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제92호(봄) 신앙의 오솔길
본문
Ⅷ. 성변화
하느님의 완전성 : 하느님께 대한 순종
로마노 과르디니 지음
김선태 주교 옮김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우리가 생각이 순수하고 성격이 매우 좋고 행동이 너그럽고 품격을 갖춘 사람을 만난다면, 그런 사람은 우리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그를 반기며 칭찬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에게서 발산되는 위대함, 순수함, 품위 등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촉구합니다. 곧 우리도 그처럼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바람이 부담스럽기 때문에 때때로 저항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우리보다 훨씬 훌륭하기에 그런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를 두루 헐뜯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보호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처럼 고상한 사람은 살아 있는 독촉장처럼 우리 앞에 우뚝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며, 우리 영혼의 사명을 일깨워 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가 옳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위대하고 고귀한 것은 모두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우리에게 재촉하는 목소리가 있고,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세차게 요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대는 감탄하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그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대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순결함, 모든 고귀함, 모든 위엄의 전형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하시고, 무조건적이시고, 어떤 제한이나 유보 없이 선을 행하시겠다는 결심이 단호하시고, 정의로우시고, 진실하시고, 신실하시고, 강하시고, 친절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점이 우리 영혼 앞에 분명히 드러날 때, 그리고 이 모든 거룩함이 너무도 완벽하고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고 깊이 생각하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은 고요하고 엄숙해집니다. 우리는 깊은 경이로움으로 인해 그분께 머리를 숙이고 그분을 경배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곧바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 속에서는 다른 무언가가 꿈틀거립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완전함은 살아 있는 계명처럼 우리 앞에 우뚝 서 있습니다. 그분은 영혼이 기뻐하다가 고요히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풍경처럼 당신을 묵상하게 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완전함은 다음과 같이 재촉하는 살아 있는 계명과도 같습니다.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여라!”
물론 이러한 재촉을 받는 것은 때때로 번거롭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유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간혹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많은 핑계를 늘어놓으면서 그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생각에서 아예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완전하심은 동시에 우리에게 “너도 그렇게 하라!”는 명령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성한 요구에 대해 우리 존재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분명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저는 그분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습관을 한 번쯤 떨쳐내야 합니다. 습관은 끔찍한 사기꾼이기 때문입니다. 습관은 하느님의 말씀을 무디게 만들고 위대한 생각을 하찮게 만듭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혼을 일깨운 상태에서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는 말씀에 대해 완전히 깨어, 완전히 신선하게, 새로운 마음으로 이해하기 바랍니다. 하느님처럼 거룩하고 완전하게 되십시오. 이것은 엄청난 일이지 않습니까?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십시오! 만일 어떤 인간이나 어떤 사상가가 그렇게 말했다면, 어리석거나 불손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떠올랐다면, 이는 주제넘은 교만한 충동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 이 말씀은 엄연히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당신처럼 될 것을 진지하게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늠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내면을 살펴봅시다! 단 하루만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우리의 영혼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얼마나 많은 나약함, 얼마나 많은 비겁함, 얼마나 많은 태만함과 경솔함 등이 나옵니까! 우리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까! 우리 마음에서 어떤 감정이 솟아오릅니까! 우리는 참으로 어떤 힘든 싸움을 치르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저녁에 하루가 또다시 큰 실패로 끝나고 있음을 얼마나 자주 인정합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무한히 완전하신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어야 합니까?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진 엄청난 간격을 제대로 느낀다면, 그리고 그분께로 올라가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제대로 느낀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도 그분의 영원하신 위엄을 절망적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비로소 우리는 구세주가 우리에게 오셔야 했음을 이해하는 올바른 상태에 이릅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무한한 요구를 온전히 채우셨던 유일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것을 바라보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에 대해서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그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실제로, 참으로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단지 존재하신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신성이 그분의 거룩한 인성 안에서도 작용하였고, 그분의 영혼을 은총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신성은 그분의 마음속에 거주하였습니다. 신성은 그의 이성을 충만하게 함으로써, 그분은 하느님의 빛으로 비추어졌고, 그분의 내적 시선은 하느님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분의 인간적 성품은 신성해졌습니다. 곧 하느님의 순수함으로 변화되었고,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활동했고, 하느님의 규율로 다스려졌고, 하느님의 자비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분의 의지는 하느님의 사랑과 똑같았고, 그분의 생각은 하느님의 생각과 같았습니다. 그분 안에서 하느님은 존재적으로만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아버지가 하늘에서 완전하신 것처럼, 그분은 참으로 완전한 분이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서, 그분이 인간을 받아들이셨던 표정을 통하여, 그분이 당신의 존재 전체로 계시하셨던 태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필립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하고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항상 그러하셨습니다. 그분의 삶 전체는 신적인 완전함을 유일하게 계시하시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런데 이러한 계시가 절정에 이른 적이 있었습니다. 신적인 거룩함의 충만과 깊음과 권능이 터져 나와 그 무한한 열정으로 그분을 온전히 불살랐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죽음에 이르셨을 때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올리브 동산에서 그분이 앞으로 짊어질 죄악의 무게를 느끼고, 죽음의 고통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셨을 때, 그분은 자신의 온 존재와 몸과 영혼과 모든 능력과 모든 감정을 다 바쳐 더할 나위 없이 피어난 젊은 힘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이 말씀 안에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곧 인식, 사랑, 능력, 규율, 진리와 순수함과 선함 등 모든 것이 이 말씀 안에 있었습니다. 모든 색깔이 햇빛 속에서 함께 모여 하나의 흰 광선으로 합쳐지듯이, 신성한 완전성의 모든 충만함은 가장 순수한 태도, 가장 순수한 헌신, 완전한 순종 등이 빛나고 타오르는 하나의 광선으로 녹아듭니다.
그리고 이는 단지 짧은 그 순간만이 아닙니다. 이 신적인 빛은 그 끔찍한 시간 동안, 곧 최고의회 앞에서, 헤롯과 빌라도 앞에서 협상하는 동안 모든 고통과 조롱 속에서도 빛나고 타올랐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 동안, 그 빛은 빛나고 불탔습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아버지께 대한 이 위대한 순종 안에서 완전히 불타올랐습니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그때 하느님의 충만한 완전성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빛났습니다. 그때 하느님의 숭고한 위대함이 인간 영혼의 태도에서 동등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그때 피조물이 태초부터 간절히 기다려온 희망처럼, 하느님의 완전성의 찬란함이 흐려지지 않고, 깨지지 않고, 손상되지 않은 채 인간의 마음속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이 궁극적인 고귀함을 부여받는 이러한 빛남이 끊기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 큰 사건이 그것이 일어난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단단한 형상 안에 담으셨습니다. 그분은 그 빛나는 광채에 명확한 형태와 끊임없는 지속성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분은 성금요일의 순종 행위, 곧 당신의 삶과 죽음의 온전한 의향을 거룩한 미사성제의 신비에, 성변화의 신비에 담으셨습니다.
사제는 감사송을 장엄한 찬미와 함께 바치고 나서, 교회의 모든 관심사를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를 위해, 교황과 주교를 위해, 모든 신자를 위해 기도하고, 사제가 봉헌하고자 하는 특별한 지향을 위해서도 기도를 바칩니다. 사제는 특히 마지막 두 기도에서 주님께서 희생 제사를 받아들이시고 예물의 성변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 다음 사제는 예물준비 때 제단에 놓인 빵을 손에 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 전날 거룩하신 손에 빵을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전능하신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며 축복하시고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이어 사제는 축성된 빵을 들어 교우들에게 보이고 성반에 내려놓은 다음, 깊은 절을 합니다. 이어서 계속 잔을 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녁을 잡수시고 같은 모양으로 거룩하신 손에 이 귀중한 잔을 드시고 다시 감사를 드리며 축복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어 사제는 성작을 들어 교우들에게 보이고 성체포 위에 내려놓은 다음, 깊은 절을 합니다.
이것이 성변화입니다. 이는 성찬례 전체에서 가장 거룩한 순간이며 절정이며 핵심입니다.
성변화에서 낭독된 말씀과 교회가 우리에게 가르치듯이, 여기에서는 그 옛날 십자가에서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일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다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친히 성변화를 일으키십니다.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분으로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당신 몸을 내어주시며, 우리와 많은 이를 위해 피를 흘리십니다.” 이 한 가지 일이 거듭거듭 일어납니다. 그 무한한 숭고함의 시간이 여기에서 다시 생생해집니다. 당시 올리브 동산과 법정과 골고타에서 빨리 지나갔던 시간이 이곳 성변화의 신비에서 끊임없이 지속하여 일어납니다. 교회가 있고 그 교회 안에서 미사가 봉헌된다면, 매일매일, 모든 곳에서, 전 세계 어디에서나 하느님의 무한하신 완전성이 인간을 통해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하느님께 되돌려지고, 하느님의 거룩함이 그분 아들의 마음으로부터 하느님께 다시 발산되는 그 고통의 시간이 빛날 것입니다. 성변화는 참으로 거룩하며, 모든 개념을 뛰어넘는 변화입니다. 여기에서 짧은 말과 단순한 행동에 숨겨진 채,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그분의 의향이 나타납니다. 그 의향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대한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순종이며, 그분의 전 존재와 능력을 아우르는 순종, 하느님의 마음에 온전히 드실 수 있었던 순종입니다(마태 3,17 참조).
이것이 성변화이며, 거룩한 미사 가운데 핵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를 그렇게 분부하셨을까요? 교회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이 깨끗한 제물, 거룩한 제물, 흠 없는 제물, 영원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존엄한 대전에 봉헌하나이다.”
우리 인간은 무한히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무력합니다.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께 합당하게 감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흠 없는 마음, 당신 자신의 가장 거룩하신 마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어, 우리가 그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제물을 봉헌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 제물은 그분 자신처럼 온전히 거룩한 제물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지고한 제사의 권능으로부터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다음 계명을 실천하는 힘이 주어집니다.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이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나약한 면을 의식한 채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 낙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완전히 마음에 들어 하시는 우리의 구세주, 친히 하느님의 요구를 온전히 실현하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적어도 그러한 요구를 위해 노력할 힘을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이러한 노력이 어리석거나 절망적이지 않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 일을 바로 미사성제를 통해서, 성변화를 통해서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닮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가 하느님을 닮게 하는 이 위대한 활동은 어떤 활동일까요? 그것은 성변화 안에서 무한한 완전성을 생생하게 유지하는 활동 곧 순종입니다.
이제 순종을 일상으로 생각해 봅시다. 반드시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는 그 의무를 알고 있고,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행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렵습니다. 우리는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순종한 것입니다. 의무는 하느님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우리는 외적으로는 이행하더라도, 마지못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순종을 하였지만, 영혼으로가 아니라 몸으로만 순종한 것입니다. 이런 순종은 별로 가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순종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예, 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혹은 어떤 유혹이 우리를 사로잡을지도 모릅니다. 곧 하느님께서 금지하신 이런저런 일에 우리를 끌어들이는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외적으로 이런 유혹을 거절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는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순종은 오직 외적인 차원에 머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온전한 마음으로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순종이 바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순종입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에게 요구되었던 같은 순종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곧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깊은 내면의 의지로 순종하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예, 주님, 저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러한 순종은 우리가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하느님을 닮게 하는 순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닮음은 도대체 어떤 닮음일까요? 우리가 그분처럼 세상을 창조하는 닮음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그분처럼 과거와 미래를 두루 바라보는 닮음입니까? 닮음을 그런 데에서 찾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이시고, 우리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하느님과 우리는 존재와 본질에서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의향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그분의 의지와 같게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의지를 우리의 의지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의 의지를 그분의 의지로 채울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의지와 하나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이 원하신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창조에서 완전하지 않습니다. 지식에서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영광에서도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순종을 통해 의지와 지향에서 완전해집니다.
거룩한 미사는 우리에게 그런 순종의 힘을 줍니다. 우리가 미사에 참여하고, 참된 겸손과 헌신으로 생활한다면 모든 것을 이기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 마음에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낮 동안 성변화를 기억하고, 필요할 때마다 영적으로 그 성변화를 되새기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를 정화하고,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를 인도하여, 비록 어렵더라도 우리는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는 원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높이에 다가서는 한걸음입니다.







