 여기에 깃들어 살았을 것이다. 
   준 사막과 같은 광경만 계속되다가 갑자기 만나는 오아시스. 그 대조적인 환경에서 생명은 더욱 찬란히 빛나고 대자연은 그만큼 더 큰 신비로 다가온다. 이런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우리 한국 방문단 8명과 중국 측의 떼이야르 동호인들 약 40명이 호수를 바라보며 섰다. 베이징 대학의 왕해양 교수를 중심으로 모인 떼이야르 동호인들과 현대 몽고어로 징기스칸 등 역사소설을 쓴 바 있는 저명한 문필가 양도르제씨도 함께 했다. 특히 양도르제씨는 근래 중국어로 번역된 [자연 안에서 인간의 위치]라는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떼이야르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분이다.
    중국 측의 참가자들은 대부분이 비신자들이다. 중국 정부가 어떤 종교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명시적으로 신이나 하느님 등의 용어를 쓰지 않으면서, 인간이 타고난 초월자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고 거기에 상응하는 대상을 감지할 수 있게 하는 언어로서 떼이야르의 작품만한 것이 있을까! 과연 떼이야르의 동호인들인 그들은 오르도스 부근의 숙소에서 새벽 두시에 일어나 차로 두 시간쯤 가야 있다는 산에 다녀왔다고 했다. 별을 보고 새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베이징에서 온 그들에게 자연에 대한 향수는 절대자에 대한 갈망의 자연스런 표현이었을까?
   그들 중 한 젊은이는 연구 모임 시간에 진지한 태도로 ‘원죄’에 관해서 질문하는 것이었다. 후에 그 사람을 따로 만나, 그것이 순전히 지적인 호기심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음속 깊이에서 절실하게 우러나는 질문인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두 번째라는 것이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자연과 그 한 부분인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삶에서 겪게 되는 그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은 도대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일까?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이런 의문들이 무신론을 표방하는 중국 사회라 해서 사람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을 억누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2015년 9월 19일,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가 쓰여진 현장에 와서 떼이야르에게 그 거대하고 깊은 영감을 불어넣은 그 장엄한 자연 앞에 서 있다. 그리고는 중국 측에서 마련한 대로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 제 1장에 해당하는 <세계 위의 불>을 한 문단씩 나누어 중국어, 한국어, 불어로 천천히 읽었다. 참석자 모두가 말하자면 빵도 포도주도 제단도 없는 상황에서 땅덩이를 제단 삼고 자연과 인간의 용틀임과 노동 그리고 수고를 제물 삼아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천지신명도 감동할 장면이었다. 인류가 지상에 존재한 이후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언제 어디서나 본능적으로 하늘과 대자연을 보며, 그 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를 향해 마음을 모으고, 삶에서 특히 기쁨과 슬픔을 체험할 때마다 호소하고 찬양하고 춤추고 노래하던 바로 그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 때, 특히 공식적인 의미의 신앙인이 거의 없었던 중국 측 참가자들은 그 이름을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 온”(사도 17,23 참조)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것 같았다.  그 때, 거기서 읽었던 대목을 다시 적는다.


-주님, 이번에는 앤Aisne 숲 속이 아니라 아시아의 대초원 안에 들어와 있지만, 또다시 저는 빵도 포도주도 제단도 없이 이렇게 서서, 그 모든 상징들을 뛰어넘어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순수 실재를 향해 저 자신을 들어 올리려 합니다. 당신의 사제로서, 저는 온갖 노동과 수고를 당신께 봉헌하겠습니다.

저쪽 지평선에서는 이제 막 솟아오른 태양이 동쪽 하늘 끝자락을 비추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불이 찬란한 빛을 내며 떠오르면, 그 아래 살아 있는 땅의 표면은 다시 한 번 잠에서 깨어나 몸을 떨며 또다시 그 두려운 노동을 시작합니다. 오 하느님, 저는 새로운 노력이 이루어 낼 소출들을 저의 이 성반에 담겠습니다. 또 오늘 하루 이 땅이 산출해 낼 열매들에서 짜낼 액즙을 이 성작에 담겠습니다.

이제 곧 지구 곳곳으로부터 올라와 영靈을 향해 모아질 온갖 힘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는 영혼의 깊은 속, 그것이 저의 성반이며 성작입니다. 새날을 맞이하라고 지금 빛이 흔들어 깨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들과 신비로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저는 지금 저를 먹여 길러 주고 또 저의 삶을 풍요롭게 하도록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하나하나를 보며 사랑합니다. 그 다음으로, 저는 또 다른 가족을 떠올리며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마음, 학문 연구, 사상 등의 동질성을 통해, 너무나 다른 요인들을 묶어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가족이 울타리인 듯 저를 서서히 에워싸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 좀 더 막연하고 일반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고 모두를 감싸 안으면서 - 일일이 그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살아 있는 인류 전체를 저의 눈앞에 세웁니다. 제가 알지 못하지만 저의 가까이에서 저를 도와주는 사람들, 오는 사람들과 가는 사람들, 누구보다도 사무실, 실험실, 공장에서 일하면서, 진리에 대한 꿈을 가지고, 혹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지상 현실의 진보를 정말로 믿는 사람들, 그래서 오늘도 빛을 향해 열정적 탐색을 계속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가지런하거나 혼란스럽거나 간에, 쉬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 거대한 군중 앞에서 저희는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특별한 요동도 없이 나아가는 이 거대한 물결 앞에서는 믿음이 굳은 사람이라 해도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저의 온 존재가 바로 이런 깊이에서 올라오는 속삭임에 공명하는 것입니다. 이 하루 동안 더욱 커질 모든 것들, 이 하루 동안 더욱 작아질 모든 것들, 오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들까지도 주님, 이 모든 것을 한껏 저의 품속에 끌어 모으려 하는 것은, 그것들을 당신께 봉헌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저의 봉헌물이고, 당신께서 바라시는 단 하나의 봉헌물입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자기네가 수확한 것 가운데 맏물을, 또 가축들 중에서도 제일 좋은 것을 당신 성전에 봉헌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봉헌물, 신비롭게도 당신께서 배고픔을 달래고 목마름을 해소하시기 위해서 날마다 필요로 하시는 봉헌물은 이 세상의 성장, 우주 만물의 진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 성장뿐입니다.

주님, 새날의 첫 새벽에 당신께서 만드신 창조계 전체가, 당신의 이끄심에 따라 움직이며 모든 것을 다 올려 봉헌하는 이 거대한 제병祭餠을 받으소서. 저희의 노동인 이 빵이 그 자체로서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부스러기일 뿐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의 고통인 이 술 역시 다음 순간에 사라질 하찮은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볼품없는 물질 덩어리 그 깊이에 당신께서는 거룩함을 향한 어떤 억누를 수 없는 갈망을 숨겨 두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느낌으로 감지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저희는 모두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저희를 <하나>가 되게 해 주소서.”

제가 비록 당신의 성인들처럼 영적 열망을 지니지도, 그분들 같이 드높은 순결에 이르지도 못했지만, 당신께서는 저에게 칙칙한 물질 덩어리 속에서 꿈틀대는 모든 것들을 향해 억누를 길 없는 애정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천국의 자녀이기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땅의 아들임을 의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늘 아침 제 어머니의 희망과 비참을 가슴에 품고 마음속으로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렵니다. 거기서 저는 - 당신께서 제게 주셨다고 확신하는 사제품의 힘을 빌어 - 떠오르는 태양 아래 인간 육체의 세계에서 이제 곧 태어날 것과 죽어 갈 것들 위에 <불>을 끌어내리겠습니다.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 떼이야르 드 샤르댕 지음/김진태 옮김, 가톨릭대학출판부, 15-20쪽). -

1932년 미국 로스앤젤스에서 올림픽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떼이야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올림픽 경기장에 운집한 군중에게 10분 동안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성체성사의 ‘연장延長’에 관해서 외칠 것이다.” 성체성사는 사제가 성당의 제단에서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는 성사다. 그런데 성체성사는 이런 일차적인 의미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시간적으로는 ‘언제나’ 공간적으로는 ‘어디에나’ 계시듯이, 성당의 제단에서 이루어지는 성체성사도 2차적인 의미에서는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 그 의미를 연장하여 세상 어디에서나 또 언제나 계속되는 인간의 노작과 수고, 그 적극적 행위와 수동적으로 당하는 모든 것, 곧 삶 전체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켜 하느님께 참된 제물로 바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1995년 사제서품 50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선물과 신비”에서 떼이야르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떼이야르 샤르댕의 아름다운 표현대로, 성체성사를 거행한다는 것은 세상의 노동과 수고를 세계(곧 대자연과 인간세상)라는 제단 위에서 봉헌하기 위해서 제사를 거행하는 일이다.” 그리고 교황 권고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2003)에서는 한층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성체성사를 생각할 때, 또 사제와 주교로서, 그리고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지낸 삶을 되돌아볼 때, 본인은 자연스레 본인이 성찬례를 거행할 수 있었던 여러 기회와 장소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본인이 처음으로 본당 사목을 맡은 니에고비치의 성당, 크라쿠프의 성 플로리아노 대성당, 바벨 주교좌 성당, 성 베드로 대성전을 비롯한 로마와 세계 곳곳의 여러 대성전과 성당들이 기억납니다. 산길, 호숫가, 바닷가 등에 지어진 경당에서 거룩한 미사를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운동장과 도시의 광장에 세운 제대에서도 미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장소에서 거행한 성찬례를 통하여 본인은 성체성사의 보편적인 특성, 다시 말해 <우주적인 특성>을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우주적>입니다! 성찬례는 시골 성당의 초라한 제대에서 거행될 때에도 어떤 면에서는 늘 <세계를 제단으로 해서> 거행되기 때문입니다. 성찬례는 하늘과 땅을 결합시킵니다. 성찬례는 모든 피조물을 끌어안고 그 속에 충만히 스며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단 한 번의 숭고한 찬양 행위로, 모든 피조물을 무에서 창조하신 분께 되돌려 드리고자 사람이 되셨습니다.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성혈로 영원한 지성소에 들어가셨으며, 그리하여 모든 구원받은 피조물을 창조주이신 아버지께 되돌려 드리십니다. 그분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의 사제직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이는 참으로 성체성사 안에서 성취되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손에서 비롯된 세상이 이제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아 하느님께 되돌려 집니다”(8항). 

그렇다. 제단도, 빵도, 포도주도 없는 상황에서 떼이야르가 하느님께 드린 미사 곧 성체성사를, 이제 어떤 의미에서는 명시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그 삶 전체를 통해서 하느님께 드린다고 할 수도 있다. 이번 오르도스에서 중국 참가자들과 함께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의 첫 장을 깊은 감동과 함께 묵상하며 우리는 그 사실을 온 몸으로 체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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