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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제91호(겨울) 신앙의 오솔길

본문

VII. 감사송

거룩하신 하느님 : 양심

 

로마노 과르디니 지음

김선태 주교 옮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라”(레위 11,44).

 

예물준비를 마치면 모든 교우는 사제와 함께 기도를 바칩니다. 곧 하느님께서 예물과 마음을 당신의 존엄하신 영광을 위해 받아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제는 낮은 목소리로 예물기도를 바치고 나서 큰 소리나 노래로 “…비나이다 <혹은> …다스리시나이다.” 하고 마무리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아멘” 하고 응답합니다.

이어서 사제는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전능하신 아버지, …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하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감사송입니다. 감사송으로 카논Kanon, 곧 미사 거행 전체의 중심이며 정점인 감사 기도가 시작됩니다. 이 감사송은 장엄한 문과 같은데, 이 문을 통하여 회중은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이전에는 감사송의 수가 많았습니다. 300개가 족히 넘었습니다. 축일마다 그리고 매일 고유한 감사송이 있었습니다. 감사송은 해당 축일의 신비를 기렸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갈수록 감사송의 수가 줄었는데, 약 600년 전에는 열한 개의 감사송만 남게 되었습니다. 지난 세기(1900년대)에 이르러 교황은 새로운 감사송을 승인하였습니다. 성 요셉 축일 감사송, 위령미사 감사송, 그리스도왕 대축일 감사송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공통 감사송과 통상적인 축일의 감사송으로 기도합니다. 말하자면 성탄 감사송, 주님 공현 감사송, 사순 감사송과 수난 감사송, 부활 감사송, 성령강림 감사송, 하느님의 어머니 감사송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감사송에는 해당 축일이나 해당 시기의 신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감사송은 ‘거룩하시다’를 세 번 바침으로써 끝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감사송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송이 무한하신 하느님의 존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해를 초월하시는 무한하시고,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시며, 우리 인간은 그분 앞에 몸을 낮춥니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여러분은 이 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아주 먼 옛날부터 울려 퍼졌는데, 그 말을 기록한 이사야 예언자가 살았던 때도 벌써 2500년 이상이 지났습니다. 

이사야 예언서 6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미사가 바쳐지는 하느님은 ‘세 번이나 거룩하신 분’으로 칭송되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거룩하십니다. 세 번이나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온전히 거룩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에게는 흠이 없습니다. 악한 생각도 없고, 가장 희미한 저속한 동요도 없습니다. 그분의 생각과 업적 그리고 그분 존재 전체는 형언할 수 없이 순수합니다. 그분은 당신 본질의 온전한 권능으로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분은 죄악을 마치 원수를 대하듯 초조로 미워하시거나 격정으로 증오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죄악을 당신의 무한히 숭고하고 임금 다운 평온함으로 죄악을 미워하십니다. 모든 악은 그분에게 다가설 수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 본질의 가장 깊은 뿌리에까지 정말 온전히 완전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우리 인간과는 완전히 다르십니다. 인간에 대해서는, 그가 도덕적 계명을 잘 지키면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유효한 계명을 잘 따르면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떤 법에 순종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계명에 복종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친히 최상의 계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계명이 갑자기 살아나서 이해력과 의지를 갖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 존재는 틀림없이 진실 그 자체이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이 바로 그러하신 분입니다. 생생한 진실 그 자체와 생생한 자비와 신실과 인내, 온유와 감격, 선하고 영광스러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은 말하자면 도덕법에서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하느님은 계명에 복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친히 그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을 언급하기 위해, 우리는 ‘그분은 거룩하시다.’, 곧 세 번이나 ‘거룩하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형언할 수 없이 거룩하신 하느님은 완전한 모습으로 천상 옥좌에 앉아계시지도 않고, 여기 지상에 있는 우리 인간이 원하는 바를 마음대로 하게 하여 인간을 비천함과 죄악 속으로 타락하게 놔두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 또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십니다. 당신을 닮으라고, 당신을 본받으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일전에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그러기에 그분은 당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을 닮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일전에 시나이산에서 당신의 계명을 주실 때 그렇게 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이는 마치 그분이 “너희는 나를 바라보아라. 나는 하느님, 거룩한 존재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이후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계명이며, 그 계명은 하느님을 닮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그분의 거룩함이 우리의 생각에서, 우리의 말에서, 우리의 행실에서 드러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신명 5,6-18 참조).

그런데 그분이 일전에 우리에게 주셨던 계명은, 그분이 늘 다시금 우리에게 거듭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이미 오랫동안 잊혔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목소리가 없었다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십계명은 여전히 지켜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목소리는 바로 양심입니다. 십계명에서 하느님은 그 옛날 인류 전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말하자면 온 땅에, 온 민족에게, 모든 사람과 모든 시대에 퍼져나갔습니다. 십계명은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모든 사람을 위해 거룩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그 목소리는 이제 같은 하느님의 또 다른 목소리로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하느님은 산의 정상 밖에서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천둥과 벼락으로가 아니라 고요하고 내밀하게 말씀하십니다. 감동적이지만 피할 수 없이, 확고하지만 가차 없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양심입니다. 하느님의 두 목소리이지만, 하나는 다른 하나의 메아리입니다. 둘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그 옛날 사랍들이 하느님 앞에 머릴 숙이며 세 번 ‘거룩하시다!’ 하고 환호했던 것처럼, 사제도 감사송 끝에 몸을 낮추어 겸손하게 팔을 펴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이사 6,2-3).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이것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거룩하시다sanctus’의 노래를 부를 때 해야 할 일이고,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할 때마다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은 그분의 훈계를 따라 우리의 양심에 귀 기울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양심, 곧 마음속에서 고요하지만 끈질기게 들려오는 이 목소리는 참으로 묘합니다. 사람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지만, 이 목소리만큼은 강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양심이 ‘이것은 나쁜 거야.’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어쨌든 나는 그렇게 할 거야.’라고 말하며 그 목소리에 저항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야, 그것은 좋은 거야.’라고 말하도록 양심에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양심을 속이고, 온갖 속임수와 변명으로 양심을 피해 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환상일 뿐입니다. ‘이는 옳지 않아!’라고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은 끝납니다. 온갖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쪽 구석에는 희미한 불안감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귀 기울여 들으면, 이 목소리는 다시금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그것은 옳지 않아!’라고 소리칩니다. 우리는 이 목소리를 억누르거나 파괴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소리를 무뎌지게 할 수 있고, 계속해서 무시할 수도, 마침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목소리는 어떻게든 다시 깨어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목소리이며, 우리의 심장 박동이 멈출 때까지는 침묵하지 않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 목소리는 먼저 큰 소리로 우리에게 불리하게 증언하고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나는 경고했고 훈계했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뜻을 대변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형제 여러분, 역사를 통틀어 양심에 얼마나 많은 폭력이 가해졌습니까! 얼마나 많은 악이 묵인되었습니까! 얼마나 많이 악이 선으로 불리고, 선을 악으로 일컬어졌습니까! 얼마나 많이 불의가 양심의 이름으로 저질러졌습니까! 얼마나 많이 양심 있는 사람들이 조롱 받았습니까! 그럼에도 양심은 죽일 수 없었습니다. 양심은 도처에서 강력한 힘으로 움직이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집단적 죄가 얼마나 큰지 우리가 모두 깨달을 때까지 양심은 더욱 큰소리로 외칠 것입니다.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양심을 우리 행동의 주인으로 다시 만드는 것뿐임을 깨달을 때까지 외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쳤던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돈도, 권력도, 명예도 아닌 오직 양심만이 우리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께 기초한 것만이 계속됩니다. 오직 양심에 기반한 것만이 지속합니다. 양심은 세 번 거룩하신 하느님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무너진 곳을 재건하고자 하는 사람은 특히 한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곧 양심의 주권이 다시 존중받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람들이 다시 양심에 복종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투신해야 할 점입니다. 모든 악의 근원은 여기에 있습니다. 곧 양심에 폭력을 가하고 선을 악이라 부르고, 악을 선으로 부르기 때문에 악이 생겨났습니다. 모든 불행의 근원은 바로 양심의 계명을 따르지 않는 데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목소리보다 특권, 명예, 권력, 돈이 우선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개선되려면, 양심이 다시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서 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에게서 시작해야 합니다. 세상이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면, 여러분은 모든 일에서 양심에 따르는 법을 다시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양심에 따라 사는 법을 다시 배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양심에 묻지 않는 데에 익숙해지지 않았나요? 이익과 권력이 법보다 우선한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이익은 자신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 관계없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공연하게 주장되지 않았나요?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그리고 계획하는 모든 일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이에 대해 양심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과연 그것을 해도 되는가?”

어떤 일이 실용적이거나 유리하거나 수익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물음이 이렇습니다. “그것은 과연 허용되는 일인가? 그것이 정말 선한 일인가? 그것이 하느님께, 그리고 영혼 안에서 그분의 목소리인 양심에 부합하는 일인가?”

만일 양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 아무리 그 이익이 크다 할지라도, 그것을 행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라고 양심이 말하면, 아무리 실용적이라도 그것을 이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정말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양심이 없는 사람이 ‘그대는 정말 바보입니다.’하고 우리를 비웃더라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계몽된 사람이나 무자비한 사람이 수없이 그렇게 한다 해도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유혹이 찾아올 것입니다. 곧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게 굴지 마세요! 그대는 알량한 그 양심 때문에 명백한 이익을 놓치고 싶습니까?’ 그러면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양심에 반하는 이익은 악입니다. 나는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유혹은 또 찾아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무리수를 두지 마세요! 모든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발 한 번만 해보세요.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단호하게 ‘그것은 양심에 어긋납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곧 양심을 거스르는 모든 행위는 거룩하신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이며, 또한 우리의 최고 이익에 반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동료의 구원과 우리 민족의 구원에 타격을 가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양심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양심에만 저와 온 인류의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양심을 지키기 위해 나서는 모든 싸움은 모두의 구원을 위한 싸움입니다. 제가 양심을 지키기 위해 바치는 모든 희생은 모두의 발전을 위한 희생입니다. 내가 양심에 충실하여 이루는 모든 진보는 전정한 평화, 보편적 번영, 공동선으로 이어지는 길로 나아가는 진보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한 음성에 순종하여 행하는 일은, 비록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혹은 사람들이 비웃을지라도, 그것은 개인과 사회의 참된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