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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55호(겨울호) 함께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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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15 09:30 조회3,4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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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는 길
- 프라도 사제회 유승현 마리오 신부 유기서약 미사 강론1) -

 

 

오늘 유승현 마리오 신부님께서 프라도 사제회원으로서 유기서약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양성을 맡아 주신 프라도 사제회 모든 신부님들께 감사드리고, 유 신부님께 큰 축하를 드립니다. 저는 유 신부님께서 이 시간을 위해 작성하신 서약청원서를 읽으며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신학생으로서 사제직을 준비하던 시절에 이 좋은 정신을 만나 훌륭한 선배 신부님들과 후배들까지 함께 걸어오신 이 길이 사제생활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고 본래의 방향을 향해 꿋꿋이 전진하게 했는지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유승현 신부님의 청원서 일부를 함께 들어봅시다.
“처음 단계에서 저는 프라도 정신을 알기보다는 함께 모여 복음을 연구하고 생활 나눔을 하는 것이 좋아서 모였고, 함께 한다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 이 모임에 마음을 두고 계속해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프라도에 대한 마음이 쌓여갔습니다.

   양성기간에 발견한 프라도 카리스마 중에서는 내어줌과 형제애가 가장 크게 남습니다. 양성을 받는 2년 동안 프라도 모임이 제 삶을 너무 방해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양성 모임과 팀 모임, 그리고 방학 때면 신학생들과의 만남, 양성모임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대전을 찾아야 하고, 교구의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할 때 마음에 생기는 부담감과 미안함은 프라도에 대한 회의로까지 번지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양성을 마치며 했던 피정 가운데 ‘팀 회합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시간을 내어놓고, 나누는 삶’이라는 내용에 프라도의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프라도의 카리스마는 복음연구와 형제애에만 머물면서 내어주기 보다는 항상 뭔가를 얻으려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팀 회합을 비롯한 프라도의 매력은 내어주는 연습이고 실천이라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프라도의 카리스마, 매력에 빠져들게 됩니다.
  
지금까지 발견한 프라도 카리스마를 살고자 하는 원의는 예수님의 참다운 제자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신부님들이 각자의 다짐과 노력으로 너무 훌륭히 살아가십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혼자 살아간다는 것, 혼자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함께 걸어갈 도반들, 목표를 재설정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같이 나누고 만나는 신부님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의 작은 도움도 받아주고 기꺼이 안아줄 동료들이 있어야, 참다운 사제의 길을 걸을 수 있기에 프라도의 카리스마를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나 복음을 벗어난 강론이 아닌,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복음 안에서 연구하고 묵상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사제의 삶을 지향하면서 복음연구를 붙잡고 살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성체조배와 성사생활,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에 순명하며 살자고 다독이는 프라도의 카리스마에 함께 동참하고 싶습니다. 순명해야 가난할 수 있고, 내어줄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기에 사제직에 붙어있는 순명의 삶을 프라도 사제회의 모범과 형제애 속에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프라도 사제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프라도 사제회의 향기를 제 삶에 묻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어디를 가는가, 누구와 있는가에 따라 냄새가 몸에 묻어납니다. 물론 속과 다른 향기를 묻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자주 긍정적인 기운과 향기를 통해 제 내면의 모습도 변화되고 합당해지기 위해 노력하고자 합니다. 신부님들의 나눔과 삶의 모습을 통해 자극받고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함께 걷고 싶습니다.”
<유승현 마리오 신부 프라도 서약청원서 내용 중에서>
그렇습니다. 혼자 살아간다는 것, 혼자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쉬울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성서가, 하느님 말씀이, 삼위일체를 믿는 우리의 신앙이 틀렸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다음 “좋다, 참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단 한 번 “좋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담 곧 인간을 만드신 다음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 자신이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가족-공동체이시고, 사람이 그분의 모습을 원형으로 해서 창조된 존재임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혼자 사는 것은 곧 인간성을 잃어가는 일이고 자기실현을 포기하는 것이며,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는 일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 이야기의 다음 대목에서 전개되는 타락 이야기가 잘 알려주듯이, 하느님의 말씀 대신 악마의 말을 들어서 고장 난 인간성을 지니고 있는 우리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기나 복음을 벗어난 강론이 아닌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복음 안에서 연구하고 묵상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사제의 삶을 지향하면서 복음연구를 붙잡고” 살지 않으면, 주님께서 불러주신 길을 제대로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은 하느님과 그 반대 세력이 서로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벌이는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내 안에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양심, 사람들의 목소리나 인기에 영합하려는 고장 난 나, 이렇게 둘이 대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양심의 소리에 “몹시 괴로워했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이어서” 양심의 소리를 따르지 못하고,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요한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사명을 받은 예언자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유다의 임금이나 고관들, 사제들이나 지방 유지들과 함께 온 나라가 달려들어도 내가 오늘 너를 단단히 방비된 성처럼, 쇠기둥, 놋담처럼 세우리니, 아무리 덤벼도 너를 당하지 못하리라. 내가 네 옆에 있어 도와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독일 나찌 시대에 전국 개신교 연합체가 히틀러를 메시아로 추앙하고 그에게 절대 복종할 것을 맹세하고 있을 때, 분연히 일어나 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참 메시아로 고백하여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본회퍼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의미의 두 사람을 체험하고, 감옥에서 우리가 잘 아는 글을 남겼습니다.

-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내가 감방에서 나오는 모습이
마치 영주가 자기 성에서 나오는 것처럼
당당하고, 활기차고, 의젓하다고들 말하는데.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간수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보면
명령하고 지휘하는 것이 오히려 내 쪽인 것처럼 느껴진다고들 하는데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이 불행한 나날을 견디어내는 나의 모습이
침착하고,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으며, 신념에 차 있어서
마치 개선장군처럼 보인다고들 하는데.

나는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인간일까?
아니면, 나만이 아는 내 모습이 정말 나일까?
새장 속에 갇힌 한 마리 새처럼 불안하고,
사람들을 그리워하다 병들고,
누가 목을 조르기라도 하듯이 숨이 막혀 몸부림치고,
아름다움 색, 꽃, 새소리에 목말라하고,
부드러운 말과 인간적 위로에 갈증을 느끼며,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거나 조금만 모욕을 해도 온 몸을 부르르 떨고,
큼직한 일이 일어나주기를 바라는 기대에 사로잡히며,
저 멀리에 있는 친구들을 그리워하다 낙심하고,
기도, 사색, 창작마저 다 부질없게 느껴질 만큼 지치고 허탈감에 빠지며,
의기소침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에 휘말리기도 한다.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일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오늘은 이런 인간이고 내일은 저런 인간일까?
이 둘이 동시에 나일까?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 앞에서는 경멸할 수 밖에 없는 한낱 가련한 인간일까?
아니면, 아직 내 속에 있는 것은
이미 패배한 전쟁에서
뿔뿔이 흩어져 퇴각하는 패잔병에 불과할까?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일까?
내가 어떤 인간이든,
오, 신이시여! 당신은 나를 아시옵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
이런 자기 고백의 역사에서 맨 앞줄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 하나는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 나오는 그분의 부르짖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신앙인, 아니 하늘을 향한 향수를 병처럼 앓고 있는 모든 인간들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바오로 사도의 이 절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이방인의 사도는 바로 이어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다음 장인 로마서 8장에서는 이 마지막 고백을 자세히 펼치며, 하느님의 힘이 자기 안에서 이루어내신 승리를 목청껏 외칩니다.
   우리는 여기서 천지창조 이래 지혜롭다는 사람들,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흔히 놓치고 있는 진리 하나를 발견합니다. 바오로가 자기 안에서 선과 악의 세력이 대결해서 싸우고 있는 전쟁을 체험하며 절망하고 있는 동안, 그는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일인칭 단수를 써서 “나”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것은 ‘나’, 단독자를 둘러싸고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구해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부터는 그렇게 고백하는 주체가 더 이상 ‘나’가 아니고 ‘우리’가 됩니다. 그리고는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신다”는 사실을 더욱 자세히 설명하는 8장에서는 줄곧 “우리”가 주어가 됩니다. 이 대목에서 단 한 번 나오는 ‘나’가 나오는데 거기서 바오로는 “나는 확신합니다.”하고 말합니다. ‘우리’ 속에서 이제 ‘나’는 한 위격person으로서의 자기를 비로소 되찾아 위격이신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세 위격이 하나를 이룬 삼위일체 하느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이 인간의 원형임을 우리는 성서에서 배웠습니다.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하느님께서도 여기서 이미 자신을 “우리”라고 지칭하십니다. 사람은 ‘우리’가 되지 않으면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마침내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게 됩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신앙인들의 공동생활’이라는 논문을 써서 당대 신학자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서 있기 위해서도 ‘우리’여야 한다면, 하느님을 향해 가는 나그넷길에서 시류를 거슬러가고 온갖 반대 세력과 전쟁을 벌여야 하는 신앙인에게, 혼자 그 길을 간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제는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독신으로 사는 노총각이 아닙니다. 사제는 가족을 가진 아버지입니다. 사제는 교회와 결혼하여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영적 자녀를 거느린 가장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자신들의 삶이 정확히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르 10,29-30). 작은 가정을 포기하면  현세에서도 교회라는 큰 가정의 일원이 되고, 내세에서는 하느님의 가족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지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필립 3,8). 이렇게 말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덕분에 내면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 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 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 받습니다"라는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1-39).

우리는 “재미있는 이야기나 복음을 벗어난 강론”에 시간을 보내도 좋을 만큼 한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 마라”(루가 10,4)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채근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칼인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악마의 세력과 대결하는 전쟁 중에 있습니다(에페 6,10-17 참조). 그리고 우리는 이 투쟁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전장에 설치된 야전병원의 의사들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유승현 신부님과 프라도 사제회 모든 신부님들, 나아가 다른 모든 사제들이 형제 사제들과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이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형제들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앙인들까지 함께하는 공동체를 상기시키며 들려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늘 마음에 새기고 살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간구합시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죄인들에게서 이렇듯 심한 미움을 받으시고도 참아 내신 그분을 생각해 보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지치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히브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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