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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제89호(여름) 신앙의 오솔길

본문

V. 서간과 복음

    하느님의 빛 : 성경 독서

 

로마노 과르디니 지음

김선태 주교 옮김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1요한 1,5)

 

느헤미야서는 유다인 백성이 오랫동안 힘든 유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재건에 몰두하는 모습을 전해줍니다. 그들은 작업 책임자들의 인도를 받아 불탄 성벽과 무너진 집들을 다시 세우고, 하느님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그 재건 활동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 백성에게는, 그리고 재건되는 그 도시에는 이른바 영靈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랜 유배로 말미암아 무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곧 하느님과 그분의 거룩한 가르침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환난을 통해 무관심하게 되었고, 무기력하게 되었고, 온통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우리에게 그들이 빛과 힘의 원천에 이르는 길을 찾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어느 날 백성이 일제히 성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학자 에즈라에게 율법서를 가져와 회중들 앞에서 읽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에즈라는 나무로 만든 단 위에 서서 백성이 보는 앞에서 율법서를 폈습니다. 그가 율법서를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섰습니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아멘’ 하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서를 읽어주었습니다. 그는 글자 그대로 율법서를 ‘분명하고 큰 소리로’ 읽었고, 읽어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말씀은 청중의 영혼에까지 파고 들어가 그들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온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울었습니다”(느헤 8,9 참조).

이후부터 그들은 늘 다시 함께 모였고, 듣는 것을 몹시 선호했고, 또한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에서 찾았습니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이 그들 자신을 지켜주고 독립된 백성으로 다시 결집시키는 외적인 띠였다면, 성경 말씀은 그들 영혼의 버팀목이며 그들을 다시 하느님의 백성으로 묶어주는 띠였던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큰 영향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어떤 연설이 아닙니다. 인간의 연설에는 인간의 힘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밑바닥부터 새롭게 하거나 재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에는 빛과 권능과 위로가 가득합니다. 마음을 열고 성경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깨우침을 받고 고양될 것입니다. 시편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 … 당신의 말씀이 열리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이들을 깨우쳐 줍니다.”(시편 119,105.130) 그러기에 구약에서는 공동으로 예배를 거행할 때 항상 성경을 봉독하였습니다. 모든 안식일마다 성경은 낭독되었고, 낭독된 것은 설명해 줌으로써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했습니다. 성경은 해석되어 일상생활에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구세주께서 이러한 일에 얼마나 자주 참여하셨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친히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셨고, 그 말씀을 청중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구약이 그렇게 실행했던 것처럼, 그리고 구세주께서도 이를 인정하신 것처럼, 교회도 이를 계속 이행합니다. 교회는 참된 제물을 바치기 전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발췌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가장 먼저, 이른바 서간이 봉독됩니다. 서간은 편지를 의미합니다. 이 첫 독서를 서간이라고 부르는데, 무엇보다 사도들의 편지에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계속하여 구약성경에서 말씀을 선택하거나 어떤 주교가 해당 공동체에 쓴 편지, 순교자의 축일에는 그 순교자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기사를 낭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가대석 앞, 곧 영성체를 하는 장궤석 앞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에는 일종의 독서대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독서자는 해당 부분을 읽었고 모든 회중은 앉아서 경청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독서자는, 오늘날 장엄미사에서 하듯이, 미사를 주례하는 사제에게 가서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은 독서자가 독서 때에 있었던 실수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하는 의미입니다.

서간 후에 즉시 복음이 이어집니다. 매일 혹은 일요일에 네 복음서의 말씀을 순차적으로 봉독하였습니다. 나중에 주일과 축일에는 일정한 부분을 선택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전례 복음서가 생겼습니다.

특히 복음은 가장 깊은 경외심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영원한 말씀이신 우리 주님의 생애를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호화롭고 화려하게 장식되었습니다. 복음을 아름다운 양피지에 값비싼 잉크로 기록하였고 또한 그림으로 장식했습니다. 복음서의 표지는 가끔 상아 혹은 은과 금 등의 화려한 재료를 사용하여 예술품으로 장식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주님 자체를 그대로 대리하는 존재로 간주했습니다. 대축일에는 성경을 하루 종일 제대 위에 모셔두었습니다. 교우들은 복음서를 높이 받들어 행렬에 참여했고, 복음서에 분향함으로써 경외를 표했습니다. 우리는 주교들 전체 모임에서 복음서가 그 한 중심의 높은 자리에 모셔졌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복음서를 그만큼 소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읽거나 노래하는 것은 가장 영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 영예는 사제와 부제에게 주어졌습니다. 이전에는 독일 황제들이 곧 당시 그리스도교 세계의 첫 번째 영주들이 복음을 읽었는데, 이는 매우 소중한 특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복음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이 봉독될 때, 모든 사람은 머리를 숙였습니다. 

주교는 주교관을 벗고, 거기에 참석한 황제나 임금은 자신의 왕관을 벗었습니다. 오늘날 모든 회중은, 사제가 “…가 전한 복음입니다.” 하고 말하기 전에, 복음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이마에, 입술에, 가슴에 십자가를 긋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우리 구세주의 삶과 고난에 대해 전해주는 거룩한 네 복음서 안에서 그분은 특히 거룩하고 완전한 방식으로 현존하시고 행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모든 거룩한 미사성제를 드릴 때마다 늘 다시 성경을 가까이합니다. 교회는 성경에서 일정한 부분, 특히 중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우리에게 낭독함으로써, 우리가 스스로 성경을 펴 들고 읽기를 권고합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 영혼에 필요한 것 곧 빛과 힘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빛과 진리, 우리 영혼은 바로 이것을 갈망합니다. 아이가 조금 자라기도 전에 “이것이 무엇인가? 왜 그런가?”하고 묻습니다. 어린 영혼은 활기를 띠면서 빛을 향해, 진리를 향해 손을 뻗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성장할수록 그만큼 빛과 진리를 더 원하게 됩니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찾고 묻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관찰하고, 생각하고, 숙고하고, 묻고, 진리를 찾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여기에서 평온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가 그렇게 자신의 이성을 통해 찾은 진리는 항상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질문 하나가 해결되자마자 열 가지 질문이 또 생겨납니다. 

인간은 목표에 달성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목표는 곧바로 그를 더 앞으로 나가게 합니다. 그가 찾은 진리는 공허하고 궁합니다. 그 진리는 그의 이성을 거의 만족시키지 못하고, 따라서 그의 마음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마음은 더 많은 것을 바랍니다.

마음은 궁극적인 진리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이후에 다른 수천 가지 의문이 숨어 있지 않은 진리를 원합니다. 평화를 주고 영혼을 새로운 탐구로 재촉하지 않는 진리,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진리를 원합니다.

그런 진리를 인간은 원합니다. 하지만 교우 여러분, 바로 이것이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찾는 무한한 진리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영혼이 갈망하는 빛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빛이십니다.” 하고 성 요한은 말합니다.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1요한 1,5)

“하느님은 빛이십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찬란한 여름의 어떤 날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태양으로부터 찬란한 빛이 내렸습니다. 태양의 빛이 어디에나 미쳤습니다. 모든 것이 반짝였습니다. 모든 것이 따뜻해지고, 살아 있었고, 빛났고,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온전한 빛, 찬란한 광채와 열과 생명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모든 것에 스며 계십니다. 그분 앞에서 감출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그 심연에까지 들여다보십니다. 그분에게는 의심이 없으며, 무지와 불명료함이 없습니다. 그분에게 모든 것은 밝고 명확하며, 그분은 빛 자체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갈망합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빛이 떠오를 때 비로소 우리의 영혼은 만족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죽음 이후까지 기다리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이 지상에서도 하느님의 복된 찬란한 빛이 우리 마음을 어루만지고 밝고 따뜻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전령 곧 예언자들과 사도를 파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친히 예수님 안에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말씀이 모든 인간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멀리 있는 사람에게나 나중에 태어나는 사람에게도 도달할 수 있도록, 그분은 말씀 가운데 많은 부분이 기록되게 하셨습니다. 이를 실행한 사람들을 그분은 친히 밝혀주시고 이끄시어, 그들이 당신의 의도에 따라 정확하게 행동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 곧 성경이 생겼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지 인간의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계시하셨던 영원한 진리에 관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오직 이 진리만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따라서 모든 말씀은 빛나고 또한 밝히는 빛입니다. 모든 말씀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밝혀주며, 그 사람을 일으켜주고, 굳건하게 하고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성경에는 아름다운 대목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벳사이다로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분은 눈먼 이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주님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모습과 그런 소란을 좋아하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분은 눈에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앞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주님은 다시 한번 그의 눈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습니다(마르 8,22 이하).

빛의 물결이 그의 가장 깊은 내면에 밀려 들어왔을 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그를 둘러싼 어둠 속에서 갑자기 빛이 쏟아졌을 때, 그는 색깔과 형상과 함께 사물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삶이 그에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대의 몸이 밝아졌고,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어둡지 않습니다. 마치 번개가 그대를 비춘 것처럼 그대의 영혼도 밝아졌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 눈먼 이는 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있는 그대로, 곧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있다가 빛이 빛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이제 영혼에도 빛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얼굴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빛나는 눈의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이렇게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빛입니다. 여기 내 앞에 있는 빛입니다. 태양이 내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주님, 당신은 내 영혼의 빛이십니다. 당신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이어서 그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보다 수천 배 밝은 세상으로서 바로 예수님, 그분의 진리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애제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1요한 1,5) 그분 곁에 머물며 그분을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영혼에는 모든 사람을 비추기 위해 오신 빛이 빛날 것입니다. 그 빛은 이미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요한 8,12; 1,9 참조).

 

사랑하는 여러분, 그 눈먼 이에게서처럼 우리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눈이 멀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빛이시며 어둠이 없는 그분께’(1요한 1,5 참조), 예수님께, 하느님께 다가서야 합니다. 그분의 빛나는 말씀이 우리를 위해 보존된 곳으로 나갑시다. 그리고 그 말씀을 우리 영혼에 받아들입시다. 그러면 말씀이 우리를 밝힐 것입니다.

 

성경을 읽읍시다. 거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기꺼이, 천천히, 생각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읽읍시다. 그리고 우리의 곤경을 말씀에 내맡깁시다. 우리에게 떠오르는 질문, 우리를 짓누르는 걱정 등을 말씀에 내맡깁시다. 우리는 대답을 얻을 것이고, 성경에서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교회 공동체 소식지나 좋은 책을 들고 주일마다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공동체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혹은 신약성경을 구입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늘 한 대목을 주의 깊게 읽으십시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하고, 여러분이 앞에 계신 주님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놔두고 앞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다른 기회에 더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혹은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거룩한 성경은 여러분에게 빛과 위로, 힘과 따뜻한 마음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