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

Home > 글모음 > 글모음

SNS 공유하기

7호-2004 겨울 사목자는 그 사목직수행을 통해 성화된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12-26 00:00 조회3,260회 댓글0건

본문

이 글은 이병호주교님께서 지난 10월 29일 부터 정하상 교육관에서 가진 2004년도 교구사제단 피정후 가진 파견미사 강론임.

 

 

철없는 처녀 결혼 후 어진 어머니로

 

친애하는 형제 사제 여러분, 우리는 바쁘고 피로한 사목생활의 현장을 떠나 잠시 좋은 분위기에서 지도 신부님의 훌륭한 강론을 들어가며 몸과 마음을 푹 쉬고 새로운 활력을 얻어 주님께서 보내시는 사목 현장으로 다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피정을 위해 희생적으로 봉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피정 강론을 담당해 주신 최신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기회가 되니, 저 자신이 지난 2월에 마카오에서 했던 피정이 새삼 생각납니다. 그때 피정을 지도해 주신 분은 예수회 미국인이신 폴 쵸피 신부님이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생애에서 저의 기억에뿐 아니라 삶에서도 가장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피정이었는데 약 5년 전에 같은 신부님의 지도하에 태국에서 한 번 피정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 저에게는 사실상 그분과 함께 한 두 번째 피정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을 찔러 보시는 그 분의 깊은 혜안과 영성,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화신과도 같이 신념과 열정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그 신부님을 만난 것은 저에게 큰 은총이었습니다.

 

피정을 마치고 이제 사목 현장으로 파견되시는 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이 자리에 서니 그분의 말씀 가운데 한 마디가 특히 새롭게 떠오릅니다. “사목자는 그 사목직 수행을 통해서 성화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깊은 울림으로 저에게 들렸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맨 먼저 떠오른 영상은 한 처녀가 어머니로 되어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철없던 처녀가 결혼하여 아기를 낳고 기르는 과정이 생각난 것입니다. 결혼 할 때까지도 몰랐지만 이제 아기를 낳을 때가 되자 자신의 몸이 파열되는 아픔과 함께 한 생명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함으로써 한 젊은 여인은 엄마로 변합니다. 그리고 새 생명의 요구에 절대 복종하며, 젖을 주고 배설물을 치우고 씻어주며, 아프면 끌어안고 밤을 새우고 하면서, 한 처녀가 속 깊고 어진 어머니로 되어 가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직은 신중한 선택과 훈련 필수

 

저는 어디에서 무슨 기회에 강론을 하든지, 그날 미사의 성서 구절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오늘 우리가 방금 들은 성서 말씀들도 꼭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를 위해 일부러 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필립비서는 바오로 사도가 누구를 상대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지를 분명히 하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오로와 디모테오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필립비의 모든 성도들과 교회 지도자들과 그 보조자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1,1).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 표현 속에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신앙 전체가 요약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이, 온 인류가 기다리던 그 인물이다. 인류가 빠져서 제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곤경으로부터 그들을 건져올릴 수 있는 분, 그럴만한 능력을 태워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바로 그분이라는 믿음이 이 한 마디 속에 응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목에서 체험한 그 유명한 사건(사도 9,1-19)을 통해 바오로는 나자렛 사람 예수가 바로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해서 그리스챤을 사로잡기 위해서 출발한 길에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몸이 되어, 오늘 우리가 방금 들은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 되어 삶의 끝까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불꽃과 같은 열정으로 그분만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오로가 필립비의 모든 “성도들과 교회 지도자들과 그 보조자들”을 상대로 한 편지에서 자신의 간절한 기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어 점점 더 풍성해져서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1,9-10).

 

<가장 옳은 것>. 메시아,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는 이것을 위해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열두 사도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도들을 뽑으실때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우리는 어제 미사의 복음(루가 6,12-19)에서 들었습니다. “그 무렵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루가 6,12-13).

 

<가장 옳은 것, 혹은 가장 좋은 일>에 온 몸을 바치게 될 사도들을 뽑으실 때, 예수께서는 밤을 꼬박 세워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신 끝에 특별히 불러 세우고도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을 늘 데리고 사시면서 고도의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사도직이 얼마나 신중한 선택과 훈련을 필요로 하는지는 결과를 보면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공을 들이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선택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너희 열 둘은 내가 뽑은 사람들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이다”(요한 6,70). 이 사실은 사도직에 뽑혔다는 일이 인간으로서 얼마나 큰 은총인가 하는 점과 함께 당사자에게 얼마나 엄숙한 과제인지를 동시에 깨우쳐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 뽑을 때 예수님 밤새워 기도

 

 

우리는 모두 사도들의 뒤를 잇는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큰 은총을 입고 있는 사람들 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선택하신 것은 그분의 가치서열에서 1번을 수행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 할 일이 많고 좋은 직업도 많지만, 우리는 농사, 사업, 장사, 정치, 학문등 사람들이 보통 종사하는 그 어떤 일을 위해서 불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것들도 다 좋고 옳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보시기에 그런 것들은 우선 순위에서 최상은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분야라면 예수께서 구태여 밤을 새워 기도까지 하시며 선택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 알아서 먹고 살 길을 찾아가게 그냥 내 버려 두어도, 사람들이 찾아간 뒤에 보면 누구는 농사를 짓고, 누구는 장사를 하고, 누구는 학문을 하고, 누구는 정치를 하고 있다고 해도 일단은 말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에 그런 식으로 내버려두어 가지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세상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다른 직업은 다 취미나 먹고 살 방도로 선택하는 것인데 이 일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도대체 인기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집 공고를 한번 정면으로 대하며 생각해 봅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6,24-25)

 

“사람이란 제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내놓지 못할 것이 없는 법입니다.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뼈와 살을 쳐보십시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욥2,4-5). 의인 욥을 두고 하느님과 사탄 사이에 벌어진 한판 대결에서 제1회전을 완전히 패배하고서도 사탄이 물러나지 않고 최후의 카드로 들고 나온 논리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 목숨은 최고이자 최후의 가치이기 때문에, 그것을 희생시켜 얻어야할 만큼 더욱 귀중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숨을 내놓고 달려들 사람을 찾는다니 누가 그 모집광고에 응모하겠습니까? 당연히 아무도 없지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설마 거기까지야 갈라고?” 이런 생각으로 달라 들었던 사람들도 스승이 정말 그런 길로 가는 것이 확실해지자 모두들 도망쳐 버리지 않았습니까? 일이 그렇게 될 것을 빤히 내다보시는 분으로서 바로 그런 일을 위해 동원할 사람을 뽑는데 어찌 진땀이 나지 않겠습니까? 어찌 밤을 새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제일 중요한 것, 제일 옳은 것, 제일 가치 있는 것을 버려 두고, 틀림없이 좋고 중요하기는 하지만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로 밖에 좋고 중요한 것이 아닌 일에 곁눈질을 하는 사태가 발생하지나 않을까? 이 사람들이 끝까지 제일 좋은 일에 대한 신념을 지키고 남들에게도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온몸으로 외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남기신 유산

 

예수님의 진땀나는 고민이 얼마나 현실적인 것이었는지를 우리는 그 후 일담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깊은 숙고와 간절한 기도 후에 선택한 12명의 최 측근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하나가 실패작으로 끝나버린 일 때문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하신 마지막 저녁에 “몹시 번민하셨다” (요한 13,21)고 복음사가는 전합니다. 실패작으로 끝난 제자 때문에 그분이 겪으신 이 극심한 번민은 그를 포함한 다른 제자들을 뽑으실 때 예수께서 밤을 새우시며 들였던 공과 함께, 당신의 사명을 이어 수행할 사도들이 그분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면서 남기신 단 하나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당신의 가르침과 정신을 충실히 이어간다면 당신께서는 세상을 떠나셔도 아쉬울 것이 전혀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정신으로 불타서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21) 하고 자신 있게 외치는 바오로 사도가 이제 자기의 뒤를 이어 사도직의 맥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기원이 “여러분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어 점점 더 풍성해져서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게 되는 것”(필립 1,9-10)이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이 우주 안에서 가장 고급의 에너지, 신과 인간이 공유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동력은 정확한 방향을 향해 쏟아 부어질 때에만 본래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점점 더 풍성해집니다. 그 힘이 정확한 방향을 찾지 못한 채 쏟아지면, 마치 큰 모터를 장착한 자동차가 갑자기 핸들이 고장나 수백 길 낭떠러지에 떨어지거나 장애물에 부딪치는 것처럼, 한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에게는 그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해서 쏟아 부어야 할 사랑의 방향을 정확히 가릴 수 있는 ‘참된 지식과 분별력’, 하느님 아버지의 눈으로 보는 새로운 감각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루가 14,1-)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점에서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지 못해 헤매고 있는 율법교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다면 안식일이라고 당장 구해내지 않고 내버려두겠느냐?”(루가 14,5)

 

그냥 어떤 사람이나 그냥 어떤 소가 아니라 “자기” 아들이나 “자기” 소가 우물에 빠졌다면 하고 물으십니다.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팔짱끼고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제 목숨을 걸고라도 당장 구해내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기에 이런 상황 속에 놓인 것은 몇몇 개인이나 특별한 집단만이 아닙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이 그런 지경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모두가 ‘내’ 아들딸, ‘내’형제자매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객관적으로 그들이 ‘내’ 형제자매라 해도 내가 실제로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남 바라보듯 할 수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류 최초의 존속살해 사건을 소개하는 장면에 하느님과 카인의 대화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동생을 죽여버린 카인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물으시자 살인자는 대답합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의 형제가 되기 위해서 오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이었지만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요한 17,6). “제가 이 사람들을 맡았습니다. 이 사람들을 지킬 의무가 제게 있습니다.”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목자 직무에 충실땐 성덕에 도달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사람들을 구해 내고 그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우리 사목자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는 사람들이 어떤 우물에 빠져 있는지, 그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를 볼 수 있는 감각, 참된 지식, 분별력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내가 바로 그들을 구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하는 의식이 늘 살아 있어야 하겠습니다.

 

철없던 아가씨가 아기를 낳아 온갖 정성과 희생으로 기르면서 어질고 원숙한 어머니가 되듯이, 우리도 이런 의식을 가지고 사목자로서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우리는 성덕에 이릅니다.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마르 6,31)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며칠 동안 몸과 마음의 휴식을 취하고, 이제 다시 주님께서 보내시는 일터로 떠날 시간입니다. 몇몇 신부님들께서는 사목 일선에서 누적된 피로 때문에 피정 기간의 처음 이틀 동안에는 잠만 푹 주무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돌아갈 사목 현장은 다시 우리를 참으로 피곤하게 할 것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 보살펴야 할 사람들, 처리해야 할 일들, 예상치도 못하던 중에 터지는 사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의 발에 “짓밟힐 정도로”(루가 12,1참조) 많은 군중 속에 휩싸여 사셨고, 때로는 “음식을 드실 겨를도 없을”(마르 3,20참조) 만큼 바쁘셨습니다. 그러나 쵸피 신부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이처럼 바쁘고 피곤한 사목생활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게 되고 더욱 성숙한 사제로서의 모습을 갖추어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약속을 믿고 주님께서 보내시는 일터로 돌아갑시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 주소: 전북 전주시 완산구 기린대로 100 우편번호 : 55036
  • 대표전화: 063-230-1004 | 팩스: 063-230-1175 | 이메일: catholic114@hanmail.net
  • copyright 2015 천주교 전주교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