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54호(가을) 옛날 그 한 처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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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15 09:27 조회5,55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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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그 한 처음처럼
- 사제 성화의 날 미사 강론1) -
“내가 그대에게 안수했을 때에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주신 그 은총의 선물을 생생하게 간직하시오”(2디모 1,6).
이틀 전에 교구청에서는 직원 미사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 때 제 1독서에서 읽은 디모테오 후서 1장의 한 대목입니다. 죽음을 앞둔 바오로가 젊은 사목자 디모테오에게 주는 유언과 같은 당부입니다. 마침 그 전날 인천교구의 최기산 주교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있던 터라, 유언이라는 말이 더욱 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그 주교님이, 아니 저 자신이 죽었는데, 하느님께서 “5분만 다시 살려 줄 테니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고 오너라” 하고 말씀하신다면, 나는 과연 무슨 말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바오로 사도가 디모테오에게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하면 제일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날 미사의 강론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니 강론을 들었던 수녀님들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교님의 유언을 들은 것 같습니다.”
어제는 최기산 주교님의 장례 미사에 다녀왔습니다. 미사 내내 마지막에 남길 유언이 계속 머리에서 맴돌았습니다. 마지막 말, 유언 - 생각해보니, 사제 성화의 날에 이렇게 여러분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강론을 하는 것도 이번으로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미사가 저에게는 특별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이런 때,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과연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풀이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그대에게 안수했을 때에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주신 그 은총의 선물을 생생하게 간직하시오.” 저뿐 아니라 저의 선임자들에게서 안수를 받으신 분들에게도 의미는 마찬가지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사제 여러분!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필립 3,12) 첫 순간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첫 순간”, “처음처럼”, “한 처음”, 이런 표현들은 성서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우리가 방향을 잃지 않고 목표를 향해서 정확히 가게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줍니다. 저에게 첫 순간은 [소화 데레서 자서전]을 읽었던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어느 날, 그리고 학교 가는 것도 빼먹고 집 뒤 볏짚 더미 사이에 숨어서 [준주성범]을 읽었던 중학교 2학년 때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결정적인 날과 시간이 있습니다.
“그 한 처음의 마음, 그 감격, 그 놀라움, 그 기쁨, 그 떨림을 오래 간직할 수만 있다면” 이것은 모든 사람이 간절히 바라고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꿈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그야말로 꿈일 뿐, 매일의 현실은 거기에 비해 너무나 투박하고 지루하고 덤덤한 모습을 하고 나타나곤 합니다. 그렇게 되면 감동이 있던 자리에 습관, 기계적 반복이 들어서고 삶은 생기를 잃고 맙니다. 그런데 ‘자연은 진공眞空을 싫어한다’는 것은 자연과학의 세계에서만 통하는 진리가 아니고, 우리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서 진짜가 사라지면 그 대용품,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는 정반대의 것이 들어서기 마련임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참된 신이 떠난 곳에는 반드시 가짜 신, 우상이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은 물리 법칙만큼이나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계, 믿음의 세계에서 ‘혼’이 깃들어있지 않은 습관적 언행, 기계적 반복은 사소한 듯 보여도, 실제로는 가장 치명적인 증상일 수 있습니다. 세상 어디서나 어떤 시대에나 종교에 몸담은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처음의 감동을 잊어버리고 습관에 젖어 마침내는 그것을 하나의 직업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오 복음 23장은 그렇게 되어버린 종교인들이 결국 어떤 모습으로 고착되는지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들을 한데 모아놓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 이 눈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아라. 그래야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5-26). 요컨대 마음속에 하느님은 없고 종교는 겉시늉에만 남아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실현하여 바로 이런 사태를 바로잡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 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33). 우리 마음에 새겨주시는 하느님의 법에 관해서 오늘 우리가 들은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로마 5,5). 우리 믿는 이들이 습관성에서 벗어나 매일을 창조의 첫 날처럼, 매 순간을 창조의 첫 순간처럼 느끼고 점점 더 새로워지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성령입니다.
2014년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에서 반포한 [교회생활에서의 신앙 감각]이라는 문헌은 68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날을 주님의 목소리를 새롭게 듣는 날로 만드신다.” 이 문헌에서 우리는 보통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과 신앙 감각 사이의 근본적 차이 가운데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적 감각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무디어지는 데 반해서(Habitudo), 성령께서 주시는 신앙 감각(Habitus)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새롭고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각과 촉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아이스크림은 처음 먹을 때는 아주 산뜻하고 단맛이 크게 느껴지지만, 두 개, 세 개를 계속 먹으면 그 맛이 시들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 두 감각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차이는 육체적 감각은 자칫 우리를 묶어 자유를 점점 줄어들게 하는 데 비해, 성령이 주시는 신앙 감각은 우리를 점점 더 자유롭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술은 좋은 것이지만, 사람이 술을 마실 때 그 정도가 지나면, 그 때부터는 술이 술을 마시고, 마침내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말은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법을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주어 모든 사람을 습관적 겉치레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참된 백성으로,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그분의 자녀로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오신 대사제이십니다. 그런데 그 대사제께서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법을 새겨주시는 일은 그분 자신의 마음, 그 심장이 창으로 찔리는 아픔을 댓가로 지불하고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증언합니다. “군인 하나가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요한 19,34).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자 가장 가까이 따른 제자인 마리아도 마찬가지 길을 갈 것임을 시메온은 예언했습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루가 2,34-35).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인간의 아들로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신 대사제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사제들입니다. 그런데 대사제의 그 일은, 다시 반복하지만,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제인 우리는 참된 의미에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지금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체성사 곧 미사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금 여기’에서 재현하여 그 구원의 힘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을 다시 연결해 주고, 실패로 돌아간 첫 번째 창조를 대체하는 두 번째 창조이며,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대 역사를 완성시켜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빵을 당신의 몸으로, 포도주를 새로운 계약을 맺는 당신의 피로 주시면서 당신을 기억하여 해야 할 단 한 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고린 11,25: touto poieite...eis tenemen anamnesin; 루가 22,19-20 : 참조. 마태 26,26-28; 마르 14,22-24).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기억하여 해야 할 이 단 하나를 위해 사제로 불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단 하나로 하느님의 인류 구원이라는 원대한 꿈과 계획이 완성되었고, 이것은 세상 마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일, 아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일에서 시작된 하느님의 구원 사업, 성서 전체에서 펼쳐지는 그분의 일,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아들의 사명은 이 단 하나의 사건, 이 한 점에 모아져 완성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 Tetelestai”(요한 19,30). 이렇게 해서 어떤 성서학자(G. Reim)가 지적한 대로, “하느님께서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셨다 synetelesen’”(창세 2,2)고 할 때 쓰셨던 그 동사‘teleo’를 다시 씀으로써, 두 번째 창조가 완성되었음을 요한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 말씀과 함께 그분이 “숨을 건네주셨다paredoken to pneuma”고도 증언합니다.2) 여기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분의 ‘말씀’은 “숨을 건네주신” ‘일’과 정확히 상응하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해서 말씀과 일(사건)을 통해서 펼쳐 보이신 하느님의 계시 역사는 여기서 완성점에 이릅니다.
십자가 제사를 지금 여기서 현재화하는 성체성사는, 그래서, 성서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입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구약에서 신약, 특히 네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이 지점을 향해 전개되어 왔음이 분명해집니다. 그 가운에서도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그 점이 뚜렷했고, 특히 12장부터 17장까지는 십자가의 의미를 점점 더 확실히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에 이어 오실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더욱 확실하게 더욱 효과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게 될 시대를 약속하십니다. 아니, ‘함께’나 ‘곁에’가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 마칠 때까지 그들을 결코 떠나지 않고 구원활동을 계속하실 것임을 분명히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금 여기’에서 그 구원활동을 펼치시기 위해 동원하시는 사람이 바로 사제인 우리입니다. 요한 사도는 당신이 쓰신 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해주신 말씀과 일에 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enephusesen’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우리가 사제인 것은 십자가 희생 제사인 성체성사 곧 미사를 드리기 때문이고, 이 미사를 드릴 때마다 우주의 재창조, 인류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 계속됩니다. 사람들은 미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자를 만나 죄가 씻겨지고, 상처가 낫고, 죽음의 세력에서 풀려납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여러 면에서 태양과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 닿을 수 없을만큼 멀리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매 순간 그 태양의 온기와 빛에 싸여 살아간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또 그렇게 멀리 있는 태양이지만 우리가 렌즈를 통해서 그 빛을 한데 모으면, 태양을 닮은 불을 여기에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주신 모든 일이 아주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빵과 포도주에 집중해서 쏟아지면 그 작은 것이 무한하신 하느님을 통째로 담는 그릇이 되고, 하느님 아들의 몸과 피로 바꿔질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태양이 뜨는 곳을 기점으로 해야만 동서남북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듯이, 십자가라는 열쇠 혹은 기준이 있어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는 누구인지, 그분을 향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밝혀진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또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태양을 빵처럼 먹어야만 살 수 있듯이 우리도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7).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마태 4,4) 이런 말씀들에서 드러나듯이, 사제가 미사에서 말씀이라는 빵과 성찬이라는 빵을 사람들에게 건네줌으로써, 그들은 이 세상이라는 사막 길에서 지치지 않고 무사히 본 고향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바로 그 빵을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밀이 절구통에서 가루가 되어야 빵으로 만들어지고, 포도가 확에서 으깨져야 포도주가 되듯이,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비슷한 과정을 거쳐야만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빵과 포도주가 되어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 또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요한 12, 32). 이 모든 말씀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실 일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대사제인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바치신 제사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말라기가 상상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리를 잡고 앉아, 풀무질하여 은에서 쇠똥을 걸러 내듯, 레위 후손을 깨끗하게 만들리라. 그리하면 레위 후손은 순금이나 순은처럼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게 되리라.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치는 제물이 옛날 그 한 처음처럼 나에게 기쁨이 되리라“(말라기 3,3-4). 그리고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 바오로 사도와 똑같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와지고 있습니다”(2고린 4,16).
그렇게 되면 미사에서 사제의 작은 몸짓 하나, 말 한 마디, 발음 하나하나는 온 우주를 움직이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동원해 쓰시는 더없이 귀중하고 폭발적인 힘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의미와 기능에 상응한 긴장과 정신을 담고 있지 못하면, 그것은 우주 로켓과 같이 수많은 나사와 연결 고리로 돌아가는 복잡한 구조물에서 나사 하나가 풀린 것처럼, 모든 것이 의미를 잃고 말 위험이 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사제 여러분!
그동안 여러분의 노력과 정성으로 우리 교구는 성체성사 곧 미사 전례가 크게 활성화하고 신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성서봉독이 많이 개선되었고, 신부님들의 강론이 하느님 말씀을 생기 있게 전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신자들이 한 목소리로 활기차게 드리는 기도, 기도 중의 기도인 성가를 모두 함께 부르며 신앙의 기쁨을 드러내는 분위기가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 일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시내를 지나는데 젊은이들이 큰 떼를 이루어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요즈음 큰 말거리가 되고 있는 어떤 신흥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네 교회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른바 신흥종교에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 가지 의문은 우리에게 과제로 남아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무엇이 저렇게 많은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무엇이 부족하여 많은 경우 젊은이들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일까?”
다행히 본당에 따라서는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이 하나가 되어 활기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곳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본당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목자가 착한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잃은 양을 찾아가 데려오고, 건강한 양들을 훈련하여 동료들을 한 우리에 모아들이는 일꾼으로 양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단 한분의 참된 목자, 유일한 대사제,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제사를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드리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사제품을 받던 날 들은 말씀을 기억합시다.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읽고, 읽은 것을 믿고, 믿은 것을 가르치며,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십시오.” 우리가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면, 우리는 사도 요한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느꼈던 그 같은 기쁨을 가슴 가득히 느끼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이 글을 써 보냅니다”(1요한 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