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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53호-여름)세월호, 국가개조, 그리고 그리스도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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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6-23 12:07 조회3,5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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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국가개조, 그리고 그리스도인1)

 

 

세월호가 그 특유의 상징성과 함께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지 벌써 두 해가 지났습니다. 상징성을 말하는 것은 그 사건이 단순히 배 한 척이 304명의 목숨과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았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호라는 배가 놓여있는 현실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작년 이맘때도 지적한 대로, 당시 대한민국호의 선장되시는 분은 그 상징적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국가를 대개조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라를 완전히 해체했다가 다시 만들지 않으면 세월호처럼 침몰할 수 밖에 없겠다는 절박감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분은 “세월호 이전의 대한민국과 이후 대한민국은 전혀 다른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도 약속했습니다. 또 국가의 실상을 암에 걸린 사람에 비유하면서 “암 덩어리를 드러내야 한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오늘날 대한민국은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지켜지지 않는 약속, 선거철만 되면 쏟아내는 공약들이 그 때만 지나면 물거품처럼 사라지곤 하는 세월을 우리는 너무나 오래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나라는 국민의 절대 다수에게 점점 더 살기 어려운 곳으로 변하고, 젊은이들은 헬조선에 N포세대라는 말까지 쓰고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남북 관계가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국민으로서, 한 걸음 나아가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을 앞에 두고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것인지를 근본에서부터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마침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오늘 매일미사 책에 쓰여 있는 간단한 소개 글에 따르면, 이 성인은 1030년 무렵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태어나 사제가 되고 나중에 현지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교 직무를 수행하던 중 국왕의 불의와 폭정을 꾸짖으며 그를 파문하자 왕은 그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1079년 4월 11일 미사를 드리고 있던 그를 성당에서 끌어내어 살해하였습니다. 한 편, 오늘 미사의 제1 독서에서 우리는 교회 역사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가 거짓 증인들이 덮어씌운 죄목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진리와 거짓, 빛과 어두움 사이의 투쟁 과정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거짓증인들의 고발에 따라 재판을 받고, 그들의 주장 앞에서 진리를 밝혀야 할 자리에 있는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하는 말로 그것을 가볍게 무시한 처사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 이후 그분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목숨이라도 바칠 각오로 살아왔습니다. 스테파노는 그 첫번째 예일 뿐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일은 반복되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 역사 2천년을 통틀어 오늘날만큼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루가 9,23)는 말씀은 지금도,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앞으로도 유효할 것입니다. 여기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분의 말씀이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진지성을 띠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쓰시는 말들이 이 세상에서 흔히 통하는 의미와는 때때로 정 반대의 뜻을 지니는 이유가 있습니다. 과연 그분이 주시는 평화는 칼을 거쳐서만 이룩할 수 있고(마태 10,34), 그분이 주시는 일치는 분열의 아픔(루가 12,51-53)을 통과해야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 자유의 나라는 바다를 건너고 사막을 통과하는 대가를 치르고서만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값싼 평화나 대가 없는 일치는 흔히 거짓 예언자들이 내세우는 현실 영합적인 태도일 뿐입니다. 다만 참 평화와 일치를 위해 손에 들어야 할 칼은 남의 가슴이 아니라, 내 자신의 심장을 파고들어 허위의 껍질을 뚫고 진리의 빛이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 4,12).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자기 마음의 평화나 내적 생활에만 몰두하는 이기적인 태도를 벗어나 이웃, 사회, 특히 불의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뛰어들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내적 평화나 하느님과의 관계에만 몰두하여 이웃을 잊고 사는 신앙인은 가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이웃과 사회 쪽으로 나가려들면, 첫 걸음부터 박해가 시작되고 십자가의 위험이 따를 가능성이 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빵 곧 경제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가르쳐주시는 길을 잘 보여줍니다. 빵을 많게 해 주신 이야기는 네 복음서 모두에 소개된 단 하나의 기적입니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인류의 구원자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6장을 처음부터 살펴보면 우리는 거기 펼쳐지는 장면이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큰 “군중”이 몰려오는데 먹을 빵은 너무나 부족한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서양말에서 ‘정치’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 혹은 ‘군중’을 의미합니다. 사회, 공동체 등도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살 때 빵으로 대표되는 온갖 형태의 재화를 정의와 질서에 따라 잘 나누고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니고 살 수 있게 하는 기술이 바로 정치입니다. 
   인간도 다른 동물처럼 살기 위해서는 우선 먹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는 인간도 동물과 다름이 없습니다. 빵-물질에 대한 욕구는 그래서 생명에 대한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 간의 다툼이나 나라 사이의 분쟁도 대부분이 물질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마르크스 공산주의는 인류역사 전체에서도 이 문제를 둘러싸고 가장 철저한 사상적 토대와 정치적 체제를 갖추고 한 때 인류의 반을 그 영향권 아래에 두기도 했었습니다. 그것이 20세기의 끝 무렵에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미 점점 크게 나타나고 있던 모순 때문이었습니다. 그 모순이란 인간이 동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동물만은 아니라는 것 역시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이라는 진리가 잊혀진 데에서 싹튼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이 빵 만으로는 살지 못하는”(마태 4,4 참조) 존재이며,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 무한한 것,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갈증은 그 어떤 물질적인 것으로도 충족될 수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망각한 데에서 그 모순은 잉태되고 자라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는 세계, 감각의 세계에 갇혀 사는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계나 초월적 가치를 소홀히 할 위험이 대단히 큽니다. 예수께서도 40일 동안 사막에 들어가 단식과 기도에 전념하며, 인류 구원을 위한 구체적 계획과 방법을 구상하실 때, 내면에서부터 들려오는 유물론자의 목소리가 제일 먼저 그리고 크게 들려왔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 “그 방향으로 가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느님의 백성이 지나온 역사에서도 이미 선례를 찾을 수 있지 않은가? 모세 시대에는 만나를 내려 준 일, 엘리아와 엘리사 같은 예언자들의 시대에는 빵을 많게 해 준 사례가 있지 않은가? 사막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돌과 모래를 그대로 빵으로 바꿔주면, 힘들이지 않고 메시아로, 인류의 구원자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때 예수님의 마음속 깊이에서 이런 생각이 폭풍처럼 강하게 밀려오지 않았다면, 참된 의미의 유혹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분은 성서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내면에서 일어나는 폭풍을 잠재우고 그것을 사탄의 유혹으로 식별·규정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고 하지 않았느냐?”(마태 4,4). 그렇게 해서 패퇴한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는데”(루가 4,13), 이제 군중의 모습으로 다시 한 번 나타났습니다. 빵을 많게 해 주시는 그분의 솜씨를 보고 놀란 군중은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입니다. 왕이 되고 싶고 권력을 쥐고 싶은 사람은 하나같이 경제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대부분 지키지 못하는데, 예수님은 그 일을 쉽게 해결해 줄 능력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그 방향으로 가면 자신이나 사람들이 치명적인 착각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가셨습니다”(요한 6,15)> 그렇게 해서, 그분은 인류를 동물 아닌 영적 존재로서 그보다 더 험악한 악마로 돌아가지 않고, 인간 특유의 자유와 기쁨 그리고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걸어가셨고, 인류에게 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에게 먹고 마실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을 하느님 자리에 앉혀놓고 그것 자체를 숭배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아랫 가지에 앉은 새를 잡으려면, 윗 가지에 앉은 새를 겨누라고 했습니다. 물질, 그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추구하면, 물질마저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고 그 노예가 되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황금송아지를 신으로 모시며, 영혼 가장 깊숙이에까지 철저히 묶여 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정의, 진리, 인간의 존엄성, 모든 사람의 평등, 이 모든 보편적 가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물질을 둘러싼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통제할 길이 없게 됩니다. 그 때 인간 세상은 먹고 먹히는 야수들의 세계보다도 더 무섭고 추한 악마들의 소굴로 변합니다.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먼저’ 찾는 데에 있습니다. 이제 요한복음 6장에 제시된 그 길을 살펴봅시다. 
큰 군중이 먹을 것이 없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예수께서는 먼저, 제자들로 대표되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방식을 확인하십니다.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 질문은 ‘어디서?’ 인데, 대답에는 빵을 살 ‘돈’에 대한 걱정이 앞으로 나옵니다. “이 사람들에게 빵을 조금씩이라도 먹이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온다 해도 모자라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안드레아가 등장하는데, 그는 제3의 인물인 어린이 하나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말합니다. “여기 왠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세 인물로 상징되는 우리의 생각과 기대를 확인하신 다음, 그 문제에 관한 당신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이 엄청난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그분께 내어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마치 가나 혼인잔치에서 그분이 맛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떠다놓은 맹물만으로 충분했던 것과 같습니다. 문제의 크기에 비해 우리 각자의 능력이나 수단이 아무리 턱없이 모자라 보여도, 그 작은 것을 내놓기만 하면 나머지는 그분께서 해 주신다는 사실을 요한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현세적인 것들에 못 박혀 있다”는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말씀대로 사람은 물질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질이 주는 쾌락보다 비할 수 없이 더 큰 기쁨을 성령을 통해서 체험하지 않고서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에 흔히 그대로 붙들려 삽니다. 시몬 베드로도 바로 그 때문에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약속받은 바로 다음 순간 유혹자가 되어 예수님으로부터 더할 수 없이 가혹한 질책을 들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시몬이 교회를 세울만한 바위, 곧 베드로가 되기 위해서는 혹독한 댓가를 치르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참 기쁨을 체험하기까지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빵을 많게 한 기적 이야기 다음에 거의 모든 복음사가들은 제자들이 한밤중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거의 죽기 직전에 예수님의 손길로 살아난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다를 건너 예수님을 찾아낸 다음에도 그들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선생님, 언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 그들은 아직도 질문조차 제대로 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언제 왔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문에 현답을 주십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요한 6, 26-27). 
   빵을 달라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끝에 가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 유다인들은 물론이고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여럿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하며 그분을 버리고 물러가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때 수천을 헤아리던 군중이 그렇게 떠나가고 마지막으로 다시 열 두 제자들만 남았을 때, 그들의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이 때, 천국과 지옥, 생명과 죽음, 절망과 희망을 몸으로 겪음으로써,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태 앞에서도 믿음만으로 뚫고 갈 수 있는 힘이 생기기 시작한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믿음을 고백한 바로 그 순간, 사탄의 진영으로 넘어간 유다스의 정체도 분명해집니다.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의 경계가 확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열둘은 내가 뽑은 사람들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현실로 돌아옵시다. 대한민국호의 선장이 “세월호 이전의 대한민국과 이후 대한민국은 전혀 다른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저는 그것이 진심에서 나온 말씀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왜 그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또 그 말을 그대로 실천하라며 수많은 사람들이 부르짖고 비판하고 싸웠는데도 세상은 왜 점점 거칠고 황폐해지고만 있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 가장 근본적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치인들이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 그 정책을 구상할 때 그분께 영감을 주시도록 기도하지 않기 때문”(복음의 기쁨 205 참조)입니다.
다그 함마르셀드(1905-1961)는 그 당시까지 역대 유엔 사무총장 가운데 최고라는 평가를 받은 분입니다. 그분은 자기 사무실 옆에 기도실을 마련하고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는 언제나 거기 들어가 하느님의 뜻을 묻곤 했다고 합니다. 1961년 콩고 내전 해결을 위해 무장단체 지도부를 만나러 가던 중 의문의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노벨상 위원회는 생존자에게만 시상한다는 원칙을 깨고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였습니다.
   인간은 밥을 먹어야 살지만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빵, 오직 경제, 오직 기술과학만을 추켜세우며 인문학을 무시하고 철학을 폐지시키는 사회는 거대 동물원으로 바뀔 것입니다. 인간은 땅에서 살지만 땅에만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머리는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발을 딛고 양쪽의 공기를 마셔야만 인간 특유의 모습을 지키고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바쁘셔도 “때때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를 드리셨기”(루가 5,16) 때문입니다.
그분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요한 8, 23). 그분이 이 아래 지상의 문제에 깊숙이 들어오셔서 그것을 뿌리에서부터 고쳐주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위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 바오로 사도가 사람들을 위해서 불속에 뛰어드는 것보다도 더한 열정으로 자신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신다”(필립 3,14)는 확신이 늘 가슴 속에서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루가 17,33). 이 말씀은 죽어서 천당 갈 때에만 써 먹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바로 그런 믿음을 실제 삶으로 옮기는 것일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는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고,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사도 4,34 참조). 그렇게 해서 요한 23세 교황님의 말씀대로, 참된 의미의 공산주의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신앙인들이 처음으로 실현했던 것입니다.

그런 정신이 없이 인간적 노력만으로 이상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사람들이 실제로 만들어낸 것은 거대한 감옥, 말 그대로, 철의 장막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 가장 큰 규모와 제일 철저한 이론 및 정치적 체제까지 갖추고 시도했던 실험이 낙원 대신 지옥을 만들고 말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르크스 공산주의 혁명은 그 실현 과정에서 수천만의 목숨을 무력으로 희생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혁명은 이와는 정 반대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혁명은 이후 2천 년 동안,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았고, 온갖 유혹 앞에서도 견디어낼 수 있었습니다. 특히 20세기에 인류는 마르크스 공산주의 실험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그 참됨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세계가 사실상 허물어진 오늘에 와서 인류는 다시 한 번 물질주의라는 황금송아지의 우상 숭배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념 사이의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자유, 정의, 인간 존엄성, 형제애 등 보편적인 가치나 대의가 사람들의 정신 속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같은 나라는 자유세계를 수호하고 종교를 포함한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지킨다는 대의를 위해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대단히 큰 희생을 무릅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념 대결이 끝나면서, 그런 생각은 대중의 마음속에서 급속히 사라지고, 오직 내 나라, 내 가족, 나 자신만 잘 먹고 살자는 생각 쪽으로 급속하게 기울어지는 것 같습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특정 후보가 나타나 외국인 유입을 차단하고, 전통적 우방국 지원을 중단하며, 자국의 직접적 이익만을 최고 가치로 추켜드는데, 그토록 많은 국민들이 그 노선에 열광하는 현상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은 오늘날 개인과 사회, 국제간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흐름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의, 진리, 형제애, 진선미 등, 이름을 무엇이라고 붙이든 초월적 가치나 대의를 잃어버릴 때,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는 오늘날 개인생활에서부터 국제관계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절실히 체험하고 있습니다.
   빵은 목숨만큼이나 중요하지만, 그것만을 절대 가치로 여기고, 그것을 부려먹는 대신 섬기고 숭배할 때, 인간 세상은 지옥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가 아무리 중요해도, 우리는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성서는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모두 한 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만 모든 사람은 서로를 형제로 인정하고 이기심을 뛰어넘어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에 따라 우리 하나하나와 인류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 창조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제대로 향유하며 기쁘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든지아니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말 그대로 헬 조선 곧 지옥을 향해 치닫는 길로 빠져들든지가  결정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모든 인간과 신앙인들을 대신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요한 6,68).  ​

 

각주)

1) 이 글은 2016년 4월 11일 오후 7시 30분 주교좌 중앙성당의 세월호 2주기 미사에서 행한
   강론 원고를 약간 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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